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그동안 여러분께서 많은 일을 해주신 덕에 신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할 때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테레사가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레베카 대신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은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지금부터는 다소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였다.
때문에 레베카보다는 신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율리안이 말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여러분께서 알아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혹, 지혜의 불에 대해 아십니까?”
“지혜의 불이라면 과거 카디르교의 상징 아닙니까.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전설의…….”
“예. 맞습니다. 만약 그 지혜의 불이 실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불이 아니라 불사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일순 소란이 일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율리안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아시는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데프리아교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내려오던 빛의 장미라는 장로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데프리아교의 존속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한 가문을 무너뜨릴 정도로 세력도 강합니다. 요하네스 가문을 여태껏 뒤에서 조종하던 세력이기도 하죠. 숨겨진 실세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세라니! 지금 폐하를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애브러햄이 질색하며 소리쳤다. 자히드라도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율리안이 그대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당연히 제국의 실세는 명실상부 황제 폐하시지요. 오해하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그들은 음지의 실세입니다. 그들의 악행을 들으신다면 폐하께서도 제 불손한 발언에 수긍하실 겁니다.”
그의 말에 자히드라가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런 괘씸한 집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껏 모른 척 해왔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공작들과 달리 신전에 적대적이었죠. 일찌감치 절 쥐락펴락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제게 정체를 숨겼습니다. 제가 그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자히드라는 아직까지도 의심을 풀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의 흉흉한 눈초리에도 율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눈빛을 보아하니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곧이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빛의 장미에 대한 정보와 데본셔가의 감옥 섬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냈다.
그는 그 증거로 인질들이 보내온 서신을 내놓았다.
사위가 경악에 사로잡혔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제플린 데본셔…… 천사 같은 얼굴과 달리 아주 악마 같은 자였군요!”
귀족들은 대부분 제플린의 납치 행각에 분노를 토해냈다.
시뻘게진 얼굴로 고성방가를 해대는 신귀족들과 달리 신학자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살바도르가 무겁게 내려앉은 어투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말 공작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카디르교가 사실은 사이비가 아니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리고 데프리아교가 그들을 처단한 건 사특한 무리를 제국에서 몰아낸 것이 아니라 이권 쟁탈을 위한 종교 박해였단 의미도 되겠네요.”
얼음물을 끼얹은 듯 좌중이 조용해졌다.
율리안이 진지하게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거사를 치르기 전에 여러분들의 의사를 묻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혜의 불을 현 신전을 끌어내릴 계책으로 쓰고자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데프리아교의 평판 또한 바닥을 치겠지요.”
율리안은 잠시 물로 입을 축였다.
다들 그의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대신 새로운 시작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카디르 신의 존재가 곧 데프리아 여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카디르교에 지혜의 불이 있듯이, 데프리아교에는 실존하는 신의 사자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공존을 제안합니다.”
“공존이라!”
잠자코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자히드라가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율리안은 지금 국교를 폐지하고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국교는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종교란 명분을 내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황제의 입장에선 득보다는 실이 좀 더 컸다. 국민의 신앙심을 등에 업은 신전은 언제나 황권을 위협했다.
신 데프리아교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의 사후에 신 데프리아교가 황권을 흔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럴 바엔 애초에 분열을 시켜버리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왜 처음부터 그 생각을 못했을까.’
물론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제국민이 외면했던 카디르교를 인정하고 데프리아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건 적잖은 반발이 일어날 테였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는 처음부터 종교 개혁을 쉽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면 그 결과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게 옳았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또다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그들의 토론을 묵묵히 엿들으며 침묵을 지키던 자히드라가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하지만 말일세…….”
자히드라의 얼굴에 만연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은 아주 좋은 생각 같군. 썩은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선 주변의 흙부터 파헤쳐야 하는 법이지. 애초에 신 데프리아교의 취지 자체가 데프리아교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자는 게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데프리아교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것 또한 그 연장이 아니겠나.”
