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어린아이요?”
“예. 릴리라고 합니다. 공작의 숨겨둔 여동생이라고 하더군요.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조만간 모두가 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공작이 아끼던가요?”
“제가 볼 땐 그랬습니다. 오벨리아가와 교류도 있는 걸 보면.”
알리시아는 생각에 빠졌다.
레베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니.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걸 생각해야 해.’
요하네스 공작의 뒤에는 항상 레베카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율리안 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으르렁거리기만 할 줄 아는 사내였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쪽은 레베카였다.
알리시아는 레베카와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레베카를 한 번쯤은 이겨보고 싶었다.
‘레베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
레베카의 입장이 되어 곰곰이 생각하던 알리시아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으나 그 뒤를 이어 걱정이 줄줄 따라왔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석상처럼 묵묵하게 서 있는 베이츠를 바라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용기가 샘솟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그가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가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알리시아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이제 제플린이 저를 하대해도 예전만큼 두렵거나 괴롭지 않았다.
베이츠를 온전하게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베이츠가 눈을 찬찬히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알리시아는 깜짝 놀라며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알리시아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게 방도가 있어요…….”
“뭐라고?”
“요하네스 공작을 확실하게 망하게 할 방법이 있다고요.”
알리시아의 말에 제플린은 성가시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또 어떤 신박한 헛소리를 지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지금은 헛소리라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때였다.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디 한번 말해봐.”
“당신이 잘 하는 걸 하죠.”
“내가 잘 하는 거?”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오는 거예요. 레오 님과 그 릴리라는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협박하면 어떨까요?”
무심하게 펜을 돌리던 제플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삐딱한 자세를 고쳐 앉고는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턱을 괴고서 눈을 빛냈다.
“어디 한번 들어보지.”
* * *
레오가 나서준 덕분에 율리안의 폭행 건은 거액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곧 데프리아 여신의 탄생절이 다가왔다.
탄생절은 요하네스 공작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날이었다. 때문에 율리안은 몇 시간은 더 신전에 잡혀 있어야만 했다.
그동안 레베카는 신전의 서고에 틀어박혀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혹시나 하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별 수확이 없었다.
레베카는 착잡한 마음으로 서고에서 나왔다.
저 멀리서 사제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율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서류를 떠넘기는 사제에게 싫은 소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율리안이 졌는지 그는 막대한 양의 서류를 품에 안고서 로비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왔다.
레베카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교황을 때려눕힌 율리안을 떠올렸다.
그런 말을 한 이가 황제라고 하더라도 그의 주먹에는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다.
무모하고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자신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설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는 레베카가 불구덩이에 뛰어내린다면 망설임 없이 함께 뛰어들 사람이었다.
‘나도…… 나도 그에게 똑같이 할 수 있어.’
수군거리던 레베카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서 율리안을 향해 걸어갔다.
레베카를 발견한 율리안이 해맑게 웃었다.
“레베카! 오래 기다렸지?”
그는 주인에게 뛰어오는 강아지처럼 레베카를 향해 긴 다리를 뻗었다.
레베카는 달려오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율리안은 당황해하다가 이내 서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런 포상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았다면 진작에 나왔을 거야.”
그는 싱글거리며 제 턱 아래에서 풍겨오는 레베카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이곳이 신전이란 걸 둘은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집요하게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문득 레베카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오랜 투병을 하던 외할머니는 치료를 마다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건강이 허락하는 선에서 근거리로 가족여행까지 다녀왔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후회로 보내고 싶지 않구나. 짧은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흐뭇한 미소를 짓고 관에 누웠다.
정말 떠나야 한다면 레베카는 외할머니처럼 그렇게 떠나고 싶었다.
굳은 결심을 한 레베카가 그의 넓은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율리안이 그녀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나저나…… 화나지 않았어?”
“내가 왜 화가 나?”
“생각 없이 행동해서……?”
“날 위한 거였잖아. 그리고 교황에겐 언젠가 한 방 먹이고 싶었어. 날 보는 눈빛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걸? 내 명예를 지켜줘서 고마워, 율리안.”
“그렇다면 다행이군.”
레베카의 말에 율리안은 안심이라는 듯 어깨를 폈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주눅 들어 보인다 싶었다. 아마 레베카에게 한 소리를 들을까 걱정하고 있던 것 같았다.
사제들과 기사의 고함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율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제게 혼날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레베카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떨어진 서류들을 주웠다.
