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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88화 (188/232)

188.

그의 신성력은 오롯이 레오의 것이었다.

그는 신성력을 발현할 순 있어도 쓸 수는 없었다. 오로지 레오만이 그의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

가끔 신성력이 넘치는 날이나 신성력을 과도하게 쓴 날에만 제 몸에 신성력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정도였다.

최근 들어서 신성력을 느끼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몸 안 곳곳에서 신성력이 날뛰고 있었다.

“신성력이…… 늘어났어.”

“그거야 요새 좋은 시간을 보내시니 그런 거 아니겠어요?”

크로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율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공작 부부의 사생활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고용인들이 레베카가 갑자기 목을 감싸는 드레스를 입은 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의 증언도 있었다.

율리안이 붉어진 광대를 씰룩이며 크로아를 짐짓 노려봤다.

“불경하기 그지없군.”

“어떠세요? 조세핀의 소설이 효과가 있었습니까? 제 조언이 도움이 되었죠?”

“이 이상 내 침실에 관심을 보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겠는데.”

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크로아가 입술을 비쭉거렸다.

“아, 예. 제가 선을 넘었군요. 닥치고 있겠습니다.”

크로아는 버석거리는 흙바닥을 발로 파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율리안은 그의 투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네 도움이 컸어. 고맙다.”

“예?”

크로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방금 율리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제가 미친 게 아니라면 율리안은 지금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런 단순한 한마디가 이렇게 기쁜 일이었을까.

크로아는 이 기쁨이 조금 씁쓸하면서도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귀가 안 좋아서 그런데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방방 뛰는 크로아는 마치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율리안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의 해맑은 미소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이 정도로 좋아할 일인가?’

율리안은 그런 크로아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술렁거렸다.

새삼 크로아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율리안은 울컥하는 심정을 애써 숨기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크로아를 떼어냈다.

“신전에 갈 준비는 다 해뒀겠지?”

“그거야 당연히…….”

그때였다.

“나도 신전에 가야겠어.”

낭랑한 목소리에 율리안과 크로아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감옥에서 나온 레베카가 비장하게 눈을 치켜떴다.

“그곳에 볼일이 생겼거든.”

* * *

레베카가 율리안을 설득한 말은 단순했다.

‘그를 여기서 풀어주고 뒤를 밟자. 나머지 빛의 장미를 찾아내서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거야.’

그녀의 의도를 율리안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이고르가 알아서 빠져나갈 수 있게 일부러 세게 자물쇠를 내리쳤다. 여러 번 달그락거리다 보면 낡은 자물쇠는 손쉽게 부서질 것이다.

이고르가 자물쇠를 흘깃거리며 말했다.

“그래. 내게 궁금하신 게 대체 무엇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율리안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나?”

이고르는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정말 궁금한 게 그건가? 저주가 풀리면 그가 가진 모든 축복도 사라질 텐데. 그럼 부인이 가진 부와 명예도 끝장이야.”

“상관없어.”

“흐음……. 그것 참 흥미롭군.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알려주지 않겠어.”

“방법을 말해준다면 율리안 몰래 당신을 여기서 빼내주겠다고 해도?”

“솔깃한 제안이긴 하다만 그래도 말해줄 순 없어. 요하네스 공작가의 저주가 풀린다면 신의 사자가 승천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린 그가 꼭 필요하거든.”

이고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러고는 저열한 웃음을 머금고 쇠창살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대신 다른 거래를 제안하지. 당신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으로 만들어주겠어. 율리안을 버리고 당신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거야.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릴리가 후계자를 무사히 생성하도록 돕는 일 하나뿐. 그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요하네스가의 찬란한 재산은 전부 당신 것이 되는 거야. 어때? 솔깃하지 않아?”

레베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고르를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해서든지 율리안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아하니 이고르는 순순히 그 방도를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빛의 장미가 여러 명이라고 했지…….’

오랜 세월 동안 뒤에서 제국을 조종한 이들이니 웬만한 술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사람이었다.

보통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여럿인 경우 각기 성향이 조금씩은 다르기 마련이다.

행동파가 있다면 좀 더 신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신중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레베카는 이고르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굳이 암시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장사를 하기까지 했다.

알리시아에게 약물을 구해준 게 그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고르는 상당한 행동파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직접 발로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오만했다.

오랫동안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 보면 감이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감옥 안에 갇혀 있어도 연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면 그랬다.

