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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90화 (190/232)

190.

레베카가 도서관을 나와 로비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어딘가 뒤숭숭했다. 다들 어디론가 바삐 뛰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레베카의 질문에 그녀를 부축하던 사제가 냉큼 누군가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상황 설명을 들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것이, 교황 성하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어머, 큰일이네요. 지병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기에 레베카는 형식적으로 교황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거대한 몸집과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미루어보자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평범한 질문에 사제가 갑자기 구슬땀을 흘렸다.

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요, 요하네스 공작이 휘두른 주먹에 그만…….”

“뭐라고요?”

레베카가 경악한 얼굴로 교황의 방으로 달려가는 의무진을 바라보았다.

들것도 같이 들어가는 걸 보니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레베카가 얼른 인파의 뒤를 쫓았다.

* * *

데스라치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눈두덩이에 커다란 피멍이 들어 있었고, 이가 몇 개는 나간 듯 보였다.

율리안은 한쪽 소파에 앉아 기사 몇 명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 듯 느긋하게 발을 뻗고 있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율리안은 레베카를 발견하자 눈을 접어 보였다.

그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올 기세였으나 곧 기사에게 저지당했다. 율리안의 얼굴이 금세 험악해졌다.

떨떠름하게 사태를 관망하던 레오가 레베카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베카가 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레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보시다시피 율리안이 교황을 때려눕혔지.’

“그러니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율리안이 교황을 싫어하긴 해도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잖아.”

‘교황이…….’

레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네 생식능력을 의심했다.’

“아.”

아마도 평소와 같이 후계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불임이라는 오명을 쓰고 제플린과 이혼한 몸이니 데스라치노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레베카는 시근거리며 기사와 대거리하는 율리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실수였어.”

그는 사과 한마디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고수하고 있었다.

교황이 먼저 레베카를 모욕했다고 하더라도 참작이 될까 말까였다.

하지만 율리안은 끝까지 레베카에 대한 어떤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꽉 막힌 목소리로 레오에게 물었다.

“율리안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네 이름이 이들 사이에 언급되는 것 자체를 불쾌하다고 여기고 있어.’

“그렇구나……”

‘그리고 지금은 네 명예를 지킬 수만 있다면 감옥에 며칠 들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군.’

레베카가 숨을 흡하고 들이마셨다.

그는 어쩌자고 자신을 이토록 아껴주는 걸까.

그녀의 결심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레오.”

기사가 율리안의 손에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레베카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그를 불렀다.

레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대로 해줘.”

잠자코 레베카의 말을 듣던 레오의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정말 그게 통할까?’

“통할 거야.”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레오는 영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그래도 레베카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천천히 데스라치노에게 다가갔다.

방 안에 있는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레오를 멍하니 지켜봤다.

“너, 뭐하는…… 윽!”

율리안이 레오를 부르는 순간 그가 신음을 토해내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레오가 데스라치노의 이마와 맞대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이미 수정구에 상당한 양의 신성력을 뽑아낸 뒤라 율리안의 고통은 배가 됐다.

그가 머리를 싸매고 바닥에 쓰러질 때쯤에야 데스라치노가 눈을 떴다.

“교, 교황 성하!”

“이게 무슨…… 일이지?”

데스라치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리둥절한 채로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얼굴이 말짱한 걸 깨달은 데스라치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오를 돌아봤다.

발에 꼬리를 말고 꼿꼿하게 앉은 레오가 짧게 울었다.

레오의 울음에 율리안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신의 사자께서 이르시길, 내 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지, 직접 저를 치료해주셨단 말씀입니까?”

데스라치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거렸다.

그런 데스라치노를 바라보던 레오가 다시 한번 더 크게 울었다.

애옹-

레오의 말에 율리안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레오를 노려봤지만 레오는 그의 다음 말을 채근할 뿐이었다.

결국 율리안은 레오의 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요하네스 공작에게 교황이 받은 만큼의 고통을 주었으니 불미스러운 일은 그만 잊고, 그를 용서하라. 그렇다면 네가 했던 발언을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이, 잊고말고요! 누구의 분부인데 거절하겠습니까.”