자히드라가 은근하게 신학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귀족들이야 구귀족의 근간인 데프리아교가 무너지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제플린의 극악무도한 짓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달랐다.
그들의 대표인 살바도르가 천천히 답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좀 더 이야기해보고 결정해야겠습니다.”
자히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그의 말에 신학자들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곧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자히드라가 그들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고 눈을 돌렸다.
“하지만 거사와는 별개로 감옥 섬에 갇힌 내 백성들은 꼭 구해내야겠네. 납치와 감금이라니! 이에 대해서도 자네들에게 방도가 있겠지? 황실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
이번엔 레베카가 입을 열 차례였다.
“감옥 섬은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발해 몇 날 며칠을 달리고도 배로 이틀은 더 가야 그곳에 당도할 수 있죠. 다행히도 그곳에 리조트가 있기에 가는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래, 그 크라운 리조트에 대해선 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먼 길을 달려가도 아쉽지 않을 만큼 경관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군.”
“예. 유감스럽게도 가는 길이 멀기에 아주 은밀히 움직여야 합니다. 때문에 눈에 띄는 황실 기사단을 움직였다간 제플린이나 빛의 장미가 눈치를 채고 인질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혹시 여러분 중에서 남부에 무역선이나 여객선을 소유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첼스턴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게 여객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 목적이 아니라서 규모가 작습니다만…….”
다른 귀족들 몇몇도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첼스턴처럼 단순히 개인적인 관광 용도의 배를 가지고 있었다.
첼스턴이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무역이나 여객선 사업은 데본셔 백작가에서 꽉 잡고 있던 터라 녹록하지 않군요. 그쪽에 스파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힘들겠어요.”
첼스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레베카가 빙긋이 웃었다.
“있습니다. 스파이.”
“예?”
“파블로 자작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데본셔가의 와인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설마! 자작을 매수하신 겁니까?”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쉽게 풀리겠군요. 와인 사업에는 수송선이 필수이니 그는 다량의 배를 보유하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크라운 리조트에 들어가는 수송선에 은밀히 사람을 태워 보낼 수 있겠군요.”
“정답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여러분의 배도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황실 해군을 근거리에 위치하도록 해주십시오. 대략적인 경비 인력은 파악해 두었으나 저희가 모르는 복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히드라가 애브러햄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주억거렸다.
“알겠네. 이맘때쯤 해군이 동계 훈련을 하지. 그 섬에서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훈련을 하라 이르겠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거사일은 언제쯤이 좋겠는가.”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리안이 의자를 바로 고쳐 앉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일단 탄생절 다음 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유가 무엇인가.”
“탄생절과 그 전주에는 대신전이 있는 수도로 모두가 모여들지요. 비수기에 낯선 여객선이 주위를 맴돌면 의심을 살 겁니다. 대신 탄생절이 끝난 다음 주부터는 추운 날씨를 피해 따뜻한 남부로 사람들이 모여들겠지요.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수송선도 바삐 움직일 테고요.”
“공의 말대로 아주 적절한 시기 같군.”
“그리고…….”
율리안은 구석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학자 무리를 흘깃 보며 말했다.
“신전에서 제게 탄생절 연설을 부탁하더군요. 그때 이런 말을 할까 합니다.”
“뭔가?”
“붉은 선을 넘어라.”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자히드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아. 아주 뜻깊은 말이군. 국민들이 좋아하겠어.”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었는지 살바도르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동료들과 눈짓을 주고받다가 말했다.
“동참하겠습니다. 신앙도 누군가에겐 일종의 쾌락일 수 있겠지요. 저희는 그것 또한 모두가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결론이 났군.”
자히드라가 찻잔을 축배처럼 들어 올렸다.
“그럼 앞날에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함께 하기를!”
희망찬 함성에 율리안과 레베카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테이블 밑에서 줄곧 손을 맞잡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더욱더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