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릴리의 외침에 크로아 생각에 빠져 있던 율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릴리는 벌써부터 축제에 참석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고 있었다.
율리안의 콧잔등에 짙은 주름이 졌다.
그 많은 인파 사이에 릴리를 보내는 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차라리 공작 성 안에서 축제를 벌여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릴리가 실망하겠지.
그는 더 이상 저 작은 아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안이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와아!”
릴리가 기뻐하며 율리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탄생절에는 수도에 거대한 유리 장미가 세워진다는 게 정말이야? 조세핀이 말해줬는데, 햇빛이 비치면 장미에 무지개가 떠오른대!”
“그런 게 있었지.”
“너무 궁금해! 소원을 적은 등불도 날리고 싶어!”
릴리는 열 손가락을 접어가며 자신이 그동안 탄생절에 하고 싶었던 일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도 퍽 안쓰러웠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릴리가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키도 꼭 같이 가자!”
“당연하지. 너무 기대되는걸?”
레베카의 부드러운 화답에 릴리가 환히 웃었다.
“신난다! 가족 외출이야!”
흥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릴리가 빙그르르 돌았다.
그녀가 세 번쯤 돌았을 때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목욕하실 시간이에요.”
조세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릴리가 조세핀의 허리에 찰싹 붙으며 말했다.
“조세핀! 오빠가 탄생절에 같이 가자고 했어!”
“정말요?”
조세핀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조세핀의 시선에 율리안은 괜히 멋쩍어져 목을 긁었다.
“가족끼리 다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가족이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 나오는 게 무척 생소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조세핀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가씨께 최고의 선물이 되겠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릴리와 함께 서재를 나섰다.
릴리의 신난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율리안은 릴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레베카가 살며시 다가갔다.
레베카가 은근하게 그의 손을 잡자 율리안이 벌게진 눈시울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가녀린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탄생절. 정말 즐거울 것 같아. 그치?”
부드러운 그녀의 미소에 서린 기대감을 보고 율리안은 웃음을 흘렸다.
복잡했던 그의 머릿속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율리안이 맞잡은 손을 들어 레베카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래. 나도 기대돼.”
둘은 말없이 눈웃음을 주고받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웃던 레베카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레베카의 얼굴 위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칸나가…… 많이 늦네.”
그녀의 말에 율리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확실히 예상한 시간보다 많이 늦긴 했다.
율리안이 주름진 레베카의 미간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사람을 보내볼까?”
그의 말에 레베카는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다.
“아니. 칸나도 항상 나를 믿었으니 나도 칸나를 믿어야겠지. 분명 엄청난 단서를 발견해서 늦는 걸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베카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음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 손에 힘을 주었다.
율리안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칸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 * *
집무실에서 처리할 안건이 더 있다는 레베카를 남겨두고 율리안은 문을 나섰다.
그는 곧장 크로아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긴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공작님?”
정원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던 크로아가 율리안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담뱃불을 껐다.
“칸나가 늦는군. 사람을 보내야겠어.”
“에이, 설마 그 칸나 양에게 무슨 일이 생겼겠습니까?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사람인데요.”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율리안이 초조하게 눈을 부릅떴다.
“칸나를 지키는 건 레베카를 지키는 일이기도 해. 칸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레베카가 슬퍼하겠지. 난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그녀를 보호해야겠어.”
크로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저밖에 모르던 율리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날이 오다니.
‘이벨리나 공작 부인. 지켜보고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아드님이 사랑에 빠져 버렸네요.’
이벨리나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광경이었지만 크로아는 어쩐지 내심 흐뭇했다.
그는 최근에 일어난 율리안의 변화가 무척이나 달가웠다.
유리 조각 같던 소년이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크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타니샤가 더 잘 알 겁니다. 지금 당장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일생일대의 임무를 받은 것마냥 크로아가 비장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래, 믿을게.”
자신을 향한 율리안의 굳건한 신뢰에 크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변하셨군요. 좋은 쪽으로요.”
“그런가?”
“예. 레베카 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변하셨습니다. 상냥한 사람이 되셨어요.”
율리안은 물기 어린 크로아의 따뜻한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가 변한 건 레베카 덕분만은 아니야. 물론 그녀가 내게 영향을 많이 미쳤긴 했지만…….”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실은 크로아 네 지분이 더 크지.”
“예……?”
“레베카는 항상 내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해줬어. 기꺼이 친절을 베푸는 마음을 타고났다고. 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아니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말야. 내가 변한 건 당신이 날 키워줬기 때문이었어.”
“공작님…….”
“그동안 날 키워줘서 고마워, 크로아.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당신이 내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나도 레베카를 사랑할 수 있었어. 크로아, 넌 내게 부모와 같은 존재야.”
크로아는 차오르는 울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농담이라 하기엔 율리안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수많은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내뱉었다간 볼썽사납게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때문에 크로아는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등을 돌렸다.
“제, 제가 유능한 집사인 걸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누가 들어도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율리안은 돌아선 그의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고마워. 크로아.”
크로아는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고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말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 * *
라본느 살롱의 ‘학자의 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붐비고 있었다.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기다란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있었다.
“오호라……. 그런 원리로 전투불능 상태로 만든다는군요.”
“어어. 첼스턴 백작. 손대지 말게. 까딱하다간 여기 있는 모두가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럼, 황녀님 저 기다란 이지창은 뭡니까?”
“아. 이건 전기충격기인데, 딱 기절할 만큼의 전기가 흐르지. 여기 보면 출력을 조절할 수도 있어서…….”
카트린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활기차게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연금술탑의 지원으로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무기가 완성되었다.
상석에 앉은 자히드라가 열변을 토하는 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옆에 붙박인 듯 서 있는 애브러햄에게 속삭였다.
“누가 알았겠나. 그저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던 카트린느에게 저런 재능이 숨겨져 있을 줄은……. 하마터면 훌륭한 인재를 카리바나 왕국에게 빼앗길 뻔했군. 그녀의 신부대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지 않은가.”
카트린느는 신의 기사단에 대항할 무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쟁에 쓰일 무기도 개발하고 있었다.
자히드라는 어젯밤 카트린느가 가져온 청사진을 떠올렸다.
스스로 움직이는 전차라니.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카트린느는 그 엄청난 발상을 실현케 할 능력도 있었다.
애브러햄 또한 카트린느의 행보에 놀라고 있었다.
여느 황녀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같이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우고 있었다.
황녀가 결혼하지 않고도 자히드라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애브러햄 또한 자히드라 못지않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피를 이었으니 특출나신 게 당연합니다.”
“그러한가. 하하하!”
자히드라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저희 빼고 벌써부터 재미난 걸 시작하신 모양인가 봅니다.”
율리안이 레베카를 에스코트하며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공작 부부를 향했다.
카트린느가 반색하며 레베카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레베카님! 발명품이 드디어 완성됐어요. 모두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답니다.”
“화, 황녀께서 존대를?”
첼스턴이 깜짝 놀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카트린느와 레베카를 번갈아 봤다.
로탄더스의 황족은 나이의 고하와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도 존칭을 쓸 필요가 없었다.
황족이 다른 이에게 존칭을 쓴다는 건 상대방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카트린느가 레베카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과 달리 황녀는 율리안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율리안을 사이에 두고 레베카와 카트린느가 신경전을 벌일 거라 내심 걱정했던 게 무안할 정도였다.
“다들 모이셨군요. 이렇게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가 궁금하시겠지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듯 레베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미소에 사람들이 주춤주춤 제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자 율리안과 레베카도 의자에 착석했다.
레베카가 발언에 대한 허락을 구하듯 자히드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허락의 의미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윽고 레베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