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86화 (186/232)

186.

제플린은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려다봤다.

아서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서류였다.

훗날 다른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아서의 후계자 자격을 번복할 수 없다는 제약이 적혀 있었다.

제플린은 코웃음을 쳤다. 이딴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자신이 서명을 할 거라 생각했다니.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감이 가득했다. 종이를 잡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은 손톱만 한 돌파구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돌파구가 요하네스 공작의 발목을 잡을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후계자야 나중에 갈아치우면 될 일이지.’

알리시아는 법에 대해 잘 모른다. 저런 조잡한 계약서 따위는 언제든지 종이 쪼가리로 만들 수 있었다.

제플린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알리시아의 손에서 펜을 낚아채곤 거칠게 서류에 사인을 했다.

“됐지?”

알리시아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후계자 임명 서류를 재차 읽어봤다.

그녀는 제가 알고 있는 제플린의 서명과 서류의 서명이 똑같은지 유심히 확인했다.

제플린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확인할 필요 없어. 진짜 내 서명 맞아. 아서는 이제 데본셔 백작가의 후계자야. 사생아 따위가 아니라.”

알리시아는 기쁨에 겨운 눈을 들어올렸다. 순간 그녀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제플린의 머리가 금발 안개처럼 희뿌옇게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는데도 시야는 그대로였다.

덜컥 겁이 나서 눈을 여러 번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시력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알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플린이 성마르게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말해. 그래서 율리안 그 자식의 약점이 뭐라고?”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순간 출산에 임박한 자신을 구해내던 레베카가 떠올랐다.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자그마한 입을 달싹거렸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여신님의 저주를 받았어요.”

* * *

율리안은 고소한 냄새에 잠에서 깼다. 그는 습관적으로 옆을 더듬거리다가 레베카가 없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순간 흰색 커튼이 나부꼈다. 테라스의 문이 열려 있던 걸 의아해 하던 찰나 율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레베카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 청소하긴 이른 아침이라 테라스 바닥에는 져버린 단풍이 나뒹굴고 있었다.

넓게 흐트러진 단풍 무리는 꼭 붉은 카펫이 펼쳐진 것 같았다.

그는 황홀한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리안은 서둘러 가운을 걸쳐 입고 테라스로 나갔다.

“아, 일어났어?”

레베카의 담백한 인사에 저돌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율리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젯밤에…….’

곧이어 그의 얼굴이 붉은 낙엽과 같은 색이 되었다.

그는 쭈뼛쭈뼛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살색 전경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와 같은 신체적 반응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아 그는 찬물을 벌컥 들이마셨다.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레베카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마. 피임은 완벽했어.”

“푸흡!”

율리안이 그대로 바닥에 물을 뿜었다. 순간 고개를 돌려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에 뱉을 뻔했다.

“콜록…… 콜록…….”

레베카가 얼른 냅킨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저런. 급하게 마시면 어떻게 해. 괜찮아?”

“당신은 어떻게 그런 소릴 아무렇게나 해!”

“뭐가?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 아니었어? 당신은 후계자를 원치 않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할 말을 잃은 율리안은 원망스럽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발개진 그의 얼굴을 보고 허벅지를 연신 꼬집었다. 하필 그는 또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짓궂게 굴지 않으면 그녀는 벌써 이성을 잃고 그를 다시 침대로 끌고 갈 것 같았다.

‘넌 짐승이 아니야. 레베카. 짐승이 아니라고…….’

레베카는 이를 악 깨물고 묵묵히 팬케이크를 먹었다. 때문에 부끄러움은 온전히 율리안의 몫이었다.

‘내가 원하던 첫날밤의 아침은 이런 게 아니었어…….’

율리안은 냉정한 레베카의 얼굴을 흘겨봤다.

그는 유모의 소설책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에서는 남녀가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은 서로 가볍게 입맞춤을 주고받으며 더욱더 돈독해진 사랑을 서로 확인하곤 했다.

여차하면 다시 전날 밤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꼭 똑같은 상황을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약간의 로맨스는 가미된 아침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삐죽거리는 입술은 곧 레베카의 얼굴을 마주하자 쏙 들어가고 말았다.

“당신이 올 때까지 안 먹고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은 맛있는 걸 같이 먹는 걸 가장 좋아하잖아.”

레베카가 손수 오믈렛을 썰어서 율리안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자, 아 해.”

율리안은 넙죽 오믈렛을 받아먹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그는 레베카가 다른 조각을 더 썰기 전에 빠르게 자신의 접시 위에 있는 소시지를 썰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제 내가 먹여줄게.”

