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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95화 (195/232)

195.

어느덧 초겨울이 지나 사람들의 옷이 점점 두꺼워졌다. 그리고 탄생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제국은 탄생절을 준비하는 손길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에는 데프리아 여신을 찬양하는 흥겨운 송가가 울려 퍼졌다.

상인들은 대목을 잡을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가게의 간판이나 천막에 형형색색의 가랜드를 걸었다.

가로수에 내걸린 유리 장미들은 햇빛에 쉴 새 없이 반짝였고, 집집마다 정원을 특색 있는 주사위로 아름답게 꾸몄다.

공작 성 또한 이런 활기찬 분위기에 물들었다.

연금술사들이 빛의 마석을 손수 깎아 값비싼 장식품을 선물했다. 덕분에 공작 성의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빛으로 가득했다.

특히 올해는 릴리가 가장 신이 났다.

“우와! 이게 다 내 거야?”

율리안이 릴리를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시킨 이후 사교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숨겨뒀던 요하네스 공작의 여동생에게 다들 줄을 서고 싶어 안달이 났다.

특히 또래의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벌써부터 약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이도 있었다.

릴리 또래 아이들이 여는 티파티 초대장도 심심찮게 날아들었다.

레베카가 그중에서 몇몇을 신중히 골라 릴리에게 소개해주었지만 릴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활발한 그녀의 성격을 감당할 만한 귀족 아이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릴리는 자발적으로 모든 사교계 활동을 거절했다.

차나 마시며 재미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연무장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그 탓에 릴리와 연을 이을 구실이 없어진 귀족들은 탄생절을 맞아 희귀한 장난감들을 공작 성으로 보냈다.

매일 아침 새로운 선물이 머리맡에 놓여 있는 걸 보고 릴리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여신님의 생일이 아니라 꼭 내 생일 같아!”

그녀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고용인들의 얼굴에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공작 성의 모두가 즐겁게 탄생절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직도 나오지 않은 건가?”

“네……. 벌써 두 시간이 넘었습니다. 방금은 뭔가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도 났다고요! 큰일이 난 건 아니겠지요?”

칸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이 주가 지났다.

레베카는 심장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울진 않았지만 그게 더 나빴다.

그녀가 방 안에 박혀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레베카! 레베카!”

율리안이 욕실 문을 두들겼으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고리는 덜컹거렸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다.

“어떡해요!”

하녀가 발을 동동 굴리자 율리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열쇠는?”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사안의 심각성에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녀가 욕실 열쇠를 가지고 왔다.

열쇠를 받아든 율리안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지금부턴 나 혼자 들어가지.”

쾅하고 문이 닫혔다.

* * *

칸나가 사라졌다.

원래의 레베카라면 무슨 짓을 해서든지 그녀를 되찾을 방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칸나의 실종은 큰 충격이었다. 레베카는 칸나가 사라진 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칸나는 그녀가 회귀한 뒤로 온전한 편이 되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조건 없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도와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제 손으로 사지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쁜 습관이라 봉인해두었던 자책이 레베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인 걸 알았으면서 왜 네가 직접 하지 않았지?’

도움을 받는 게 익숙해진 탓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복수였다.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을 속여내서 받은 도움을 당연하게 여겼다니.

‘칸나는 강한 사람이니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

레베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가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칸나의 다정한 손길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활짝 웃던 미소가 가슴을 난도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안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고지가 코앞이었는데도 레베카는 두려웠다.

칸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치고 피를 흘리고 결국엔 자신을 미워할 것만 같았다.

‘이기적인 것…….’

레베카는 장식용 돌을 들어 커다란 욕실 거울에 집어 던졌다.

산산이 조각난 거울 위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렵사리 얻은 애정과 믿음.

상대방이 얻을 상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전 생처럼 혼자가 될까 봐 떨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레베카는 멍하니 욕조로 향했다.

깨진 거울 조각이 맨발에 박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뜨거운 물 속에 흐느적거리는 몸을 뉘었다. 발바닥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물 위에 떠올랐다.

초점을 잃은 레베카의 눈이 시린 달빛을 좇았다.

저 달을 칸나도 보고 있을까.

상념에 잠식당한 레베카는 물속으로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 * *

욕실 안에 서린 자욱한 수증기에 율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수증기를 손을 헤쳐내자 욕조 안에 늘어져 있는 레베카가 보였다.

“레베카.”

그의 부름에도 레베카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욕실 안에 난 큰 창으로 어두운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율리안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옷가지를 훌훌 벗었다. 금세 그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는 찰박거리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욕조는 몇 명이나 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욕조의 모서리에 팔을 올려둔 레베카의 옆에 바투 붙었다.

