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96화 (196/232)

196.

레베카의 흔들리는 눈망울을 뒤로하고 율리안은 가운을 가져와 그녀에게 입혀주었다.

가운의 리본을 단단히 맨 율리안은 그녀의 발을 들어 상처를 살폈다.

“당신이 이렇게 아프면 칸나가 좋아하겠어? 그러니까 당신은 칸나를 되찾는 데 최선을 다하면 돼.”

“당신이 칸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 알아.”

“내가 칸나라면 그랬을 거니까. 설사 내가 고문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걱정하고 있을 당신이 더 신경 쓰였을 거니까.”

레베카는 놀란 눈으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의 고요한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물기 젖은 속눈썹 아래에서 새까만 눈동자가 다정하게 반짝였다.

순간 힘없이 늘어져 있던 레베카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이 옳았다.

자책하고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칸나를 구할 방도를 찾는 게 맞았다.

“내 아내가 다쳤으니 침실로 의사를 불러오도록 해.”

율리안이 레베카를 안아 든 채로 욕실을 나서며 하녀에게 말했다.

하녀는 아슬아슬하게 가운만 걸친 레베카와 젖은 셔츠 안으로 훤히 보이는 율리안의 살갗을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빠르게 주치의가 묵는 방으로 달려갔다.

물에 젖은 셔츠가 그의 흉부에 딱 달라붙어 가슴이 도드라졌다.

레베카는 가만히 그곳에 머리를 기대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위로하듯이 고동쳤다.

* * *

지하로 내려간 안톤은 투박한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문도 시계도 없는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사면이 새하얀 방 안에는 흰색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과 맞닿은 벽에는 구름에 휩싸인 데프리아 여신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안톤은 의자에 묶인 여자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여신의 초상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엄숙하게 성호를 긋고선 힘없이 늘어져 있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여신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칸나?”

칸나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버석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신께서 내 주인을 제대로 섬기라고 하시더군. 레베카 님을 말이야.”

칸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소를 흘렸다. 퀭한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안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독한…….”

“내가 죽을 때까지 이 빌어먹을 곳에 가둬도 내 충심은 변하지 않아.”

제가 입은 하얀 원피스만큼이나 레베카를 향한 칸나의 충정은 깨끗했다.

안톤은 당황함을 감추려는 듯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태껏 많은 이들을 세뇌해봤지만 이렇게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안톤이 고안한 하얀 방에 사흘만 가둬둬도 환청을 들었다.

일주일이 되는 날에는 여신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여신의 목소리인 척 갇힌 사람에게 한 달간 계시를 속닥거리면 누구나 여신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는 신의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입단 의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안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뇌하는 걸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칸나라는 여인은 달랐다.

그녀의 눈은 풀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에 불타오르는 악의적인 눈빛을 보여줬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이 정도의 정신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래봤자 너도 한낱 인간에 불과해.’

안톤은 세뇌의 강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도전 의식까지 생겼다. 이 여자를 굴복시켜서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칸나를 응시하다가 문을 나섰다.

“안톤!”

문밖에서 랭스터 후작이 그를 불렀다. 안톤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의 등장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결과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여자가 넘어왔나?”

“아직.”

“이거 낭패로군. 강철로 만든 정신력인가? 이제 거사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릴리를 잡아 왔을 때 저 여자가 필요하단 말이다.”

“걱정하지 말게. 저 여잔 지금 많이 지쳤어. 조만간 넘어올 것 같아.”

“어쨌든 최선을 다해주게. 그 아이를 고분고분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려면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필요하니까. 하루빨리 칸나라는 여자가 릴리의 교육을 맡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나도 잘 알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그나저나 이고르는 좀 어때?”

“잘 회복하고 있지. 벌써부터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걸 애써 달래고 있어.”

“이성을 잃고 날뛰다가 무슨 꼴이 났는지 자각이 없는 건가? 내가 뭐랬어? 그가 언젠가 일을 그르칠 것 같다고 했었지? 이고르의 자격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고민해 봐야겠군.”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칸나가 눈을 번쩍 떴다.

‘릴리 아가씨라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신체적 고문도 가하지 않았다. 형편없긴 해도 식사와 물도 꼬박꼬박 나왔다.

하지만 칸나는 차라리 고문을 받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긴 지옥이었다.

하루가 지났는지 한 달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루는 저 빌어먹을 초상화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온 적이 있었다.

레베카를 떠올리며 겨우 환청을 쫓아냈지만 또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몰랐다.

점점 버티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레베카 님께서 걱정하고 계실 텐데…….’

상냥한 레베카는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괴로워할 그녀를 상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반드시 여기를 탈출해야 해.’

