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신전에 무슨 볼일이 있지? 이고르가 뭐라고 한 거야?”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가는 길에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물었다.
레베카는 자신과 율리안 사이에 누워 있는 레오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딱히…… 별말은 하지 않았어. 그저 빛의 장미에 대해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단순한 호기심이야.”
“그래……?”
율리안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평소처럼 잔잔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마음을 놓았다.
사실 레베카가 자신을 속인다고 해도 이제 상관없었다. 그녀가 가는 길이 어디를 향하든지 함께 가기로 결심했으니.
레베카의 시선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레오를 향했다.
레오는 율리안의 마음속을 읽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레오가 혹시 자신의 속내도 알고 있을까 걱정이 됐다.
레베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오, 혹시 율리안과 그랬던 것처럼 내 속마음도 들려?”
레오가 샛노란 눈동자를 들었다.
‘아니. 너와는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희미한 느낌이야. 네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어. 그리고 율리안도 원하지 않으면 내게 마음을 내비치지 않을 수 있지.’
“그렇구나. 그럼 율리안, 신성력을 사용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야?”
레베카의 질문에 레오와 율리안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로 율리안이 말했다.
“심장이 꽉 조여들면서 땅 밑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확히 말하자면 난 신성력을 쓰는 게 아니라 주는 거지만. 오늘 신전으로 가는 이유도 그와 같지.”
말을 마친 그는 레오의 등을 짧게 쓸어내렸다.
레오가 눈을 깜빡이며 갸르릉 하고 울음소리를 내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말을 되새겨보며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레베카가 율리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율리안. 나 오늘 저녁은 안 먹고 싶어. 점심을 좀 많이 먹은 것 같아.”
잔잔한 미소를 짓던 율리안의 입매가 순식간에 틀어졌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안 돼. 당신은 아직 많이 먹어야 한다고.”
레베카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이고르와 마주했을 때와 같이 단전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니. 안 먹을래.”
율리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레베카는 눈에 더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차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고르나 옥타비오의 눈에 이채가 잠깐 돌던 것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다시 검은빛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율리안이 한껏 걱정하며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혹시 배탈이라도 난 거야? 그럼 당장 마차를 돌려서 의사에게 가자.”
“아니. 아니야. 저녁 먹을게.”
“놀랐잖아. 레베카.”
율리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그의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율리안에겐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무슨 조건이 따로 있나?’
회귀한 이후로 레베카는 종종 제 몸에 낯선 기운이 흐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떨 땐 배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혈색마저 앗아갈 정도로 차갑기도 했다.
이전 생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율리안과 만난 뒤로 점점 커지더니, 요즘은 자다가 잠에서 깰 정도로 몸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고르의 눈동자가 황금색 이채를 보였을 때의 그 느낌. 그건 신성력을 썼을 때와 증상이 동일했다.
레베카는 자신과 닿자 빛을 내뿜던 성물을 떠올렸다. 그건 옥타비오의 조작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자신에게 신성력이 있는 걸까?
어쩐지 회귀의 이유도 그와 연관되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자신에게 신성력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신성력은 본디 타고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릴 적 신전에 가서 신성력 검사를 해봤지만 그땐 성물에서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드물게, 나중에 신성력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만 그 순간엔 뼈가 돋아나는 것처럼 무척이나 괴롭다고 했다.
때문에 신성력이 생겼더라면 그녀가 모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잘됐어.’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해본다면 제 신성력은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건 왜 이제야 그 능력이 발휘되었냐는 것이었다.
레베카는 생각에 잠긴 채로 율리안과 레오의 손장난을 지켜봤다.
레오와 율리안은 퍽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우울감이 잔여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원하지 않는 목숨줄을 쥐고 있는 자와 목숨을 담보 잡힌 사람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둘 다 저렇게 서로를 위하면서도…….’
레베카는 레오의 뒤통수를 살살 긁는 율리안의 손놀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오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가 얼마나 율리안을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의 사자는 율리안의 행복을 빌었다. 율리안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레베카는 이고르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말이 부디 거짓이길 바랐다.
하지만 신전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 * *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율리안과 레오는 사제의 안내를 받아 교황의 방으로 향했다.
레베카는 멀어져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원래 목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고에 가고 싶은데…….”
그녀가 서고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사제 여럿이 달라붙어 그녀에게 길을 안내했다.
