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베이츠는 대답 대신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는 그와 잠시 눈빛을 주고받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뭘 어딜 갔다 와요. 당신 찾으러 다녔지요. 신의 기사단에 잡혀간 것도 청천벽력이었는데 그 와중에 사라지기까지 했다니,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그렇다고 아서까지 데리고 다녔단 말이야?”
그의 예리한 지적에 알리시아는 짐을 오두막에 두고 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알리시아는 짐짓 모른 체하며 제플린의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아서를 향한 제 유별난 애정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베이츠, 얼른 백작님을 모시세요.”
알리시아의 눈짓에 제플린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던 베이츠가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던 제플린이 휘청거렸다.
“윽……. 젠장. 발을 삔 모양이군.”
베이츠가 얼른 그의 팔을 제 목에 감쌌다.
제플린이 그의 감정 없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의심해서 미안하군. 베이츠.”
“아닙니다. 상황이 오해하기 좋았을 뿐입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습니다.”
제플린은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래도 베이츠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데본셔 저택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엔 복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율리안 요하네스……. 너를 어떻게 죽여버릴까.’
알리시아가 두 사람을 묵묵히 뒤따라갔다.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깨어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서를 향했다.
알리시아는 아서의 푸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 * *
목욕을 마친 레베카는 시계를 흘깃 바라봤다. 유스타프와 약속한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레베카의 계획은 최대한 빠르게 율리안을 재우는 것이었다. 와인을 함께 마시자고 제안한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의 야살스런 눈빛을 떠올리고 나니 과연 자신이 제정신으로 술 취한 그를 재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데스라치노를 떠올리는 거야. 그러면 그가 맨살로 부딪혀 와도 자제할 수 있겠지.’
그녀는 신전에서 자신을 훑어내리던 교황의 눈빛을 상기했다. 소름이 우수수 온몸에 돋아났다.
천년의 욕정도 식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마치 카디르교의 수녀처럼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플린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레베카는 속에서 일렁이는 분노를 잠재우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왔어?”
하지만 레베카의 다짐은 율리안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가운을 풀어 헤친 율리안이 볼이 발그레해진 상태로 그녀를 맞았다.
훅 풍겨오는 달짝지근한 와인향에 레베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 잔이 들려 있는 걸 보니 자신이 오기 전에 먼저 마신 모양이었다.
“왜 벌써 시작했어.”
“아. 혹시 맛이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당신에겐 항상 맛있는 것만 주고 싶거든.”
율리안이 와인 방울이 묻은 입술을 핥았다. 체리 빛의 붉은 입매를 레베카가 멍하니 바라봤다.
‘맛있는 거…….’
온갖 상상이 떠올랐지만 레베카는 손을 내저으며 상상의 나래를 지워버렸다.
“오늘따라 더 예뻐 보여.”
“뭐?”
멍하니 서 있는 레베카를 향해 율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는 잽싸게 그녀의 몸을 잡고는 자신의 무릎 사이에 넣었다.
율리안이 레베카의 허리를 꼭 안고서 잠옷 허리춤에 묶어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레베카…… 나는 짐승이야. 널 보면 아주 못된 상상을 하곤 해.”
그건 나도 그렇다고 레베카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의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본 레베카는 기도문을 외웠다.
레베카는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니, 뭘 했다고 벌써?’
이건 어딘가 잘못됐다.
레베카는 허둥지둥 와인잔을 들었다. 반쯤 남은 와인이 출렁거렸다.
“이런 나도 괜찮아? 싫지 않아?”
율리안은 끈질기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가 그녀의 명치 부근에 머리를 가져다댔다.
레베카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집요한 스킨십을 피하며 와인을 한입 마셔보았다.
“이, 이건…….”
부부관계를 도와준다는 아릿한 약초향이 물씬 풍겨왔다.
제플린과 잠자리를 하기 전 언제나 이 약초를 넣은 차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알싸한 이 맛을 이전 생에 질리도록 먹었기에 레베카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쩐지 신나게 선물을 보여주던 카림이 이 와인을 설명할 때만큼은 별말을 하지 않더라니…….
그는 와인을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의미심장하게 들어 올리는 걸로 모든 설명을 끝냈다.
‘그땐 맛있다는 의미인 줄 알았지.’
레베카는 이마를 짚었다. 제 불찰이었다.
이런 변수쯤은 예상했어야 했다. 술만 먹고 그가 곯아떨어질 거라 생각하다니 너무 안일했다.
