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85화 (185/232)

185.

“예쁜 총이군. 보아하니 총을 쏴 본 적도 없어 보이는데. 그런 장식품으로 위협해봤자 안 통해.”

“이런. 정보력이 아주 좋은 것처럼 굴더니 이제 보니 순 허풍이었나 봐? 내가 공작가로 간 뒤로 사격술을 아주 많이 연습한 건 모르시나 보군. 어디 한번 시험해봐?”

“그런 수작에 안 넘어가!”

이고르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주에 대해 알아내기는 글렀군.’

레베카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마법 총은 일반 총보다 총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칸나의 기민한 청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칸나가 순식간에 천막 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슨 일입니까! 총소리가…….”

“아, 칸나. 이걸 좀 옮겨 줘야 할 것 같아.”

레베카는 난감하게 웃으며 커다란 자루를 가리켰다.

“사람을 기절시켰거든.”

칸나가 멍하니 레베카를 응시하다 얼른 자루를 둘러멨다. 천막 밖으로 나가자 유스타프가 기겁을 한 채 둘을 바라봤다.

“뭐, 뭡니까. 이고르 씨는 어디 계시고, 그 자루는 또 뭐고요?”

“거래 성사가 잘 안 됐거든요. 일단 여기서 도망가죠.”

“예?”

유스타프가 뒤를 돌아봤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챈 상인 몇몇이 천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히익…….”

유스타프는 얼른 칸나 옆에 붙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대기하고 있던 마부들이 일제히 세 사람을 바라봤다. 레베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유스타프에게 물었다.

“이고르가 여기 실세라고 했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지금껏 제가 본 바로는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마부들도 다 그의 사람이겠네요. 칸나! 부탁해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칸나는 이고르가 든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우두둑 소리 나게 풀었다. 그러더니 건장한 마부 한 명을 때려눕혔다.

주변에 있던 마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너희들 뭐야!”

“기절한 겁니다. 동료를 잘 보살펴주세요. 이건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칸나는 곧장 마차에 자루를 싣고 말의 고삐를 잡았다. 레베카도 얼른 마부석에 올라탔다.

유스타프가 덜덜 떨며 객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길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레베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오는 길에 다 외웠으니까!”

“레베카 님, 방향만 말씀해주십시오.”

“알았어. 일단은 직진이야.”

레베카의 말에 칸나가 고삐를 쥐고 내리쳤다. 그 탓에 유스타프는 마차 안에서 나뒹굴었다.

그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조, 조금만 천천히 몰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레베카가 마차 안과 연결과 창문 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렇지. 유스타프 씨, 당분간은 연구실에서만 지내도록 하세요. 경비 인력을 몇 배로 늘려드릴게요.”

“예……?”

“사실 이고르를 납치했거든요.”

짓궂게 웃는 레베카의 미소에 유스타프는 그만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목욕을 마친 제플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서재로 향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밀린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의 일을 대신 처리해줄 옥타비오가 없으니 백작가의 일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옥타비오가 그리워질 정도군…….’

그는 질린다는 듯 거대한 서류 더미를 노려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빛의 장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끈질기게 헤집어 놨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제플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다니 아주 실망이야. 데본셔 백작.’

‘일이 조금 틀어졌을 뿐입니다. 시간만 조금 더 주시면…….’

‘이미 당신에겐 충분한 시간을 준 것 같은데. 지혜의 불꽃은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그리고 당신이 한 짓은 요하네스 공작에게 힘을 실어준 것밖에 되지 않았어.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지?’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할 시간이 있었다고 여기십니까?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지혜의 불꽃을 죽일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절 이단 심판에 끌려가지 않게 하겠다는 약조를 해주신다면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이 상황에도 거래를 제안하다니 여러모로 자넨 정말 대단하군.’

‘어쩌시겠습니까?’

‘좋다. 유예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지혜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면 당신은 원래대로 처형을 받아야 할 거야.’

회상을 끝낸 제플린이 눈을 떴다.

사실 그는 지혜의 불꽃을 죽일 방법을 몰랐다. 잠시라도 시간을 벌고자 던진 공수표였다.

제플린은 초조하게 책상을 두들겼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빛의 장미의 힘이 필요했다.

그는 서류 더미를 대충 훑어봤다. 대부분이 채무 변제를 요청하는 독촉장이었다.

연금술탑의 일이 잘될 거라 믿고 지나치게 공사를 벌인 탓이었다.

거기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핵심 사업들의 성장률이 연신 마이너스였다.