“싫어. 오늘은 내가 먹여줄 차례야. 난 아기 새가 아니라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걸. 당신 입을 오물거릴 때 얼마나 예쁜지 알아? 꼭 병아리 같아.”

“새머리 같다는 거야? 그거 욕이지?”

“그럴 리가.”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열기가 치솟았다. 그 덕에 둘은 추운지도 모르고 아침의 만찬을 즐겼다.

* * *

식사가 끝난 뒤 레베카와 율리안은 손을 마주 잡고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를 걷고 싶어?”

다정하게 물어오는 율리안의 말에 레베카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성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 후원으로 가고 싶어.”

“후원? 거긴 꽃밭이라 지금은 풀밖에 없을 건데?”

“그래도 가고 싶어.”

“뭐. 당신이 원한다면야.”

율리안은 씨익 웃고선 레베카의 손을 외투 사이로 넣었다.

“날이 차. 제법 겨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울 냄새? 그런 게 있어?”

“응. 자연이 겨울잠을 준비하는 특유의 냄새와 소리가 있어. 난 사실 겨울을 가장 좋아해. 특히 눈 오는 날은 세상이 다 조용해서 기분이 좋아.”

“하지만 이제 당신의 겨울이 조용해질 리는 없을 거야.”

“왜?”

“릴리가 있잖아. 그 강아지 같은 애가 눈이라도 오면 얼마나 좋아서 뛰어다니겠어. 하루 종일 놀아줘야 할걸.”

“푸핫. 듣다 보니 그렇군. 눈이 오는 날엔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둬야겠어. 릴리와 놀아야 하니까 말이야.”

겨울 놀이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다 보니 둘은 어느새 후원 끝자락을 걷고 있었다.

그곳엔 지하 감옥의 입구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그리고 공작 부인!”

“웬 경비가 서 있지?”

지하 감옥은 원래 텅 비어 있었다.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경비가 필요 없었다.

레베카는 두 명의 경비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율리안을 바라봤다.

“율리안, 나 고백할 게 있어.”

심각한 그녀의 표정에 율리안이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봤다.

“뭔데 그래?”

“먼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래?”

“당신 또 내가 화낼 만한 일을 벌였나 보군…….”

“결과만 봐줘. 결과만. 난 아주 멀쩡하게 살아 있고 상처 하나 없어.”

“설마…… 그 사이에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거야?”

율리안의 높은 콧날에 잔주름이 졌다. 그는 흉흉한 눈빛으로 레베카를 이리저리 돌아봤다.

그녀의 말대로 상처 하나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는 레베카를 놓아주었다.

레베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그의 눈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사실, 어젯밤 당신이 잠들었을 동안 암시장에 다녀왔어.”

“뭐? 왜 나한테 말하지 않고……!”

“쉬잇……. 화 안 내기로 했잖아.”

“그래. 어디 한번 변명해봐.”

율리안은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 같아 팔짱을 껴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빛의 장미에 대해 알아보려고 갔던 거야. 당신과 깊게 연관된 것 같아서 나 혼자 가는 게 훨씬 더 정보를 알기 쉽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거기서 옥타비오를 만나서…….”

레베카는 어젯밤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주에 관한 건 생략했다.

삐딱한 자세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율리안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래서 이고르를 잡아 왔어. 심문하려고.”

“레베카 오벨리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당신, 죽을 수도 있었어! 날 피 말려 죽일 셈이야?”

“하지만 멀쩡히 살았잖아. 전리품도 가져왔고.”

“정말이지 난 당신을…….”

율리안은 그녀를 꽁꽁 묶어 자신만 볼 수 있는 방에 가둬두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제 마음이 어떻든 그게 얼마나 레베카에겐 소름끼치는 말일지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레베카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저 자그마한 머리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그로선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좋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이건 별말 하지 않겠어. 대신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나와 함께해. 내가 없는 곳에서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알겠어?”

“유념할게.”

“지키겠다는 말로는 안 들리는데?”

“대충……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얼른 전리품을 구경해야지. 당신 가문을 아주 오랫동안 뒤에서 조종하던 흑막이 저기에 잡혀 있다고.”

레베카는 율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이고르를 납치한 시점에서 그녀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플린의 발목을 잡으려면 빛의 장미의 정보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이고르를 가둬 둘 장소까지 필요했으니 율리안에게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저주에 관한 사실은 혼자 따로 심문할 생각이었다.

이고르가 율리안에게 자신이 저주를 푸는 법을 물어봤다고 폭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대한 변명이 이미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끼익-

오래된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율리안은 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저곳에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샛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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