율리안도 얼른 허리를 굽혀 서류를 그러모았다.
한참 종이를 정리하던 두 사람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불꽃처럼 정전기가 찌릿하고 흘렀다.
“아……!”
레베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는데 율리안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신의 손을 잡으려면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지.”
그가 눈을 살포시 접고 사르르 웃었다.
마가렛의 케이크가 입에 들어갔을 때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레베카는 그가 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행복하다.’
그는 세상 모든 근심을 멈춰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레베카는 그를 따라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들겠다고 우기는 율리안을 무시한 채 서류 더미의 반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역시 탄생절에는 요하네스 공작이 할 일이 많나 봐.”
“올해는 더 난리더군. 앞에 나와서 연설까지 해야 된다는 걸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중이야.”
“연설……?”
“그래. 원래라면 여러 행사에 참석만 하면 됐었는데 말이야.”
레베카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좋은 기회 같은데?”
“뭐?”
“연설하는 거 말이야. 거기서 무슨 말을 할지는 당신 자유인 거 아니야?”
“연설문을 미리 주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따를 이유는 없지.”
그녀의 눈이 영민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탄생절에 폭죽 대신 폭탄을 터뜨리는 건 어때?”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리안에게 레베카가 물었다.
“화산섬에 잠입하는 게 성공했다고 했지?”
“그래. 버틀리에게서 연락이 왔어. 샬럿과 접선했다고 하더군.”
“로버트도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고……. 조만간 몽블랑 회원들을 만나야겠어.”
“몽블랑 클럽은 왜?”
“우리끼리 일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에겐 큰 뒷배가 있잖아? 이날을 위해 지금껏 황제의 비위를 맞춰준 거였어.”
레베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율리안이 그녀를 마차 위로 에스코트하면서 말했다.
“당신 생각이라면 뭐든지 찬성이야.”
율리안이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봤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군. 이쯤 되면 이고르가 도망치고도 남았겠어.”
“맞아. 칸나가 뒤를 밟기로 했어.”
“그녀가 갔다면 안심이지. 곧 빛의 장미가 낯짝을 드러내겠군.”
“그렇겠지. 칸나는 유능하니까.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율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차 안은 불의 마석으로 훈훈한 열기가 흐르고 있었다.
레베카는 차가워진 손을 의자에 문질렀다.
“추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율리안이 제 재킷을 벗어서 어깨에 둘러주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율리안의 몸은 난로처럼 뜨끈뜨끈했다.
레베카는 그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그의 온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암시장에 갔을 때 옥타비오를 만났어.”
“옥타비오?”
“그래. 베이츠가 우리에게 전해주겠다고 한 선물이 바로 옥타비오였어.”
“그러고 보니 베이츠가 연락 두절이군……. 알리시아도 오두막을 떠나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알리시아의 이름이 나오자 레베카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제 그 둘의 협조를 바라는 건 무리겠네.”
율리안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미 얻어 낼 건 얻었으니 이제 그들의 도움은 필요 없어. 그리고 애초에 기대를 하지도 않았잖아? 배신의 값은 차차 받아내면 될 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옥타비오 그 자식이 네게 뭐라고 했어? 이고르처럼 헛소리를 지껄인 건가?”
율리안이 잇새 사이로 그르렁 소리를 내었다.
레베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랬다면 이고르처럼 납치해 왔겠지. 그는 우리를 돕기를 원했어. 제플린에게 내쳐지고 빛의 장미도 자신을 버렸으니까.”
“그거 하난 속이 시원하군.”
“그가 말하길, 화산섬에 인질들 말고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어.”
“또 다른 비밀?”
“지혜의 불꽃이 그곳에 잡혀 있어.”
“지혜의 불꽃? 설마 내가 아는 지혜의 불을 말하는 거야? 카디르교의……?”
율리안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종교학에 관해선 학자만큼이나 조예가 깊었다.
“전설 속의 내용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데본셔가에서 ‘그’를 납치해서 섬에 오래 가두고 있었어. 그리고 그 대가로 빛의 장미에게 거액의 돈을 후원받았고.”
“흠…… ‘그’라고 하는 걸 보니 지혜의 불이 사람이라는 거겠군.”
“맞아.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불멸의 존재라고 했어.”
율리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정말 지혜의 불이 존재한다면 데프리아 여신이 유일신이라 주장하는 신전에 큰 타격을 줄 것이었다.
율리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