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80화 (180/232)

180.

그의 질문에도 레베카는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웃음이 언뜻 슬픈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아 카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율리안이 카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 자린 내가 원한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든.”

“그럼 대체…….”

“자, 릴리. 라트라니스 공작님께 드릴 게 있다고 하지 않았니?”

카림의 질문이 그치지 않을 것 같자 레베카가 슬쩍 릴리를 떠밀었다.

릴리가 우물쭈물거렸다.

카림은 귀여운 제자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게 줄 게 있다고? 그게 뭐지?”

“거창한 건…… 아니에요.”

릴리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화관을 내밀었다. 카림은 활짝 피어난 알록달록한 꽃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제, 제가 손수 만들었어요. 혹시 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아요.”

카림은 연무장에서 자신에게 거침없이 칼을 들이밀던 그 소녀와 지금 눈앞의 소녀가 동일 인물인지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릴리의 얼굴과 화관을 쥔 팔뚝에 선명하게 보이는 근육을 보고 그녀가 맞다는 걸 확인했다.

카림은 릴리의 선물을 받아들곤 호쾌하게 웃었다.

“푸하하. 릴리, 내 인생에 꽃 선물을 준 건 네가 처음이야.”

그는 화관을 얼른 머리에 썼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얹어 턱을 치켜들며 릴리를 내려다봤다.

“어떠냐. 내 아름다움이 한껏 빛이 나고 있니?”

긴장으로 굳어 있던 릴리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카림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정말 멋있어요! 특히 스승님의 승모근이 더 돋보여서 아름다워요!”

“그래? 그나저나 나 없더라도 수련은 게을리하면 안 된다?”

“수련은 제 놀이인걸요? 매일 해도 질리지 않아요.”

“으으……. 요 기특한 녀석.”

카림이 릴리의 머리를 연신 헤집어 놓았다.

릴리는 그래도 좋은지 헤실거리며 웃었다.

레베카도 흐뭇하게 사제 간의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사색이 된 건 율리안뿐이었다.

카림과 릴리의 붉은 눈동자는 꼭 닮아 있었다. 호전적인 성격하며 자잘한 취향까지 마치 한 가족처럼 비슷했다.

이래서야 자신보다 카림이 릴리의 오빠라고 해도 다들 믿을 정도였다.

율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좀 더 노력을…….’

그는 애써 다부지게 손을 쥐었지만 카림 앞에서 밝게 웃는 릴리를 보니 힘이 쭉 빠졌다.

그런 그의 얼굴을 살펴보던 레베카가 그에게 팔짱을 껴왔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 누가 뭐라 해도 릴리의 가족은 당신이야.”

율리안이 흠칫 놀라며 레베카를 바라봤다.

“내 고민을 어떻게…… 알았지?”

“당신 얼굴에 다 적혀 있는걸. 라트라니스 공작은 라트라니스 공작이고. 당신은 당신이야. 비교 같은 거 하지 마. 그리고 내 눈엔…….”

레베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서 말했다.

“당신이 제일 멋있어 보여.”

레베카는 그를 향해 양 볼을 발그레 붉히고서 그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어떻게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율리안은 가슴뼈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른한 기운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뻣뻣하게 몸이 굳는 것 같기도 했다.

이 기이한 감각 속에서 율리안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어이! 집주인. 나 점점 배가 고파오는데 아침 안 줄 거야?”

카림이 릴리를 목에 태운 채 그에게 말했다.

“나도 배고파. 오빠!”

릴리까지 합세하자 율리안은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 레베카를 안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오늘은 마지막이기도 하니 내가 직접 요리를 해주지.”

율리안의 말에 릴리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완전히 속았어…….”

알리시아는 망연자실하게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았다.

마차를 탔을 때만 해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차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제플린은 상권이 없는 시골에 별장을 만들지 않았다.

마부는 웬 허름한 오두막 앞에 알리시아를 내려주었다.

‘안에는 아기용품을 포함한 웬만한 생활용품은 다 갖춰져 있습니다. 거기 울타리에 쳐진 버튼을 누르면 보호막이 켜져서 그 안에만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사람이 와서 필요한 물건을 제공해 줄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자, 잠깐만! 베이츠는 분명히 별장으로 날 데려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야?’

‘저도 모르죠. 전 명령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럼 다음 일정이 바빠서 물러나겠습니다.’

