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벌써 나오셨습니까?”
레베카가 준비를 다 끝내고 목에 난 자국을 파우더로 가리고 있을 때, 칸나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드레스룸에 들어왔다.
“제가 도우려고 했는데…….”
“괜찮아. 잠이 안 와서 말이지. 그나저나 당분간 큰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너를 불러버렸구나.”
“괜찮습니다. 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곳에 가시는 데 당연히 제가 동행해야지요. 여기, 말씀하신 가면입니다.”
레베카는 칸나가 내민 가면을 받아들고 얼굴에 썼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검은색 가면에 후드까지 쓰자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암시장에는 딱 맞는 차림새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모습을 점검한 레베카가 비장하게 드레스룸을 나섰다.
* * *
유스타프는 약속한 장소에 미리 나와 있었다.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그의 옆에는 건장한 남자가 삐딱하게 서서 연초를 피워대고 있었다.
“타라.”
남자의 불손한 태도에 칸나의 입매가 비틀어지는 게 보였다.
레베카는 짐짓 칸나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착할 때까지 안대는 벗지 말고.”
레베카는 순순히 안대를 썼다. 험한 산길을 지나는지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남자가 내려준 곳은 거대한 동굴 앞이었다.
유스타프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앞장서서 걸었다.
“절 따라오십시오!”
새벽녘의 암시장은 활기찼다.
레베카는 여기저기서 파는 희귀한 물건들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암시장은 상상한 것만큼 은밀하거나 어두운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파는 물건들은 그녀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불법 연금술 제품을 파는 곳은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다.
마물의 커다란 사체를 테이블 위에 널어놓은 곳도 있었고, 진귀한 생물들을 새장 안에 가두어 둔 곳도 있었다.
레베카의 시선이 어느 커다란 감옥에 맞닿았다. 충격에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신비로운 연보랏빛 머리칼과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와 남자들이 감옥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몇백 년이 지났건만 이곳에는 여전히 악습이 남아 있었다.
레베카는 연보라색 머리에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칸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악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경 쓰이신다면 구해낼까요?”
칸나는 정말로 그렇게 할 것처럼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
레베카는 슬픈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일단 가자꾸나. 소란을 피워선 곤란해.”
“알겠습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암시장엔 인파가 더 늘어났다.
어디서 단체로 물건이라도 사러 온 듯 가면을 쓴 무리가 우르르 레베카 일행의 앞을 지나갔다.
“레베카 님, 조심하십시오.”
칸나가 레베카의 앞에 손을 뻗으며 인파들 사이에서 그녀를 보호했다.
순간 레베카는 심장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허리를 굽혔다.
“어, 어! 거기 조심해!”
그때 위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가판대가 레베카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차 있었기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레베카 님!”
칸나가 서둘러 잔해를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칸나와 유스타프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큰일 났다!”
* * *
가판대가 무너졌을 때, 누군가가 레베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레베카는 그게 칸나인 줄 알고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곧 제 손목을 쥔 손이 칸나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목을 뿌리쳤다.
“당신. 누구야.”
가만 보니 신장도 그녀보다 컸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서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레베카를 잠시 응시하더니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레베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옥타비오?”
“오랜만입니다. 일단 구석으로 가시죠.”
옥타비오가 다시 가면을 고쳐 쓰며 말했다.
레베카는 옥타비오의 뒤를 따라 인파가 적은 곳으로 향했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신중히 살핀 다음 카드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레베카>
흰 종이 위에 간결하게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베카가 영문을 모른 채 그를 올려다봤다.
“일전에 감옥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옥타비오의 담백한 감사 인사에 레베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는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베이츠가 보내겠다는 선물은 바로 그였다.
레베카는 곧바로 낯빛을 정리했다.
“아닙니다. 다 당신을 쓸 데가 있어 그리한 것이니 거래라고 생각하십시오. 한데 제가 여기에 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사냥개 따위가 없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합니다. 이런 제 능력을 높이 샀기에 절 구해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요.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군요. 한때 서로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었던 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이렇게 만나다니.”
“제 목적이 뭔지 벌써 아신단 말씀입니까?”
