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감옥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곰팡내가 물씬 풍겼다. 손 한 뼘으로 가릴 만한 작은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율리안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차가운 돌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감옥 안에는 스산한 죽음의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조심해. 바닥이 미끄러워.”
뒤따라오는 레베카의 손을 율리안이 잡아끌었다.
“설마 요하네스 공작인가?”
율리안의 다정한 말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이고르가 안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꽉 잠긴 이고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율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그는 저 비열한 목소리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공작께서 직접 날 찾아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이고르는 감옥에 갇힌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레베카를 발견하곤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자네가 공작 부인에게 아주 푹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후계를 기대했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씨암탉을 들인 게 아니라 암사자를 들이셨더군.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을 무산시키는 거였는데 말이야.”
도가 지나친 그의 도발에 율리안이 쇠창살을 세게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흙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혀가 무척 자유분방하군.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은 지금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잊지 마. 언제든지 그 연약한 모가지를 똑하고 따버릴 수도 있어.”
그의 말에 이고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잘 들어, 애송아. 널 그 자리에 앉힌 게 바로 우리야. 네게 그 넘치는 힘을 준 게 바로 우리란 말이다. 밥 주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한 개 주제에 상황 파악을 논하다니.”
율리안은 당장이라도 이고르를 죽여버릴 기세로 쇠창살을 그러쥐었다.
레베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발에 넘어가지 마.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야.”
그리고 모든 걸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이고르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율리안을 공작 자리에 앉혔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이고르가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아, 우리 예쁜 부인께선 잘 모르시나? 그러고 보니 율리안 당신도 모르겠군. 다니엘에게 우리에 대한 걸 알리지 말라고 명령해뒀으니.”
“아버지에게 지시를 했다고……?”
“그래. 네게서 배신의 기운이 느껴졌거든. 우리의 정체를 알려주면 언젠가 내 목에 칼날을 들이밀 거라 생각했지. 지금 상황을 보니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던 것 같군.”
“그러니까 지금까지 당신들이 날 봐준 거다?”
“당연하지. 원래 후계자가 태어날 때까지 봐줄 생각이었어. 후계가 태어나서 레오 님과 영혼을 이으면 그때 제거하려고 했지. 하지만 더는 봐줄 수 없겠어.”
“네 손에 달린 게 수갑이란 걸 모르는 건가? 당신에겐 지금 그런 힘은 없어.”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 갇혀 있다는 걸 다른 빛의 장미들이 금방 알아낼 거거든. 이런 허름한 감옥 따위 탈출하면 그만이야.”
“그 전에 내가 이 자리에서 널 죽인다면?”
“그렇게 된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게 딸린 모든 식솔이 평생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걸 봐야 할 거다.”
이고르의 검은색 눈동자가 음습하게 빛났다.
율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고르가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그동안 요하네스 공작의 정적이 왜 하나도 없었는지 의심해 본 적 없나? 요하네스를 축복받은 가문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피를 봤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그런 우리가 작정하고 널 물어뜯는다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아?”
문득 율리안의 머릿속에 그에게 절절매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모습도.
‘보아라, 율리안. 저것이 바로 우리에게 칼을 겨눈 자의 말로다. 우린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지. 피로 물든 길이 마치 왕좌 앞에 깔린 붉은 융단 같지 않느냐. 저게 앞으로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의 아버지 다니엘 요하네스는 가문의 정적이 처형될 때마다 율리안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형장이 잘 보이는 건물의 창문 앞에 어린 율리안을 세워두고 잘려 나가는 머리를 보여줬다.
율리안은 그때를 똑똑하게 기억했다. 아버지가 기울이던 최상급 와인에서 피비린내가 나던 그 순간을.
그때나 지금이나 역겨운 기억이었다.
때문에 요하네스 공작이 된 그는 자신의 대에선 그 누구도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제 평판을 더럽힌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저주다…….’
율리안은 이것을 여신이 내린 저주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자신 때문에 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기나긴 밤이 떠오르자 율리안은 아득 이를 악물었다.
“그게 전부 네놈들 짓이었다고……?”
“그래. 기억나? 너를 줄곧 험담하고 다녔던 서밋 백작 말이다. 그가 호숫가에서 투신한 게 우연이었던 것 같아? 널 암살하려고 했던 자도 있었지. 그 모든 이가 죽은 게 전부 우연 같더냐.”
“왜!”
율리안이 쇠창살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한 분노를 머금었다.
“대체 그딴 짓을 해서까지 가문을 지키려는 이유가 뭐야!”
“착각하지 마. 우리가 지키려는 건 네 가문이 아니라 이 제국의 질서다.”