마부는 산더미 같은 짐과 알리시아를 남겨두고 휑하니 가버렸다.

그러기를 이틀이 지났다.

알리시아는 아서를 품에 안고서 불안한 눈으로 오두막을 훑었다.

어릴 때 살던 집과 흡사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람과 침대가 단출한 가구 몇 개와 함께 놓여 있었다.

아서가 칭얼거리자 알리시아는 얼른 요람에 아서를 눕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울타리의 버튼을 누르곤 장작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난로에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여러 번 해댔다. 곧이어 훈훈한 온기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알리시아는 무심코 얼굴을 만졌다가 손에 묻어나는 숯검정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백작 부인이 된 이후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제 완벽한 백작 부인의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거의 고된 생활이 아직까지도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허름한 오두막에 적응하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정말 백작가가 망하기라도 한 걸까…….”

서러움에 울음이 북받쳤다. 정말 그런 거라면 자신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해졌다.

죽어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아서까지 있었다.

아서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게 된다면 알리시아는 차라리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알리시아의 시선이 패물을 챙겨온 가방에 맞닿았다.

“그래…… 아직까지 그곳에 보석이 더 많이 남아 있을 거야.”

알리시아는 아서에게 직접 젖을 먹이곤 이내 재웠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그녀는 램프를 들고서 오두막 밖을 나왔다.

깜깜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깊은 숲속인 건 알겠다.

아무래도 날이 밝아서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오두막 주변을 감싸고 있는 푸른색 보호막을 퉁퉁 쳤다.

보호막이 잠시 일렁이더니 원래대로 모습을 찾았다.

바스락-

지척에서 누군가가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얗게 질린 알리시아가 보호막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묵직한 인영이 멈칫 하는 게 보였다.

공포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미동도 없는 검은 인영을 바라보던 알리시아는 어쩐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졌다.

“베이츠……? 당신이에요?”

“…….”

잠시간 침묵이 흐르다가 어둠 속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으신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당신!”

알리시아는 득달같이 오두막의 버튼을 눌러 보호막을 해제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랜턴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른 채 베이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왜 날 속였죠? 별장으로 데려간다고 했잖아요!”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계시면 됩니다.”

“싫어요!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어요. 이런 허름한 곳에 조금이라도 있을 수 없어요! 전 백작 부인이라고요!”

여태껏 꾹꾹 눌러왔던 그의 감정이 알리시아의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자 폭발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보석을 걸치고 있어도 앉은 곳이 지옥인데! 당신이 그곳에서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울지 않으면 자지도 못하면서……. 그딴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그런 걸 당신이 어떻게…….”

알리시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대체 얼마나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봐 온 걸까.

자신의 가설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러면 더더욱 여기에 있을 수 없어.’

가난한 기사라니. 그에게 작위가 있기는 했지만 이름뿐이란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굶어 죽기 좋은 조합이었다.

알리시아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랜턴을 바라봤다.

잘게 조각낸 빛의 마석이 유리로 만든 랜턴 안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랜턴을 발로 깨버리고는 유리 조각을 손에 들었다.

“대체 무엇을…….”

베이츠의 당혹으로 굳어진 채 알리시아의 손을 멀거니 바라봤다.

유리조각을 쥔 그녀의 손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베이츠가 깜짝 놀라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피가 나지 않습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알리시아가 대뜸 유리 조각을 들어 제 목에 가져다 댔다. 드레스의 목둘레가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

“백작가가 망했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그저 당신은 나를 가지고 싶었던 거야!”

“아닙니다! 지금 재정 상태론 곧장 파산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을…… 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게 살길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건 이제 그만두고…….”

“오지 말라니까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녀의 목에 파고들었다. 알리시아는 아픔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나를 백작저로 데려가 줘요.”

“그건 안 됩니다. 그 지옥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겁니까!”

“지옥인지 천국인지는 내가 정해요. 지금 당장 나와 내 아들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어요. 당신과 도망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으니까.”

베이츠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난 데본셔 백작 부인이야. 죽을 때도 그 이름으로 죽을 거야.”

베이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깟 백작 부인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목숨보다 중요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멸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걸까.

“대답해요! 지금 날 당장 데려갈 건가요? 아니면 싸늘한 제 시체를 볼 건가요?”

그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알리시아의 안도의 한숨이 그에게는 끔찍한 비명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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