178.
유스타프의 새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레베카는 멍하니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 말을 귀담아들으신 모양이군요.”
“웃지만 마시고요. 잭이란 아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돈을 줘도 장난감을 쥐여 줘도 아주 요지부동이에요. 마가렛 옆에 딱 붙여서 호위라도 되는 것마냥……. 물론 귀엽기는 하지만 무섭다고요.”
“그렇다면 책을 사 주세요.”
“책이요? 꼬맹이가 그런 걸 좋아합니까? 이상한 아이네.”
“호기심이 많은 아이거든요.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걸 좋아하니 유스타프가 잘 아는 의학에 대해 가르쳐주면 좋겠네요. 마가렛은 주방에서 자주 다치는 편이니 치료술에 관심이 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마가렛이 자주 다치는군요. 그럼 그녀의 상처를 보호해줄 연고를…….”
고민에 빠진 유스타프를 보며 레베카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전 생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잭의 모습은 의서를 뒤적이던 모습이었다.
그는 마가렛에게 생기는 잦은 생채기를 단번에 고칠 연고를 만들겠다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나 레베카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번졌다.
유스타프가 결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꼭 잭의 마음을 얻고야 말겠어요. 그럼 암시장에 언제쯤 가시렵니까?”
“오늘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요.”
“암시장은 그리 자주 열리는 게 아니라서요. 아마 사흘 뒤에 열릴 겁니다.”
“그럼 그때로 하지요. 필요한 게 있을까요?”
“후드가 달린 로브와 얼굴을 가릴 가면이면 족합니다. 말을 탈 수 있으시죠?”
“형편없는 실력이긴 하지만 달릴 수는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사흘 뒤 새벽 한 시경에 제가 말씀드리는 곳으로 말을 타고 와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유스타프가 인사를 건넨 뒤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문을 빠져나갔다.
레베카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시선이 빛의 장미를 그린 삽화에 오래간 머물렀다.
* * *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알리시아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있는 아서의 작은 입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의 젖으로 자신의 아이가 큰다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귀족의 삶이었다.
알리시아는 기꺼이 그 삶을 받아들였다.
“도련님이 참 얌전하세요. 제가 본 아기 중에 가장 잘생기셨습니다.”
“당연하지. 내 아들인데.”
옥타비오가 내쳐진 뒤 알리시아는 한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어찌 됐든 그는 저택에 남은 유일한 자신의 편이었다. 게다가 아서를 후계자로 만들어줄 뒷배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룻밤 사이에 실권을 잃고 지하 감옥에 갇혔다.
요즘 제플린이 종종 다정하게 굴기는 했지만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친절이었다.
알리시아는 불안한 미래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때문에 알리시아의 모든 관심은 아서에게 쏠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들의 통통한 손발에 매달렸다.
“자. 다 됐습니다.”
알리시아가 유모에게서 아서를 받아들었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알리시아를 올려다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너만이 내게 진심으로 웃어주는구나.’
알리시아는 텅 빈 가슴에 딱 맞는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서를 안고 어르기를 반복했다.
“꺄악!”
그때 문밖에서 섬뜩한 비명이 들려왔다. 불길한 비명 소리였다.
유모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밖으로 나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마님께선 여기 잠시만 계세요.”
유모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알리시아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기다린 지 수십 분. 그동안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문이 거칠게 열렸다.
유모가 사색이 된 채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 신의 기사단이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신의 기사단? 백작님이 또 무슨 잘못을 했어?”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하네스 공작님까지 오셔서…….”
“요하네스 공작이라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율리안의 맹수 같은 눈빛을 떠올리곤 얼른 아서를 요람에 눕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베이츠! 어서 나를 보호해라. 어서!”
제플린이 포박된 채로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알리시아는 쓰러지듯 난간을 붙들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플린!”
