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재밌네. 그래, 신의 고양이도 있는데 불멸자라고 없겠어? 이거 신전의 꼴이 우습게 되었군. 황제가 아주 좋아하겠어.”
“하지만 클럽 회원들이 이 사실을 반길지 의문이야. 귀족들은 상관없겠지만 신학자들은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어.”
“상관없지 않겠어? 그들은 초창기의 데프리아교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자들이야. 원래 데프리아교는 여러 종교 중 하나였을 뿐이지. 확실한 증좌를 내민다면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을 거야.”
“그랬으면 좋으련만…….”
“이럴 게 아니지. 돌아가자마자 서신을 써야겠어.”
신나는 어투였지만 그의 표정은 꽤 복잡했다.
어릴 적부터 세뇌당하다시피 들어왔던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게 기분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그러쥐었다.
* * *
“말씀하신 대로 요하네스 공작에게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득이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하셨군요.”
제플린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데스라치노를 바라봤다.
데스라치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저지른 일이 있어서 그런지 공작이 퍽 얌전하게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다 그자를 너무 싸고돌아서 생긴 일 아닙니까. 알고 보니 그럴 자격도 없는 자식을…….”
제플린이 뿌득 이를 갈았다.
그의 분노한 기색을 엿보던 데스라치노는 축축해진 손을 손수건에 연신 문질렀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율리안이 이곳에 방문하기 몇 시간 전, 제플린은 빛의 장미가 보낸 서신을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여신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니 신전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 그가 저주받은 몸으로 세상을 기만한 사실을 널리 알려라.>
율리안이 무슨 짓을 하든지 빛의 장미는 그를 두둔했다.
그가 공개 석상에서 여신을 모욕하더라도 그저 참으라고 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
이유야 어찌 됐든 데스라치노에겐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율리안이 가격했던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레오의 축복으로 상처는 말끔히 나았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깟 계집이 대체 뭐라고!’
교황이 요하네스 공작 부인의 생식능력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대 교황들에 비하면 그는 유하게 말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율리안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그 건방진 공작을 더 이상 봐주지 않아도 되었다.
데스라치노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의 장미께서 요하네스 공작의 처리를 당신께 일임하셨더군요. 계획이 있습니까?”
“그가 고양이 새끼…… 아니 신의 사자께 신성력을 제공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요하네스 공작의 존재 이유라면서요?”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요하네스 공작의 편의를 봐주고 있던 이유였지요. 공작가의 명맥이 끊긴다면 신의 사자가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어찌 됐든 율리안은 신의 사자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저는 그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생각입니다.”
“위치라면……?”
“그를 감금할 겁니다. 그리고 사지를 묶어두고 죽을 때까지 신성력을 제공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끔찍한 이야기군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제 양심이 허락하질 않아 그렇습니다.”
내키지 않아 하는 데스라치노의 태도에 제플린은 혀를 찼다.
어린 소녀를 강매하다시피 부인으로 들인 자가 양심을 논하다니…….
“교황 성하께서는 그자에게 받은 수모를 금세 잊으셨나 봅니다. 그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기엔 업보가 너무 크지요.”
“그건 그렇다고 쳐도 공작에겐 아직 후계자가 없습니다. 그의 성격에 감금당한 채로 후사를 보려고는 하지 않을 터인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듣자하니 공작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아들을 낳으면 그만 아닙니까. 아직 어린 나이이니 길들이기도 쉽겠군요.”
“데, 데본셔 백작……!”
제플린은 끔찍한 이야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 냉정한 태도에 데스라치노가 입을 떡 벌렸다.
‘레베카가 그자의 아이를 갖게 둘 수는 없지.’
신병이라 생각했던 레베카의 병은 사실 악마의 발톱 중독이었다.
제플린은 그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그 식물을 복용한 뒤로 아이가 생긴 부부가 많았다.
그러니 레베카가 정말 불임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몸을 회복했을 터였다.
레베카가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레베카를 하루빨리 자신에게 데려올 이유는 차고 넘쳤다.
제플린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었다.
“어차피 레오 님의 안위만 보장되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교황께선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줄 알았습니다. 앓던 이 같던 공작을 제가 대신 제거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백작님의 말씀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언제쯤 일을 실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제플린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러곤 턱을 높이 치켜들고 말했다.
“탄생절이 좋겠군요. 그자의 비명이 폭죽과 함께 울려 퍼질 테니.”
* * *
한편, 칸나는 이고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미행한다는 걸 알아챈 듯 카페나 시장 등 인파가 북적이는 곳만 골라 다녔다.