데스라치노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제와 기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레오가 놀란 눈으로 레베카를 슬쩍 돌아봤다.

레오의 시선을 알아챈 레베카가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뭐랬어.”

율리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레오와 레베카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한 레베카의 고요한 미소에 율리안은 이 상황이 레베카의 계책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목을 쓸었다.

치솟는 율리안의 어여쁜 입꼬리를 바라보는 레베카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 * *

제플린은 기묘한 눈길로 서재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느새 간이 의자까지 들고 와서 아주 열심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보면 모르시나요? 요하네스 공작을 곤란하게 만들 방법을 구상하고 있죠!”

“아서가 혼자 있잖아.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나 혼자서도 충분해.”

“아서는 유모와 있으니 괜찮아요. 그러니 난 여기서 내 할 일을 해야겠어요.”

원래라면 완력을 써서라도 그녀를 밖으로 내쫓았겠지만 그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소보다 생기 넘치는 알리시아의 푸른 눈이 레베카와 비슷해서였을까.

아니면 일전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생각보다 부드러워서였을까.

제플린은 알리시아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 서류에 집중했다.

“네 맘대로 해. 대신 조금이라도 소란을 떨었다간 내쫓을 줄 알아.”

서재에서 질질 끌려 나갈 걸 예상하고 있던 알리시아는 의외의 대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제플린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에겐 희소식이었다.

알리시아는 밤새 머리를 싸매며 세운 계략을 내려다봤다.

<살롱에 가서 소문내기, 익명으로 기자에게 정보를 흘리기, 레베카를 협박하기…….>

최선을 다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형편없는 계획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구겼다.

요하네스 공작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을 내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진실을 가지고 공작을 협박한다 해도 그 짐승 같은 사내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게 분명했다.

특히 레베카는 그걸 빌미로 자신을 역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기가 막힌 계획을 잘도 생각해내는데 자신은 왜 그럴 수 없는지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이럴 땐 레베카의 머리를 빌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똑똑-

알리시아가 열심히 뻣뻣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테디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베이츠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 구석에 자리 잡은 알리시아를 발견한 베이츠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 드디어 지혜의 불꽃을 죽였나보군.”

“실패했답니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그자의 정체에 경비병들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 탓에 일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생겼다 합니다.”

“뭐? 이 쓸모없는……. 당장 그 망할 놈의 불을 꺼트려야 내가 산단 말이다! 빛의 장미가 약속한 기한이 거의 다 됐어.”

“좀 더 좋은 방도를 찾아내라고 재촉해 보겠습니다.”

“지혜의 불꽃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리시아가 대뜸 끼어들었다.

제플린이 손을 내저었다.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불을 꺼트리는 게 목적이라면 물에 담그면 되잖아요.”

“뭐?”

“불에 물을 끼얹으면 꺼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순간 제플린과 베이츠는 할 말을 잃고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뭐 그런 걸로 고민을 하냐는 듯 순진한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윽고 제플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네 말에 일리가 있어. 왜 지금껏 그 생각을 못한 거지? 그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잖아. 베이츠.”

“예. 하명하십시오.”

“그 지혜의 불꽃, 바다에 던져 버려. 수장시켜 버리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겠지.”

“알겠습니다.”

베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여기에 남는 걸 택한 이상 그는 제플린의 사냥개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요하네스 공작을 배신하는 꼴이 되었지만 그가 원한 건 제플린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알리시아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탈출을 거절한 지금, 그녀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데본셔 백작가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베이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알리시아를 잠깐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알리시아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렇지. 베이츠.”

“예.”

알리시아가 제게 말을 걸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베이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요하네스 공작가에 또 다른 비밀은 없나요?”

“그게 무슨…….”

“당신은 이제 사냥개의 우두머리잖아요. 그의 약점을 잡을 만한 특이한 사항이 없느냔 말이에요.”

베이츠는 제플린을 흘깃 쳐다봤다.

제플린이 흥미가 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이츠는 요하네스 공작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말간 두 눈을 마주하자 그는 더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약점인지 모르겠으나, 공작가에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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