“뭐?”
“데프리아교가 국교가 되기 전까지 이 제국은 혼란 그 자체였지. 하지만 여신님의 축복을 받는 제국은 어떻지? 전 대륙을 합쳐도 이 로탄더스를 대적할 자가 없다. 종교의 힘은 아주 위대하지. 우리는 그 질서를 요하네스 공작가란 상징을 통해 유지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우리를 더더욱 버릴 수 없을 텐데.”
“글쎄, 네 선조가 멍청한 짓을 해준 덕분에 우리에겐 신의 사자가 생겼거든. 너를 신의 사자의 식량주머니로 전락시키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 상징은 얼마든지 바꾸면 그만이다.”
이고르가 안쪽에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그게 좋겠군. 릴리 그 계집이 사내아이를 낳을 때까지 널 가둬두는 게 좋겠어. 남매가 나란히 갇혀 있으면 외롭지는 않겠지?”
율리안의 팔뚝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눈빛에서 살기를 읽어내린 레베카가 서둘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자식의 입을 찢어버리겠어.”
“진정해. 근거 없는 헛소리일 뿐이야. 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거야.”
분노한 율리안을 발견한 이고르가 더욱더 조소하며 쇠창살 앞으로 바투 다가왔다.
“그렇지! 여기 계신 공작 부인은 제플린 데본셔의 노예로 던져주면 되겠군. 그가 아주 끔찍하게 당신을…… 끄악!”
율리안이 가까이 다가온 그의 멱살을 잡고 쇠창살에 그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이고르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깨진 그의 머리에서 주르륵 선혈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네 사타구니다.”
율리안은 문짝을 그대로 부술 기세로 쇠창살을 잡았다. 우득거리며 쇠가 조금씩 휘어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싸맨 이고르가 질겁하며 구석으로 기어갔다.
상황을 멀찌감치 보고 있던 레베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율리안. 잠시 밖에 나가 있어. 나가서 이성을 찾는 게 좋겠어.”
“당신과 릴리를 건드렸어. 빛의 장미? 다 몰살해버리면 그만이야. 그럼 우릴 방해하지도 않겠지.”
그는 이미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샛노란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사납게 빛났다.
레베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책 하나를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율리안이 서서히 살기를 거두었다.
“그래…… 그 편이 더 낫겠군.”
“내가 이야기해 볼게.”
율리안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레베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레베카는 허벅지 부근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내가 못미더운 거야? 당신이 준 선물로 저자를 납치해 왔잖아.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바로 알아차리고 날 도우러 와 줄 거라는 걸 알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당신 말대로 하겠어. 대신…….”
율리안이 감옥의 입구를 세게 내리쳤다. 우지끈하면서 철창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튼 짓 했다간 그땐 네 목이 달아날 거다. 이고르.”
그의 흉흉한 협박에 기절이라도 했는지 이고르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이 없었다.
율리안은 경고가 섞인 눈빛을 그에게 던지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레베카는 그가 완전히 감옥 밖으로 나가는 걸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감옥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베카가 발로 감옥 문을 쾅쾅 내리치며 말했다.
“멀쩡한 거 알고 있으니 그만 일어나지 그래.”
그녀의 말에 이고르가 눈덩이를 파르르 떨더니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흘러내린 피를 슥 닦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어둠 속에 물든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레베카를 향했다.
“그래,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군. 공작 부인.”
* * *
감옥을 벗어난 율리안은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문을 닫을까요?”
경비병이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물었다. 율리안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 아직은 그대로 둬.”
그는 슬쩍 감옥 안을 내려다봤다.
레베카가 쪼그리고 앉아 이고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지만 제대로 된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 계셨군요.”
크로아의 밭은 숨소리에 율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오늘 신전에 가셔야 하는 날이지 않습니까. 모시러 왔습니다.”
“신전…….”
지긋지긋한 월례 행사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 기분 나쁜 곳을 떠올리며 이를 악다물었다.
“지금은 안 돼. 레베카가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지.”
“뭐, 약속 시간에 늦는 게 한두 번입니까? 신전에서도 이제 익숙할 테지요.”
크로아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나저나 레오는 어딨어?”
“레오 님께선 아마 숲에 계실 겁니다. 모실 하인을 보내뒀으니 걱정 마세요.”
“숲에? 요즘 따라 외출이 잦군.”
“그러게요. 항상 침대 위에 누워 계시더니…… 뭐, 지루하셨나 보죠. 원래 고양이란 게 속을 알 수 없는 동물이잖습니까.”
“레오는 흔한 고양이가 아니잖나.”
율리안은 손을 쥐었다 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황금빛 모래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