‘얕은 수를 쓰는군.’
레베카가 부탁한 일이었다. 칸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이고르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고르가 객마차를 얻어 타는 걸 확인한 칸나도 곧장 말을 빌려 탔다.
그녀는 마부의 사각지대를 계산하고 속도를 조절했다.
다행히 자신을 따돌렸다고 생각했는지 마차는 순탄하게 어느 저택으로 향했다.
‘이곳은…….’
객마차가 멈춰 선 곳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고저택이었다.
칸나는 단번에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랭스터 후작저?’
로브로 모습을 가린 이고르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인들이 깍듯하게 그를 모셨다.
덕담을 주고받는 걸 보니 아주 오랫동안 왕래한 사이인 것 같았다.
뒷배에 랭스터 후작이 있었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후작만큼이나 빛의 장미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랭스터 후작가는 언제나 신전의 번영과 함께 했던 집안이었다.
‘이거면 됐어.’
칸나는 이고르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그녀는 뒷골이 쭈뼛 섰다. 명백한 살기가 느껴졌다.
칸나가 재빠르게 바닥으로 굴러 저를 덮치려는 이의 손아귀를 피했다.
간발의 차로 그녀를 놓친 사내가 비릿하게 읊조렸다.
“뭐든지 하는 칸나라고 했나. 내 기척을 알아차리다니. 역시 소문대로 실력이 좋군. 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사내의 신호와 동시에 칸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추를 매단 쇠그물이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칸나는 얼른 그물을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기엔 그물의 크기가 컸다.
결국 그녀는 속절없이 잡히고 말았다.
포박당한 칸나가 거세게 저항하자 쇠그물이 요동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쇠그물에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가시가 칸나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거물을 쫓으면서 너무 방심한 거 아니야? 어이, 아가씨. 그 예쁜 얼굴을 온전하게 놔둔 채 나가고 싶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사내가 씩 웃자 그의 금색 치아가 창백한 햇살에 번쩍였다.
칸나는 사로잡힌 짐승처럼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 * *
공작 성으로 돌아온 레베카는 서둘러 황제에게 보낼 서신을 썼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몽블랑 클럽 회원들을 모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황제를 설득할 단어를 고르는 사이, 율리안은 릴리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었다.
“레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크로아가 엉덩방아를 찧었지 뭐야. 그걸 보고 조세핀이 엄청 크게 웃었어. 오빠, 그거 알아? 조세핀은 크로아를 볼 때마다 웃고 있다?”
“그래……?”
율리안이 조금 놀란 눈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그가 모르는 사실을 전한 게 뿌듯한지 릴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응! 크로아도 조세핀이 웃으니까 웃었어. 엉덩이에 커다란 자국이 생길 만큼 세게 넘어졌는데 말이야. 이상하지?”
“네 말대로 이상하군.”
율리안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크로아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연인이 생겼던 적이 없었다.
그는 혼기가 꽉 차다 못해 이제 노총각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의사조차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유추해보던 율리안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설마 나…… 때문인가?’
그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레베카를 흘깃 바라봤다.
그러곤 레베카를 만나기 전 자신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그는 쌍쌍이 붙어 다니는 연인을 혐오했다. 그 때문에 고용인들 사이의 연애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게 바로 크로아였다.
율리안은 그가 자신을 위해 수절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사랑을 알게 된 지금, 그 감정을 숨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잘 알았다.
문득 릴리의 낭랑한 재잘거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크로아가 제게 보였던 충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자신을 올바른 곳으로 이끌려고 했던 그의 노력이 떠올렸다.
그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안은 황급히 마른세수를 했다.
감동인지 후회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릴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티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살펴봤다.
“탄…… 생절? 이거 탄생절에 관한 거 맞지?”
눈을 반짝이며 릴리가 율리안을 응시했다.
탄생절은 제국민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장 좋아하는 축제였다.
겨울 장미에서 태어났다는 데프리아 여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행운을 바라며 기도를 올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날에는 다채로운 유리 장미가 제국 곳곳에 내걸렸다.
각 가문의 특색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주사위 장식품이 정원을 장식했다.
전 세계의 광대와 음유시인이 제국으로 몰려들었고, 진귀한 물품을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다.
탄생절의 밤에는 저마다의 소원을 적은 풍등을 날리는 시간도 있었다.
성에 갇혀 살았던 릴리도 이날만은 손꼽아 기다렸다.
축제에 참여하진 못해도 공작 성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성 밖을 나갈 수 있게 된 릴리는 더더욱 탄생절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 축제에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