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카림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나서야 성을 떠났다.
그는 떠나는 것도 꽤 요란스러웠다.
카림은 북부에서 보낸 선물이 이제야 도착했다며 선물 개봉식을 두 시간이나 하고서야 짐을 챙겼다.
율리안은 말 위에 올라타는 그를 배웅하며 말했다.
“내가 부탁했던 거 절대 잊지 마.”
“정말 터무니없는 부탁이었지만 약속은 꼭 지키지.”
“그래. 믿을게.”
카림은 율리안의 신뢰가 잔뜩 담긴 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물었다.
“부탁이라니, 뭐야?”
“아. 그런 게 있어. 사소한 거야.”
둘의 다정한 분위기를 응시하던 카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이상 머물렀다간 눈치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도록 하지.”
“만나뵈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레베카가 싱긋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스승님, 잘 가세요!”
릴리가 쪼르륵 달려와 카림을 배웅했다.
카림은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졌다.
성의 현관 앞으로 돌아온 릴리는 가득 쌓여 있는 카림의 선물에 입이 귀에 걸렸다.
릴리는 카림에게서 받은 진귀한 검을 뽑아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베키, 이것 봐. 검이 울려. 이게 바로 공명이라는 건가?”
릴리는 검집에서 뽑아낸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칼날이 푸른색으로 빛나면서 진동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봐도 되겠어?”
율리안의 말에 릴리가 얌전히 칼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닿자 검은 푸른빛을 잃고 다시 평범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율리안이 릴리에게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명장이 만든 검에는 마나가 깃든다고 하지. 검이 주인이 알아본 모양이구나. 릴리 너와 상성이 잘 맞는 모양이야.”
릴리가 신나게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신난다! 꼭 애완동물이 생긴 기분이야.”
“그렇게 신나? 카림이 오랜만에 쓸 만한 선물을 했군.”
검집을 얼굴에 비비는 릴리를 보고 율리안이 흐뭇하게 웃었다.
“오빠, 베키. 나 연무장에 가도 돼?”
“곧 해가 질 거야. 릴리.”
“조금만 할게. 응? 시험해 보고 싶단 말이야.”
릴리는 율리안의 팔을 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숨길 수 없는 미소에 광대를 씰룩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녁 먹기 전엔 꼭 들어와야 해.”
“알았어!”
릴리는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며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정말 나중에 기사라도 시켜야 하나…….”
율리안이 멀어져 가는 릴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레베카가 그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릴리라면 분명히 잘할 거야. 혹여 나중에 릴리가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절대 거절하면 안 돼. 그건 국가적 손해나 다름없어.”
“하지만 그런 시커먼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레베카가 짐짓 눈썹을 치켜세우자 율리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는…… 해보지.”
그의 대답에 레베카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선물 더미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특이한 장난감들과 처음 보는 물건이 많았다. 레베카는 그중 황금색 와인병을 집어 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와인이네. 북부의 브랜드인가?”
술이라는 말에 율리안이 눈을 빛냈다.
“북부의 와인은 최상품이라 할 수는 없지만 특유의 맛이 있지. 그런데…… 이건 나도 처음 보는군.”
“그래? 술주정뱅이인 당신이 모르는 술이 있다니 의외인데?”
“술주정뱅이라니! 내가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는 편이…… 맞구나.”
레베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율리안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하인들의 첫 아침 일과가 그의 침실에 나뒹구는 술병을 치우는 것이었다.
율리안이 멋쩍게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오고 나서는 거의 마시지 않았어. 잠깐만…… 내가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고용인들이 말해줬어?”
“아니. 레오가.”
“뭐……?”
“레오가 말해줬어.”
“그게 무슨 말이야. 레오가 당신이랑 어떻게 말을 해.”
레베카는 알리시아가 제플린의 선물을 들고 왔던 날, 레오와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율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진작 알리지 않은 거야.”
“그야……. 그때 우리 둘 사이가 좀 그랬잖아. 그 다음엔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요하네스 공작 말고 레오와 말이 통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어.”
“나도 그 점이 이상해. 레오도 딱히 짚이는 바가 없다고 했어. 혹시 내가 당신과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성녀의 그릇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원래 내게 있던 신성력이 당신 곁에 있어서 증폭이 된 거지.”
“신성력으로 따지자면 으뜸이라는 교황도 레오와 말을 못해. 그리고 역대 공작 부인 중에서 레오와 살갑게 지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이상하네…….”
“몸에 무리가 가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그래도 나는 좋던데. 레오와 더 친해진 것 같아서.”
“당신은 레오가 안 무서워?”
“레오가 왜 무서워? 귀여운 고양이일 뿐인데.”
“신의 기사단이 그 귀여운 고양이 앞에서 넙죽 엎드리는 걸 못 봤어? 그게 보통 일반인들의 반응이야. 그런데 당신은 처음 레오를 봤을 때부터 스스럼없이 대하더군.”