연금술탑 일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빛의 장미는 분명 자금줄을 끊을 게 분명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개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파산이야.”

천하의 데본셔 백작이 돈에 절절매고 있다니 통탄스러웠다.

이게 다 그 율리안 요하네스 때문이었다. 독촉장 중에는 그가 보낸 것도 여럿 있었다.

“빌어먹을…….”

제플린은 이를 아득 갈면서 머리를 팽팽하게 굴렸다.

문득 그가 최근에 가장 돈을 많이 투자한 인물이 떠올랐다.

원두 상인 아돌프.

“그래. 원두 사업이 있었어! 원두 사업만 잘 되면 회복할 수 있어. 그리고 지혜의 불꽃을 죽인 다음 빛의 장미에게 받은 돈으로 급한 일을 처리하는 거야.”

곧 그의 머릿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던 희망 회로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망할 리가 없지. 난 원래 잘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야.”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니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제플린은 대충 급한 서류에 사인을 하곤 비척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정갈한 침실이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졌다.

* * *

“으아아악! 베이츠! 베이츠!”

한밤중에 제플린의 침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츠가 헐레벌떡 그의 침실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율리안…… 율리안 그 자식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

그는 벌벌 떨며 이불을 감싸 쥐었다. 지금 제플린은 다정하게 그를 다독여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베이츠는 옥타비오가 아니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칼을 들어 보였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베이츠는 그가 제플린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했던 모양인지 제플린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 자식을 당장 죽여서 내 앞으로 대령해. 그렇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그의 광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이럴 때면 옥타비오는 향초를 피워서 그를 잠재우곤 했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이제 저택에 없었다. 그가 만든 향초 또한 폐기한 지 오래였다.

베이츠가 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있을 때 알리시아가 침실로 들어왔다.

“제 남편은 제가 보살피지요.”

그녀는 베이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곁을 스쳐지나갔다.

베이츠는 알리시아가 부드럽게 제플린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걸 팽팽하게 경직된 채로 눈에 담았다.

“쉬이…… 제플린, 그건 꿈이에요. 현실이 아니라고요.”

알리시아는 제플린을 달래면서 베이츠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꼭 불을 끌어안는 불나방 같아 보였다.

베이츠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밖으로 나갔다.

“율리안 그 새끼가 내 레베카를 데려갔어……. 그녀를 가둬두고…….”

“다 꿈이에요. 제플린.”

알리시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제플린을 품에 안은 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현실을 살아야 할 때가 아닌가요. 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줘요.”

그 말에 제플린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는 알리시아를 밀쳐내더니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결국 너도 그게 목적이었겠지. 꿈도 꾸지 마. 그 자린 레베카와 내 아이의 자리야.”

알리시아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답인 듯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죠. 하지만 당신은 내게 협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걸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제플린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졌다.

알리시아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레베카에게 선물을 주려고 공작 성에 갔을 때 들어버렸어요. 요하네스 공작의 비밀을요.”

제플린이 눈을 희번뜩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내가 그 자식에게 얼마나…….”

“제가 말하면 얻는 게 뭔데요?”

“뭐……?”

“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했어요!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었어요! 아들까지 낳았는데도 당신은 레베카밖에 모르잖아요!”

“그거야 당신이 레베카가 아니니까.”

“대체 그깟 그림이 뭐라고……!”

“그깟 그림?”

제플린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알리시아의 어깨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가녀린 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컥……. 제, 제플린! 그, 그만!”

“그깟 그림이라니.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그건 내 인생이야. 내 왕궁이라고.”

알리시아가 그의 손을 세게 쳐댔다.

제플린은 손에서 슬며시 힘을 뺐다. 그러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그림 속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없지만 그 정도 차이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걸 원해? 알리시아? 이딴 가짜 금발 머리로 레베카 흉내를 내는 당신보다 그쪽이 좀 더 내게 이득일 것 같은데.”

그의 말뜻을 알아챈 알리시아가 벌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서를 떠올렸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알리시아는 눈을 부릅뜨고 제플린에게 소리쳤다.

“그래, 해봐요! 하지만 날 그곳에 가둔다면 당신은 영영 레베카를 되찾지 못하겠지. 아주 보기 좋게 거지꼴로 길거리에 나앉게 될 거야.”

“뭐야?”

알리시아가 주머니에서 펜과 네 번 정도 접은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종이를 주섬주섬 펴서 제플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사인해요. 여기에 사인하면 당신도 살고 나도 살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