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알리시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알리시아는 떨리는 눈을 들어 물었다.
“도, 도망가려는 곳이 오두막 같은 곳은 아니겠죠? 저택만큼은 아니더라도 호화로운 별장 정도는 되겠지요?”
“그건…….”
베이츠는 진실을 고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요하네스 공작은 알리시아를 살려주겠다고 했지 융숭한 대접을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모른다고 답했다간 알리시아는 그를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맞습니다. 백작님의 별장 중 하나로 피신시켜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알리시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좋아요! 그럼 어서 짐을 챙길게요.”
알리시아는 얼른 보석함과 옷장을 열어 값비싼 것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소란에 깨어난 아서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서! 잠시만…….”
옷더미 속에 파묻힌 알리시아가 난감한 얼굴로 아서를 바라봤다.
그녀가 양손에 든 무거운 드레스들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베이츠가 저벅저벅 아서에게 다가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아서를 끌어안았다.
신기하게도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그의 품에 안기자 울음을 뚝 그쳤다.
“쉬이……. 곧 행복해지실 겁니다. 그러니 눈물을 거두십시오.”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그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천천히 번져나가는 그의 미소를 본 알리시아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의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문득 알리시아는 그의 입매가 아서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직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알리시아의 눈이 빠르게 베이츠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훑었다.
섬뜩한 직감이 떠올랐다.
옥타비오가 암시장에서 구했다던 건장한 남자와는 어둠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일이 끝나고 나선 기절한 듯 잠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나가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목소리도 얼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건 가슴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약속한 마차가 오기까지 그리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하지만 다시 냉정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알리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와 같은 남자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는 기사일 뿐이었다. 남편의 기사.
알리시아는 계속 떠오르는 터무니없는 상념을 떨쳐버리고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연금술탑에서 나온 증거들은 전부 조작된 걸로 확인됐다.
연금술사들은 감옥 안에서 공책이라도 달라고 농성을 피웠다고 했다.
그에 질린 신의 기사단은 애초에 연구에 미친 그들이 그런 거사를 계획할 시간 자체가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카트린느도 황궁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황제와 독대 후, 그녀는 황실 전속 연금술사가 되어 원하던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게 잘 풀렸지만 로이드의 보고를 듣는 율리안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제플린이 도망갔다고……?”
“예. 누군가가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를 습격했습니다. 엄청난 실력자들이더군요. 저희는 심판자들이 아닐까 의심 중입니다.”
“쥐새끼 같은 게 살아나기도 잘 살아나는군…….”
“예?”
“아니다. 바쁘신 몸께서 직접 내게 보고까지 하러 오다니 아주 황송하군.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율리안이 비뚜름히 웃으며 말했다.
로이드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일전에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했습니다. 신의 사자께서 선택하신 분이 그런 일을 꾸밀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됐어. 객관적인 증거가 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그게 조작된 것이라도 말이야. 다만 다음에는 무작정 상부의 명만 따르지 말고 생각이란 걸 해봤으면 좋겠군.”
“상부의 명을…… 거역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 한 번쯤 의심 정도는 해보라는 말이었어.”
“저는 기사입니다. 제 의견 같은 건 쓸모없습니다.”
율리안은 로이드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레오 앞에서 보였던 그 뜨거운 눈물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깎아 만든 바위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응접실의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예상한 대답이라 놀랍지도 않군. 제 인생을 제가 꼬겠다는 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순간 무심함을 유지하던 율리안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창밖으로 레베카와 릴리가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베카의 품에 꽃이 한 아름 안겨 있는 걸 보니 둘이서 숲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는 레베카의 하얀 치맛자락에 물든 풀물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해. 나는 아주 바쁜 몸이라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언젠가 또 뵙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갑작스런 축객령에도 로이드는 당황조차 없었다. 그는 빙그르르 돌아서 각 잡힌 발걸음을 옮겼다.
* * *
옷에 묻은 아침 이슬을 털어내며 릴리가 자신 없이 물었다.
“카림 스승님이 정말 꽃을 좋아할까?”
오늘은 카림이 북부로 다시 돌아가는 날이었다.
릴리는 그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야겠다며 아침부터 꽃을 꺾자고 레베카를 졸라댔다.
몇 주 전 헤레나와 리비아와 피크닉을 갔다 온 뒤로 릴리는 꽃에 푹 빠져 있었다.
릴리는 서툰 솜씨로 화관까지 엮었다.
하지만 막상 그걸 주려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선물을 거절당한 기억을 떠올리곤 시무룩해졌다.
레베카는 쭈그리고 앉아 릴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선물이란 건 말이야, 그 내용물보다 주는 사람의 마음에 더 기쁜 거란다. 릴리는 이걸 만들 때 정성을 다했지?”
