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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84화 (184/232)

184.

“정말 십년감수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사라지시면 어떡합니까!”

“미안해요.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잠시 길을 잃었어요.”

레베카는 유스타프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머릿속에 옥타비오가 했던 말들이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인파를 뚫고 유스타프를 따라가기를 한참, 그는 어느 작은 상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고르! 접니다.”

유스타프의 부름에 상점 뒤쪽에 있는 커다란 천막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아. 맥핀 씨군요. 요새 신수가 훤해졌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것 같네요.”

이고르가 서글하게 웃으며 유스타프를 반겼다.

레베카는 그의 한쪽 안대에 그려진 장미 문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잎 모양부터 줄기까지 확실히 종이에 있던 그 문양과 완전히 똑같았다.

유스타프는 그와 잘 아는 사이인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 얼굴이 빛이 나지 않습니까?”

“그 자화자찬도 여전하시군요. 그래서 오늘은 뭐가 필요해서 왔습니까?”

“제가 필요한 건 아니고…….”

유스타프가 슬쩍 레베카와 칸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숙녀분께서 필요한 게 있으시답니다.”

“오. 뭘 원하십니까. 사랑의 묘약? 아니면 머리색이나 눈 색을 바꾸는 물약? 한 번에 살을 빼는 약도 있습니다만 숙녀분들께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불쾌한 농담에 유스타프가 기겁을 하며 레베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레베카는 개의치 않고 품에서 금화 자루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턱하니 올려두었다.

“정보를 사러 왔네.”

자루의 무게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던 이고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선 정보를 취급하지 않아서요. 저기 카이루 형제들에게 찾아가면 잘 해줄 겁니다.”

“아니. 난 당신에게 정보를 사야겠어.”

레베카는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빛의 장미가 그려진 페이지를 그대로 베낀 종이였다.

“빛의 장미. 분명히 당신과 관련이 있을 텐데?”

이고르는 빛의 장미 그림과 레베카를 천천히 번갈아 봤다.

그는 연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발 알고 있어라.’

사실 레베카는 그가 빛의 장미에 대해 아는지 그리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직감 하나뿐이었다.

이고르가 빛의 장미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어쩐지 그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회귀한 이후로 계속해서 자신을 도와주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고르가 그림에서 손을 뗐다.

이고르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는 순간 레베카는 가슴 부근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야.’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동시에 이고르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쩍였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 레베카는 확실히 목격했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통증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이고르가 흔쾌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닐 것 같군요. 따라오시지요.”

레베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칸나와 유스타프가 동행하려고 하자 이고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아니요. 여기 계신 귀부인만 모시겠습니다. 민감한 사안이라서요.”

귀부인이란 말에 레베카는 흠칫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벌써 유추한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칸나가 항의하고 나섰지만 레베카가 그녀를 애써 안심시켰다.

레베카가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칸나. 나 열심히 단련한 거 알지?”

“하지만…….”

“혹여 이상한 낌새가 있거든 바로 소리를 지를게. 그때 달려와 줘.”

“알겠습니다.”

칸나는 마지못해 레베카의 말에 따랐다. 유스타프가 슬쩍 레베카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부인, 조심하십시오. 이고르가 이 암시장의 실세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레베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경고에 레베카는 허벅지에 차고 있는 총을 손으로 슬쩍 확인했다.

율리안에게 받은 뒤로는 거의 한 몸처럼 어딜 가나 총을 차고 있었다.

‘여차하면 쏴버리지, 뭐.’

레베카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외양보다 훨씬 넓은 천막 공간에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연금술인가…….’

“커피? 아니면 차?”

이고르가 넉살 좋게 찻잔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레베카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생각 없어요.”

“오, 갑자기 왜 존대를 하고 그러십니까. 레베카 오벨리아 공작 부인?”

“역시, 제 정체를 알고 계셨군요.”

“빛의 장미를 언급하실 거였다면 이 정도는 예상하고 오셨을 테죠. 좋습니다. 원하시는 정보가 뭡니까?”