자신이 망할 리가 없다는, 그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교만함을 레베카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런 맹목적인 신념은 방심을 부르기 마련이다.

그에 대한 분석을 마친 레베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난 율리안이 저주를 풀길 원해.”

“왜?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이고르가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철없는 소녀 취급에 레베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난 재산이나 명예 따윈 관심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복수뿐이야. 그리고 그가 내 복수를 돕는 대신 나는 율리안의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했어. 난 그 약속을 지켜야 해.”

“계약…… 결혼을 했다는 거군. 그런데 저주를 풀 방법도 알지 못하면서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는 건가?”

“당신도 잘 알 텐데. 수습은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중요한 건 원하는 걸 얻었다는 거 아닌가?”

레베카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심장이 바싹 죄이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고르를 바라보는데 그의 눈동자에 저번과 비슷한 황금빛 이채가 돌았다.

‘또…….’

이건 이제 자신의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레베카는 충격받은 얼굴로 이고르의 눈에서 황금빛이 사라지는 걸 잠자코 지켜봤다.

황금빛이 없어지자 그녀를 바라보던 이고르의 눈빛이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과는 달리 명백한 호의가 담긴 눈빛이었다.

이고르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동류의 기운을 느꼈다.

레베카의 초연한 미소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고르는 가차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레베카의 눈빛을 응시했다.

이윽고 제 눈앞의 여자는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게 되더라도 결코 성공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이고르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날…… 빼내어 주겠다는 게 정말인가? 정보만 얻고 날 죽이지 않을 거란 걸 내가 어떻게 믿지?”

레베카가 심장에 X자를 표시하며 말했다.

“여신께 맹세하지. 당신을 여기서 빼내 주겠어. 만약 이 말을 어긴다면 난 다음 날 피를 토하고 죽을 거야. 여신께서 사랑해 마지않은 당신들이니, 나의 배신을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증거가 되었나?”

‘이런 영악한…….’

그녀의 제안은 담보의 자격조차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베카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제 입으로 내뱉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이고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 난 아쉬울 게 없다.’

어차피 시일이 지나면 빛의 장미가 자신을 구출하러 사람을 보낼 것이었다.

그녀에게 협조하는 건 단지 이 끔찍한 감옥 안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감옥은 청소조차 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에 알 수 없는 이들의 핏자국이 눌러붙어 있었다.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구출되기 전에 병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당신도 맹세해야지.”

“뭐?”

“당신도 내게 한 치의 거짓도 고하지 않을 거라고 여신 앞에 맹세해.”

이고르는 불만스런 기색이었지만 군말 없이 그녀의 제안을 따랐다.

그는 레베카처럼 심장 부근에 X자를 그리고 말했다.

“네게 요하네스 공작가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알려주겠어. 데프리아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럼 이제 알려줘. 그 방법이 뭐지?”

“피가 필요해.”

“뭐?”

“순수한 피의 숭고한 희생. 여신께서 그리 말씀하셨지.”

“그게 정말 여신의 말씀이라는 증거라도 있어?”

“신전에 있는 축복서 제56장에 그리 적혀 있지. 그게 요하네스가에 대한 이야기란 걸 해석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야.”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입매가 파르르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한 태도로 물었다.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는 없어. 제56장은 요하네스 공작이 저주를 받은 날에 내려온 신탁이다. 그리고 여신께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내린 행운’을 언급한 신탁이기도 하지. 그게 레오 님을 지칭한다는 건 아주 명백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못 믿겠으면 직접 축복서를 보면 될 거 아니야. 제56장 이후로 직접 내린 행운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와. 그 행운이 고양이의 몸을 빌렸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신탁도 있어.”

“다른 방법은 없어……?”

“없어. 우린 요하네스가에 내린 저주에 대해 몇백 년을 걸쳐 조사해 왔어. 하지만 지금껏 알려진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자! 됐지? 이제 어서 나를 빼내 줘!”

천장에서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고르가 진저리를 내며 외쳤다.

레베카는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서 입을 열었다.

“해가 지면 이곳의 경비가 느슨해질 거야. 감옥 문은 조금만 흔들면 금세 부서질 테니 알아서 도망치도록 해…….”

이고르가 뒤에서 뭐라고 또 외쳤으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방법이 그거 하나뿐이라고?’

이고르가 토해낸 진실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레베카는 힘껏 그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이내 레베카는 도리질 쳤다.

진의를 확인할 때까진 이고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레베카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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