“레베카, 대답해줘.”
율리안이 다시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 율리안, 잠깐만. 우리 앉아서 대화하자. 앉아서.”
“싫은데?”
아무래도 그를 잡고 있던 고삐가 풀려버린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씨익 웃으며 그녀를 번쩍 들었다.
“꺄악! 무슨 짓이야!”
그는 호기롭게 그녀를 든 것과 다르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레베카를 눕혔다. 그러곤 가운을 스르르 벗곤 그녀의 위에 올라타며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내가 싫어……?”
레베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싫다고 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녀의 눈에는 율리안의 거대한 구릿빛 흉부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싫지 않나 보네. 그럼 이런 건?”
율리안이 몸을 숙여 레베카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에 델 것만 같았다.
아랫배가 꽉 조여드는 느낌에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율리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어때?”
레베카가 이젠 정말 밀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두툼한 살덩이가 훅하고 들어왔다.
정신없이 입안을 탐색하는 그의 녹진한 입맞춤에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그는 집요하게 레베카를 몰아붙였다.
그녀가 도망가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어깨에 손톱을 세워서야 그의 기나긴 키스는 끝이 났다.
율리안은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아쉬운 듯 입을 뻐금거리는 레베카의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레베카의 뺨이며 목에 얕게 입맞춤을 퍼부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말이야.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의 뜨거운 숨결에 레베카의 눈이 커졌다.
율리안이 야살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가르쳐줘, 레베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당신이 잘 알잖아. 날 좀 가르쳐줘.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지?”
율리안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팔뚝이 얼굴의 양옆을 짚고 있었다.
레베카는 달뜬 그의 얼굴과 꿈틀거리는 힘줄을 곁눈질했다.
은은한 난롯불에 그의 조각 같은 상체가 빛이 났다.
그의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는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을 갈망하고 있었다.
쐐기를 박듯 율리안이 한 번 더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가르쳐 줘, 레베카.”
레베카의 이성의 끈이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분명 아까 마신 한 모금의 와인 때문일 것이라 레베카는 변명했다.
그녀가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자 율리안이 움찔하며 당황스럽게 눈을 굴렸다.
레베카는 허벅지에 힘을 주곤 옆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율리안이 휘청거리더니 레베카가 누워 있던 곳으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레베카의 푸른 눈이 불타는 것 같았다.
꽁꽁 감춰두고 있던 그녀의 본능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허리 위에 앉아서 레베카는 그의 단단한 복근을 손으로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윽…… 레베카 잠시…….”
레베카는 멈추지 않고 손을 점점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기억해. 시작한 건 당신이야.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레베카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난 아주 엄격한 선생이거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당황하던 율리안의 얼굴 위로 환희가 차올랐다.
곧이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겹쳐졌다.
* * *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레베카는 눈을 번쩍 떴다.
“으음…… 레베카.”
귓가에 울리는 몽롱한 목소리에 레베카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하지만 잠꼬대인 듯 율리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제 몸을 휘감고 있는 율리안의 팔을 조심스럽게 푼 레베카가 그가 뒤척이는 걸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잠에서 깨지 않고 등을 돌려 누웠다.
레베카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이불을 빠져나오자 새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새벽이라 방 안에 한기가 돌았다.
레베카는 팔을 연신 문지르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잠옷을 들었다.
율리안이 옷을 찢듯이 하는 바람에 새로 산 잠옷이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일단 추위가 급선무였기에 레베카는 잠옷을 걸쳤다.
“아!”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지끈거리고 아래가 쓰라렸다.
절로 악소리가 나는 상황에 인상이 찌푸렸다. 레베카가 어기적거리며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서 멍하니 자신의 꼴을 바라봤다. 목이며 팔이며 여기저기에 울긋불긋 붉은 자국이 피어 있었다.
마치 꽃물이 든 것 같아 슬며시 자국을 문질러봤다.
“하아…….”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뒤처리는 확실히 했기에 후계자가 생긴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만 다음 날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가 문제였다.
‘이제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날 것 같아.’
율리안은 정말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많은 남자를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레베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다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확실히 좋았다는 것이었다. 당분간 복수나 계략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와 침대에 틀어박혀 있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만 생각하자…….”
레베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율리안의 우직한 품으로 다시 기어들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른 그녀는 잠옷 위에 대충 가운을 걸쳐 입고 침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적막과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얼른 드레스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