이고르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손수 탄 홍차의 향을 음미하는 데 정신이 팔린 척했지만 실은 레베카를 세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군.’

실상 가진 게 없을 땐 많은 패를 가진 척해야 얻는 게 많았다.

레베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제플린 데본셔에게서 손을 떼세요.”

레베카가 아는 건 그가 데본셔 가문과 관련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말에 여유롭게 굴던 이고르가 어깨를 굳히는 게 보였다.

레베카는 이고르의 숨결의 변화마저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그를 관찰했다. 아마 그는 많은 걸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그의 생체적 반응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는 걸 택했다.

“이거……. 정보를 사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보를 사러 왔지요. 당신의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 말입니다. 당신 같은 말단은 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걸 어쩌지요. 그 정보는 팔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녀의 말에 이고르가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다.

‘긴장을 풀었어? 왜지?’

레베카가 자신의 말을 곱씹는 동안 이고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부인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저 같은 말단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레베카는 능글맞게 접혀 드는 그의 한쪽 눈을 찬찬히 관찰했다.

처음에는 그가 당연히 중간책일 거라 생각했다. 이런 험한 일은 본디 높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마치 그가 한 일처럼 제플린의 일을 들먹였을 때, 묘하게 긴장되던 몸과 말단이란 말에 풀어지던 어깨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중간책 따위가 아니구나.’

그가 아랫사람이었다면 ‘빛의 장미’에 대해 물었을 때 분명히 모른다고 잡아떼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건 ‘빛의 장미’에 대한 정보를 얼마큼 흘릴 수 있을지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는 높은 확률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또다시 가슴 부근에 찌릿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지만 일단은 눈앞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레베카는 눈매를 조금 누그러뜨리고서 말했다.

“좋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요하네스 공작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요하네스 공작가라면 데프리아 여신님께 축복을 받은 가문이지요.”

“그런 당신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 말고 진실을 말씀하시지요.”

이고르가 움찔하며 입을 가져가려던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을 멈추었다.

“우리가 만들었다……?”

“실은 저주받았잖아요. 요하네스 공작가는. 그걸 숨기고 데프리아교의 상징으로 철저하게 이용했죠. 제 말이 틀렸나요?”

이고르가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더는 웃지 않았다.

“율리안이 다 불었나 보군. 역시 그는 요하네스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릇이 아니었어.”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시는군요. 서론이 참 길었네요.”

“그래서 우리 공작 부인께선 그 사실로 무엇을 하려고 이리 나를 찾아오셨나? 데본셔 백작에게 복수를 할 거면 그것만 얌전히 하면 되지,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요?”

“당신이 내 복수를 방해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원하는 것만 얻고 나면 우린 결국 그를 버릴 예정이니까. 그는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어린애 같거든.”

“그렇군요. 아주 잔인한 사람들이네요.”

이고르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제 안대에 그려진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베카, 빛의 장미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글쎄요. 관련된 설화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래. 이 빛의 장미는 희생의 대가로 여신께서 딸을 바친 농부에게 준 것이야.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지. 우리가 잔인하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는 거야.”

“물론 그 희생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피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요?”

“아주 똑똑해. 이렇게 똑똑한 줄 알았더라면 율리안과 결혼하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게요. 그렇다면 당신이 나에게 협박을 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율리안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줘요. 그렇지 않으면 지혜의 불꽃에 대해 모두에게 알리겠어요.”

이쯤 되니 이고르는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비밀이었다.

그런데 대체 다들 어디서 알고 왔는지 개나 소나 짖어대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제플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였다.

이고르는 차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음산하게 읊조렸다.

“귀부인께선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걸 후회하게 되실 거야. 이제 살아선 여기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그가 휘파람을 불려고 손을 드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은색 총구가 그를 향해 날이 선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당신네 수하들이 날 잡는 것보다 당신 머리에 구멍이 나는 게 먼저일 것 같으니까.”

이고르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총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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