그녀의 외침은 소란에 섞여 아무도 듣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알리시아가 당장 그를 구하려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자 유모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가지 마세요! 상대는 신의 기사단입니다. 자칫하다간 마님까지 휘말릴 수 있어요.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그녀의 말에 알리시아는 발을 더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알리시아의 얼굴이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선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심각한 일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요하네스 공작의 입가에 떠오른 비릿한 미소를 보니 더더욱 자신의 예감에 확신이 들었다.
* * *
“어떡하지……. 어떻게 해…….”
밤이 내려앉았는데도 알리시아는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저번에 그가 신의 기사단에 끌려갔을 때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풀려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제플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냥개들을 잡고 하소연을 해도 모두들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이럴 때 옥타비오가 있었다면!’
옥타비오라면 분명히 이 상황을 벗어날 계책을 마련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싸늘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안 되겠어. 그를 만나봐야겠어.”
알리시아는 서둘러 로브를 뒤집어썼다.
빛의 전당의 지하에는 두 번 다시 발걸음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단 제플린을 구해내야 할 때였다.
제플린은 아직 아서를 데본셔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플린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쫓겨날지도 몰랐다.
자신이 정식으로 백작 부인이 되었다곤 하나 그녀의 출신 때문에 가신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아직 파비올라가 살아 있었다.
가신들은 분명히 자신이 아니라 파비올라의 편을 들어줄 게 뻔했다.
이곳에서 그녀의 입지는 무척이나 좁았다.
알리시아는 무심코 베이츠를 떠올렸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른 고용인들처럼 경멸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는 제플린의 기사단장이었으니 지하 감옥 열쇠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알리시아가 얼른 채비를 마치고 문을 여는 순간, 커다란 인영이 그녀의 앞에 섰다.
“이 시각에 어딜 가십니까.”
무감한 어조의 목소리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베이츠!”
찾던 이의 등장에 알리시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꽃송이처럼 피어나는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던 베이츠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찾고 있었어요. 혹시…….”
알리시아는 주변을 살피다가 베이츠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베이츠는 자신의 손목을 휘감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리시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베이츠. 혹시 지하 감옥 열쇠를 가지고 있나요?”
“그건 왜 찾으십니까.”
“옥타비오를 만나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제플린이 걱정돼서……. 그라면 해결책을 알고 있을 거예요.”
베이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는 잔뜩 울상인 알리시아의 눈망울을 바라봤다.
‘대체 그 남자가 뭐기에, 당신은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냉대하고 모욕을 해도 대체 왜 이 더러운 곳에 계속 있는 겁니까.’
하고 싶은 질문들이 그의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베이츠는 침음을 삼키는 걸로 차오르는 질문을 밑으로 내렸다.
그가 정제된 것처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
“옥타비오는 이미 그곳에 없으니까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망가십시오. 데본셔 백작가는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망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리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도련님과 당신을 위해 피난처를 마련해 뒀습니다.”
“시, 싫어요!”
알리시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떠오른 적대감에 베이츠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저는 데본셔 백작 부인이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여기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리고 저는 남편에게 그런 소릴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요? 저와 아서를 쫓아내고 이곳을 차지할 생각인 건 아니겠죠?”
알리시아는 소중한 것을 베이츠가 빼앗기라도 하는 것마냥 몸을 움츠렸다.
떨리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는 베이츠의 눈가에 문득 절망이 깃들었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당신은 제 주군의 아내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을 끝까지 보호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주군의 명이 없었더라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일단 제 말을 따라주십시오.”
일단 알리시아를 먼 곳으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제플린이 죽고 나면 그때 다시 돌아오게 하면 된다고 베이츠는 생각했다.
제플린이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베이츠를 바라봤다.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
그녀는 꼭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그래. 너도 그이가 끌려가는 걸 봤잖아…….’
혹시라도 그들이 아서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알리시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정말 베이츠의 말대로 백작가가 파산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 아름다운 드레스들과 장신구들, 그리고 끼니마다 나오는 맛있는 음식들을 이제 맛볼 수 없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