칸나는 손목을 거칠게 돌렸다. 하지만 밧줄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절망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절망이 커질수록 저 초상화 속의 여신에게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칸나는 무너지려는 제 마음을 부정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 * *

“너무 예쁘다! 베키! 저기 나무 좀 봐!”

“그래. 정말 예쁘긴 한데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내 손 꼭 잡아야 해.”

레베카는 금방이라도 인파 속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릴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릴리는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베카의 품속에 폭하고 안겼다.

“알겠어. 그나저나 베키, 오늘따라 정말 예뻐.”

릴리가 레베카의 옷차림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레베카는 하늘색 원단이 꽃잎처럼 흘러내리는 드레스 위에 눈처럼 새하얀 양털 케이프를 입고 있었다.

겨울 요정 같은 그녀의 모습은 탄생절의 거리 풍경과 잘 어울렸다.

레베카는 릴리의 칭찬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레베카는 칸나의 일로 우울한 와중에도 릴리 앞에서만큼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불안해 하는 아이였다. 자신이 슬픈 걸 알면 이 상냥한 소녀는 똑같이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레베카는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칸나는 짧은 여행을 간 걸로 입을 맞춰뒀다. 크로아가 임무 수행을 위해 종종 성을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았기에 릴리는 쉽게 수긍했다.

모두의 이런 노력 덕분에 릴리는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탄생절을 즐길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군. 줄이 너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어.”

율리안이 양손에 축제 음식을 한가득 들고서 다가왔다.

크로아와 수행원들이 대신 하겠다고 우겼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가족끼리 보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덕에 율리안의 연설이 있을 때까지 크로아는 오랜만에 자유 시간을 얻었다.

“그거 뭐야?”

릴리의 시선이 율리안이 손에 든 과일꼬치에 붙박였다.

“아. 이거…….”

그는 릴리가 좋아할 줄 알았다는 듯 새빨간 딸기에 설탕물을 바른 꼬치를 내밀었다.

단단하게 굳은 설탕물이 햇살에 반짝여서 꼭 붉은 보석처럼 보였다.

릴리는 입가에 만연한 웃음을 머금은 채 과일꼬치를 요리조리 돌려봤다.

“반짝반짝거려!”

“단 걸 안 좋아하는 너도 이건 좋아할 거야. 과일 맛이 그대로 나거든.”

“고마워. 오빠!”

릴리가 헤실거리며 먹기 아까운 듯 조심스럽게 딸기 하나를 베어 물었다.

와드득 소리와 함께 바삭한 설탕 조각이 이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새콤한 딸기가 입 안 가득히 들어왔다.

“엄청 맛있어!”

성안에 있는 동안 길거리 음식을 접한 적이 없던 릴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열심히 꼬치를 먹는 릴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율리안이 레베카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건 당신 거.”

“어머.”

율리안이 과장된 몸짓으로 레베카에게 설탕 장미를 내밀었다.

레베카는 그의 손에서 장미를 받아 들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꽃잎이 아름다웠다.

미세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입매가 조금씩 풀어졌다.

율리안은 릴리와 레베카가 즐거워하는 걸 확인한 뒤 주변을 살펴봤다.

“저기가 좋겠군.”

율리안은 두 사람을 노점상으로 이끌었다.

음료를 판매하는 노점상에는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 뜨거운 우유 한 잔과 데운 와인 두 잔.”

“조금 있으면 연설이 있을 건데 술을 마시려고?”

테이블 위로 축제 음식을 늘어놓는 율리안을 레베카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한 잔 정도는 괜찮아. 오히려 긴장을 풀어줘서 더 좋지.”

곧이어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율리안이 싸들고 온 음식들은 아직까지도 따끈따끈했다.

레베카는 계피 향이 나는 뜨끈한 와인을 홀짝였다.

“든든하게 먹어 둬야 돌아다닐 힘이 나지. 안 그래?”

그는 닭 통구이의 다리를 잘라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마치 칸나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한 레베카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며 그가 내민 닭다리를 받아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새우구이부터 시작해서 따뜻한 버섯 수프와 탄생절에만 맛볼 수 있는 디저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떻게 이 모든 걸 혼자서 들고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느무 므있어.”

릴리가 입 안에 왕창 음식을 넣은 채로 우물거리며 말했다. 릴리는 신나게 음식을 쑤셔 넣으며 주변을 흘깃 살펴보았다.

자신처럼 가족들과 함께 축제 구경을 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제 또래 아이들을 훔쳐보며 릴리는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켰다.

“입가에 다 묻혔잖니.”

레베카가 릴리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줬다.

“뭐. 아직까진 덤벙거려도 괜찮잖아. 어릴 때의 특권이니.”

율리안도 상냥하게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