율리안의 지적에 레베카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를 처음 봤을 때 전혀 낯설지가 않았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평소에도 동물을 좋아했으니 레베카는 레오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율리안의 말대로 그는 신의 사자였다.
그런데도 그를 보자마자 경외감보다는 친밀감이 먼저 들었다.
이전 생에서 레오를 만난 적도 없었다.
레베카는 그리 신실한 신도가 아니었고, 신전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한 적도 거의 없었다.
‘이것도 빛의 장미가 알고 있으려나…….’
데프리아 여신과 관련된 설화에 빛의 장미가 등장한 걸 보면 그들은 신전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신전이 연루되어 있다면 높은 확률로 요하네스 공작가에 대한 비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레베카는 골똘히 고민에 빠진 율리안을 바라봤다.
오늘은 유스타프와 암시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율리안이 알게 된다면 따라서 오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다. 그의 저주에 대해 물어야 하는 일에 그를 동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레베카는 빙그레 웃으며 황금색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유혹하듯 그의 허리에 슬쩍 손을 둘렀다. 율리안의 허리가 뻣뻣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 오늘 밤에 한잔하면서 내 신성력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해볼까?”
“아깐 술주정뱅이라고 하더니.”
“부부끼리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모처럼 좋은 술을 선물받았는데 말이야.”
레베카의 아찔한 미소에 율리안의 콧김이 세졌다.
“응?”
레베카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율리안의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그는 제 허리를 잡은 레베카의 팔목을 잡았다.
주변에는 카림의 선물을 정리하는 고용인들이 많았다.
율리안은 슬쩍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빠르게 레베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가 떼었다.
“좋아.”
율리안이 지나가는 하인 한 명을 붙잡고 손가락을 여러 번 튕겼다.
“거기. 이 와인을 침실에 놔두도록 해.”
하인은 엉거주춤하게 껴안은 공작 내외를 발견하곤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율리안이 내민 와인 병을 낚아채듯 품에 안고는 바쁘게 자리를 떴다.
레베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침실? 식당이 아니고?”
“부부끼리 한잔하는 거라면 침실이 아주 적당하지.”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네가 원하는 거.”
율리안은 그녀를 껴안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예쁜 그의 웃음에 레베카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렸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의 턱이 평소보다 더 잘생겨 보였다.
분명 유혹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끝에 말려드는 것 또한 자신이었다.
레베카는 타고난 유혹꾼인 남편의 얼굴을 마음껏 감상하며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늦은 밤, 적막이 흐르는 데본셔 저택 앞에 자그마한 마차가 섰다.
“내려라.”
마차 안에서 등을 떠밀린 사내가 흙바닥 위에 철퍼덕 고꾸라졌다.
“읍읍!”
눈을 가리고 손을 포박당한 사내의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허튼짓할 생각 마. 그분들께서 주신 시간은 말 그대로 유예의 시간이니.”
마차 안에서 냉기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자.”
차가운 목소리에 마차의 문이 닫히더니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사내가 온 힘을 다해 포박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제플린?”
베이츠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서 내린 알리시아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내려다봤다.
“읍! 읍! 읍!”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제플린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알리시아는 얼른 아서를 베이츠의 품에 안겨주고는 제플린에게 달려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알리시아가 제플린의 포박을 풀었다.
제플린은 거칠게 눈가리개와 재갈을 쥐어뜯었다.
“빌어먹을. 좀 곱게 놔줄 것이지.”
그는 진절머리를 내며 제 몸에 붙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전에 없던 그의 꾀죄죄한 모습에 알리시아의 눈빛이 묘해졌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니 그렇게 잘생겨 보이진 않네…….’
그의 잘생김은 청결에서 나왔던 걸까.
알리시아가 그를 요목조목 뜯어보고 있는 찰나, 제플린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베이츠! 이 개자식아!”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베이츠의 멱살을 잡았다.
알리시아가 그에게서 얼른 아서를 받아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 편지들이 왜 내 책상 서랍에 있는 거지? 너, 혹시 율리안에게 돈이라도 받은 거야?”
베이츠가 무감한 얼굴로 제플린의 손을 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이건 옥타비오의 짓입니다.”
“지하 감옥에 얌전히 있을 그 새끼 이름이 왜 나와.”
“신의 기사단이 들이닥친 날에 그는 지하 감옥을 탈출했습니다.”
“뭐? 그게 말이 돼? 무슨 수로?”
“예전부터 수완 하나는 기막히게 좋은 자였지 않습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옥타비오…… 끝까지 내 발목을 잡다니.”
이를 부득 갈며 머리를 쓸어올리던 제플린이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베이츠와 그녀를 번갈아 봤다.
“그런데…… 이 야밤에 둘이서 어딜 갔다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