그들은 흔쾌히 레베카를 서고에 들여보내 주었다.
신전의 서고는 일반인은 들어갈 자격조차 갖지 못했다.
고위 귀족이나 교수마저도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럴 땐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라는 게 참 편리하단 말이지.’
레베카는 손에 흰 장갑을 끼며 서고를 슥 둘러보았다.
모든 책이 쇼케이스 안에 담겨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축복서는 이쪽입니다.”
축복서는 데프리아 여신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었다.
사제는 두꺼운 책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자신의 상체보다 거대한 책을 레베카는 초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럼 열어드리겠습니다.”
사제가 진지한 태도로 유리돔을 열었다.
“몇 페이지를 읽고 싶으십니까.”
“제56장을 찾아주게.”
사제가 조심스럽게 축복서를 넘겼다.
이윽고 56장이 펼쳐지자 레베카는 정신없이 페이지를 훑어 내렸다.
축복서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지금껏 많은 신학자가 축복서를 해석하려 도전했지만 반도 해석하지 못했다.
축복서를 빠르게 훑어내리던 레베카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지혜는 행운을 낳고 행운은 지혜를 따르나니.>
어딘가 눈에 익은 구절이었다.
레베카는 잠시 그 의미를 곱씹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님을 그녀는 잘 알았다.
사제는 한껏 집중한 레베카를 흘깃 바라봤다.
축복서 56장은 해석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장이었다. 조금만 읽어도 머리가 아파지는데 레베카는 몇십 분 동안이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요하네스 공작 부인에게 신앙심이 없다는 소문은 거짓인가 보았다.
게다가 그녀는 성녀의 자질까지 있던 사람이 아닌가.
사제는 레베카의 눈부신 옆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을 헤매던 레베카는 마침내 원하던 구절을 찾아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행운을 피로 섬겨야 할 것이다. 이 굴레를 끊고자 하는 것 또한 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순수하지 않은 피는 나의 분노를 살 것이오. 오직 숭고한 희생만이 그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니, 나의 첫 번째에 뿌리는 피가…….>
그 순간 레베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괜찮으십니까!”
레베카가 벌벌 떨며 휘청거리자 사제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사제의 손을 뿌리치며 얼른 뒷장의 내용까지 확인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행운은 내 자식의 형상을 하고서 강림했나니…….>
이고르의 말이 맞았다.
여신이 인간 세상에 보낸 행운이란 건 레오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숭고한 희생 끝에 천국으로 가는 ‘그’는 요하네스 공작이 분명했다.
순수한 피.
결국 신이 원하는 건 죽음이었다.
레베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고르의 비열한 미소가 눈앞에 선득하게 떠올랐다.
‘아니야……. 그의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다른 구절을 찾아봐야겠어.’
레베카는 악에 받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읽어야겠어요.”
그녀는 제56장을 샅샅이 눈에 담았다. 혹시나 몰라 다른 장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자신의 우둔한 머리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그 전에 율리안이 식물인간이 된다면?
결국 지금 상황에서 율리안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이제 그만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제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레베카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하하…….”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부, 부인. 왜 그러십니까!”
“여신의 전언이 참으로…… 제 가슴을 후벼파는군요.”
레베카는 비틀거리다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여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레베카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토록 신실한 공작 부인이라니.
사제의 얼굴에 진한 감동이 떠올랐다.
그는 그 망나니 같은 요하네스 공작에게 이런 부인이 찾아온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레베카를 부축했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었어.’
누군가가 심장을 난도질한 기분이었다.
꺼억꺼억 울며 데프리아를 저주하고 싶었다.
당신이 짜놓은 운명에서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지난 생엔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삶을 주더니, 이번 생에는 꿈결처럼 달콤한 삶을 줘 놓고 죽으라고 하다니.
자신을 비웃는 여신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신에게 자신의 인생은 단순한 유흥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가지고 놀던 벌레가 죽으면 아무렇지 않게 사체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어린아이의 순박한 장난질 같은.
그러나 더 끔찍한 건 자신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율리안 없이 홀로 남겨질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율리안이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생으로 다시 되돌아 왔을 때도 이만큼의 무력감은 느껴보지 못했다.
‘하지만 난 그의 앞에서 웃을 거야.’
율리안은 자신의 미소를 좋아했다.
끝이 오기 전까지 자신은 그의 앞에서 웃어야 했다.
레베카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