“제플린 데본셔에 대한 복수. 저와 같은 꿈을 꾸시고 계신 게 아닙니까?”
옥타비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꽤 고생을 했는지 그의 볼이 움푹 패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웃음이 평소보다 더 음습해 보였다.
“당신을 바보 천치라고 생각했던 내가 멍청이였군. 실상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아주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저를 원망합니까?”
“당신이 싫은 건 여전합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이리 된 이상 당신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죠.”
“좋네요. 당신이 날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더라면 이대로 당신을 돌려보내려고 했어요.”
“제가 뭘 도우면 됩니까.”
레베카는 그의 예리한 눈초리를 바라보며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운이 좋을 줄이야.’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빛의 장미에 대해 알려주세요.”
옥타비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아느냐는 눈짓이었다.
“제가 데본셔가에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그것도 모르겠습니까? 허튼수작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빛의 장미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복수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아시는 겁니까.”
“글쎄요. 데본셔가가 아주 오래 전부터 수상한 단체에게 거액의 돈을 계속 받아왔다는 것 정도?”
옥타비오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그는 얼마큼 정보를 풀지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만 알려드리도록 하죠.”
“뭐. 당신이 아주 협조적인 파트너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으니 말씀해보세요.”
“빛의 장미는…… 데프리아교가 국교로 창시될 때부터 존재한 장로회입니다.”
“데프리아교 장로회요? 그런 집단이 어떻게 황제파인 데본셔가와 유착이 있을 수가 있어요?”
“데본셔가 황제파가 된 건 자킴 데본셔 백작 때부터입니다. 그 이전엔 중도파였죠. 어찌 됐든 데본셔가는 빛의 장미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매달 거액을 돈을 받아낸 겁니다.”
“비밀이란 게 뭔지 말해 줄 건가요?”
레베카가 한층 떠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또다시 가슴 통증이 찾아왔다. 발이 땅 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레베카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지.’
그녀는 불안하게 가슴 부근을 손으로 짚었다.
그 탓에 레베카는 그와 동시에 옥타비오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잠시 돌았다가 사라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 여자의 눈빛이 이렇게 매서웠던가…….’
레베카의 두 눈을 바라보자 옥타비오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빛의 장미는 그를 버렸다. 그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제플린의 대체재로 자신을 남겨두긴 했으나 자신을 언제 부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빛의 장미의 신임을 다시 얻는다고 해도 한번 버려진 이상 또 언제 내팽개쳐질지 알 수 없었다.
‘난 아무에게도 조종당하지 않겠어.’
옥타비오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전에 약조 하나만 해주십시오.”
“말씀하세요.”
“제플린을 몰아내고 나면 제게 그 데본셔 백작의 자리를 주셔야겠습니다.”
“당신은 일개 하인이었을 뿐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파비올라가 제 수중에 있습니다. 알리시아를 내쫓고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제가 그 집안을 삼킬 수 있겠죠.”
그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대체 그 하찮은 자리를 왜들 이렇게 탐내는지 레베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데본셔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니까. 당신이나 가지세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을 믿고 빛의 장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옥타비오는 지혜의 불꽃에 얽힌 이야기부터, 인질들이 갇힌 화산섬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가 자킴을 죽였다는 이야기 같은 건 쏙 빼놓은 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베카에겐 큰 수확이었다.
“레베카 님!”
그 순간 멀리서 레베카를 애타게 부르는 칸나와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제 일행들이 절 애타게 찾고 있어요. 그럼 우리의 만남은 이쯤에서 끝내는 걸로 하죠.”
“보상은 언제쯤 받을 수 있습니까?”
“인질들을 완전히 구해낸 다음에요. 듣자하니 제플린이 도망쳤다더군요.”
“아마 빛의 장미의 짓일 겁니다. 그들이 뒤에 있는 이상 일은 계속 꼬일 거고요.”
“하지만 그들도 제플린이 필요 없어지면 버릴 거잖아요? 당신에게 했던 것처럼요.”
아픈 곳을 찌른 듯 옥타비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난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하죠.”
“저도 그런 걸 바라진 않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만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말을 마친 레베카는 골목으로 서둘러 나갔다.
옥타비오는 멍하니 칸나의 등을 두드리는 레베카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