“맞아! 카림 스승님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 조금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엄청 예쁘게 만들었어.”
“그러면 된 거야. 분명 라트라니스 공작님도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레베카 말이 맞아. 이 세상 누구도 그렇게 멋진 왕관을 싫어할 수 없을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 율리안이 태양을 등지고서 우뚝 서 있었다.
릴리가 화관을 들어 보이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오빠, 바보구나. 이건 화관이야. 왕관이 아니고.”
“그래? 워낙 눈이 부셔서 황금으로 만든 왕관인 줄 알았지.”
그가 씩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릴리는 바보라고 연신 외치면서도 율리안의 말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릴리의 통통한 뺨이 씰룩거리는 걸 보고 웃음을 머금었다.
율리안은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는 유모를 쫓아다니면서 릴리가 좋아하는 말이나 놀이를 배웠다.
그리고 꾸준히 배운 걸 행동으로 옮겼다. 그 덕인지 율리안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던 릴리의 버릇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오히려 주눅 드는 쪽은 율리안이었다.
“그러니까 네 선물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하지만 오빠는 거절했잖아.”
릴리가 눈을 깜빡이며 촌철살인을 날렸다.
율리안은 화살이 심장에 내리꽂힌 것처럼 신음을 내뱉었다.
“그, 그건……. 그래……. 내가 미안하다.”
율리안이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릴리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이제 거절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건 잊을게.”
“너처럼 착한 아이가 나와 같은 핏줄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율리안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릴리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베카가 율리안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뭐해? 안아줘.”
그녀의 말에 율리안이 흠칫 놀라며 릴리와 레베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감히 내가? 그래도 돼? 하는 눈치였다.
레베카가 괜찮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율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릴리에게 다가갔다.
“릴리…… 혹시 내가 널 안아도 될까?”
릴리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새초롬하게 웃었다.
“응!”
율리안이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엉거주춤하게 릴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를 품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릴리를 품에 안았다.
릴리는 생각보다 따뜻한 혈육의 온기에 조금 놀랐다.
레베카만큼은 아니어도 율리안의 품도 아늑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릴리가 손을 펼쳐 율리안을 껴안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헤실헤실 웃었다.
“나 이제 자주 안아줘. 목마도 태워줘!”
율리안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졌다.
그는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릴리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럴게, 릴리. 내 목이 부서질 때까지 태워줄게.”
“으……. 그건 좀 징그러운데…….”
레베카는 이제야 남매라 부를 정도의 사이가 된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둘이 티격태격 할 정도로 사이가 호전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자고로 남매 사이는 싸움으로 완성되는 법이었다.
“이거, 이제 가는 손님이라고 따돌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때 하품을 하며 카림이 다가왔다.
릴리는 얼른 율리안에게서 떨어져 나와 화관을 몸 뒤로 숨겼다.
레베카가 웃으면서 카림을 맞았다.
“따돌리다니요. 워낙 곤히 자고 계셔서 깨울 수 없었을 뿐입니다. 오늘 긴 여정을 떠나셔야 하니까요.”
“그렇습니까. 부인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제가 실언을 했네요.”
카림은 레베카의 손등 위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슬쩍 율리안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명백히 율리안을 도발하려는 행동이었다.
율리안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율리안은 슬그머니 레베카의 손을 잡아끌고는 카림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숙녀들 앞에서 하품이나 해댈 거면 그냥 침대 속에 더 누워 있지 그랬어. 단란한 가족의 아침을 방해하지 말고.”
“그렇게 열 내지 말라고. 앞으로 언제 또 얼굴을 볼지 모르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약속한 건 어떻게 됐어?”
“잘 처리했어. 연금술탑 건을 도와준 대가로 식량을 주겠다고 했더니 황제가 흔쾌히 허락하더군. 황금이 아니라서 별 상관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야. 북부엔 식량이 황금이나 다름없는데. 안 그래?”
“뭐. 부끄럽지만 그건 사실이지.”
“연금술사도 대기해 뒀어. 네가 가는 길목에 적당히 등장하게 둘 테니까 알아서 구하는 척해. 그는 네 은혜에 감동해서 거저 일하는 걸로 해두었어.”
“이렇게까지 하려니까 좀 속이 쓰리군. 내 영지에서 연금술사 하나 마음대로 못 부린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다 나랑 결탁할까 봐 그런 거겠지. 이래봬도 자히드라는 겁이 많은 황제야.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너도 예전보단 자유로울 거야.”
“너 말이야. 저번부터 왜 자꾸 사라진다 어쩐다 그러는 거야? 진짜로 공작 작위를 버릴 셈인가?”
카림이 흘깃 레베카를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