그가 레베카를 껴안으며 말했다.

“이제 완전한 겨울이야. 어제 연금술탑에서 장식품을 보내왔는데 아주 예쁘더군. 릴리가 신이 나서 정원을 꾸몄어. 당신도 봤으면 좋을 텐데.”

“…….”

율리안은 레베카의 뽀얀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은은한 향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탄생절 케이크는 어떤 게 좋겠어? 당신이 좋아하는 사과잼을 올린 걸로 할까?”

상황을 벗어난 그의 질문이 이어지자 레베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천천히 율리안을 돌아봤다.

율리안이 눈을 사르르 접어 보이며 말했다.

“드디어 돌아봤군.”

율리안이 곧장 손을 뻗어 레베카의 턱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의외로 레베카는 반항도 없이 순순히 그를 받아들였다. 물기 젖은 입술이 서로를 열렬히 탐닉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졌다. 넓은 욕실 안에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맞붙은 살갗의 물기가 찰박거리며 부딪혔다. 뜨거운 목욕물보다 체온이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의 열기는 얼어붙은 레베카의 마음을 녹였다.

“흑…….”

곧이어 레베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율리안은 예상한 눈물인 듯 입을 떼고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래, 그래. 울어버려. 레베카.”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베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차 고조될수록 율리안의 심장이 쑤시듯이 아파왔다.

‘빌어먹을…….’

그도 레베카와 같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어야 했다. 칸나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레베카가 아픈 게 꼭 제 탓 같아 율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레베카의 성대가 폭풍을 만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칸나가, 나 때문에 실종됐어. 칸나가 몹쓸 짓을 당했더라면 어떡하지?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해서…….”

율리안의 목에 얼굴을 묻고서 레베카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율리안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레베카의 어깨를 문질렀다.

“만약…… 사라진 게 당신이었다면 칸나는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칸나라면…….”

숨을 잠시 집어삼킨 레베카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를 찾으러 왔겠지. 울면서 나를 구하러 왔을 거야.”

“왜 그렇게 할 거라 생각해?”

“칸나는 나를 좋아하니까.”

“당신은 칸나를 좋아하지 않아?”

“당연히 좋아하지!”

레베카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방울이 후드득 턱선 아래로 떨어졌다.

율리안이 이마에 달라붙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럼 당신도 칸나를 구하러 가야지. 여기서 이렇게 늘어져 있을 게 아니라.”

레베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침묵 대신 율리안이 입술을 열었다.

“이러는 거 당신답지 않아. 내가 아는 레베카는 이 제국을 부숴버리는 한이 있어도 칸나를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율리안이 싱긋 웃었다.

그는 제 가슴팍에 레베카의 머리를 누이곤 말했다.

“내가 당신과 함께 할게. 실력 좋은 탐정들을 보내놨어.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내일 탄생절 행사가 끝나면 같이 찾으러 나가자.”

이윽고 율리안의 시선이 레베카의 발끝에 맞닿았다. 선혈이 희미하게 물 위로 번지고 있었다.

율리안이 인상을 쓰며 상처를 살피더니 레베카를 번쩍 들어 욕조에서 벗어났다.

레베카가 깜짝 놀라 발을 버둥거렸지만 율리안의 단단한 팔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다친 채로 욕조 안에 있었던 거야? 안 되겠어. 이제 목욕도 매일 나랑 같이해.”

“그, 그게 무슨……. 이거 놔! 혼자 걸어갈 수 있어.”

“그렇게 고집 부려도 소용없어. 내가 지금 그 꼴을 못 봐주겠거든. 분명히 아픈데도 꾹 참고 걸어갈 거잖아.”

율리안의 단호한 대답에 레베카는 그의 흉부를 퍽퍽 때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발바닥이 점점 쓰라려 왔다.

율리안은 레베카를 의자 위에 조심스레 앉혔다. 그리고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그녀를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마치 아기처럼 자신을 돌보는 손길에 레베카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그녀는 율리안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율리안은 엄한 얼굴로 수건을 내어주지 않았다.

“당신, 지금 아파.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결국 레베카는 반쯤 포기하고 그에게 제 몸을 내맡겼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완벽하게 닦은 그는 새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꾹꾹 눌러 닦았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레베카. 당신 탓이 아니야.”

“…….”

“칸나가 그렇게 된 건 그녀를 납치한 빌어먹을 놈의 잘못이지 당신 탓이 아니야. 이건 칸나가 당신을 위해 한 일이었어. 그녀의 충정을 자책 따위로 왜곡하지 마.”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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