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릴리는 이 순간 주변의 여느 가족들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모와 아이라는 평범한 관계가 아니어도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는 행복했다.
그리고 이 행복은 한 사람이 가져다준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릴리가 레베카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베키가 정말 좋아!”
레베카는 순간 당황했지만 뺨이 상기된 채 활짝 웃는 릴리의 얼굴을 마주하자 자신도 웃고 말았다.
릴리는 율리안을 돌아보고 똑같이 말했다.
“오빠도 정말 좋아! 이제 그렇게 안 미워.”
율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율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도 네가 좋아. 릴리.”
귀족들을 위한 조용한 라운지가 아니라 길거리에 나오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숨 막히는 곳에 있었으면 릴리가 이렇게 해맑게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거리를 쏘다니며 축제를 마음껏 즐겼다.
인형극을 관람하고 화려한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다트 던지기에서 율리안이 커다란 곰 인형을 따내자 릴리는 율리안을 세게 끌어안았다.
축제 속에서 레베카도 시름을 차츰 잊어갔다.
머릿속으로는 칸나의 행적을 찾을 방도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만큼 절망적인 기분은 들지 않았다.
* * *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데본셔가의 화려한 마차가 들어섰다.
마차 문을 열자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알리시아가 베이츠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섰다.
제플린이 평소보다 한층 더 키가 커 보이는 알리시아를 탐욕스럽게 훑으며 말했다.
“몰라보겠군. 평소에도 그렇게 다니지 그랬어. 그럼 내가 더 아껴줬을 텐데.”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제플린을 노려봤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할 수 있겠지?”
“걱정 마세요. 제 밥값은 할 테니까.”
제플린이 비웃음인지 신뢰의 의미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가 손을 휘휘 내젓자 베이츠가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차가 인파를 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이츠는 마차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에 든 양털 케이프를 알리시아의 어깨에 걸쳐주며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실 수 있습니다.”
케이프를 여미던 알리시아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뭇거림이 떠올랐다. 하지만 축제의 떠들썩한 노랫소리에 망설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이런 날 지켜 줄 거죠?”
확답을 구하듯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려 베이츠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야는 검은 커튼이 쳐져 있듯이 좁아져 있었다. 안약의 부작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좁아진 알리시아의 시야 사이로 베이츠의 굳건한 눈매가 들어왔다.
베이츠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제 주인이시니까요.”
알리시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다.
그녀는 베이츠의 팔을 잡고 어두운 골목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생기가 가득한 축제가 열리는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 * *
“여기도 사람이 정말 많네.”
수많은 귀족에게 둘러싸인 게 불편한 듯 레베카의 무릎 위에서 릴리가 속닥거렸다.
“그렇게 조용히 말하지 않아도 돼. 릴리.”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무서운걸.”
릴리의 말대로 길거리의 사람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대부분 엄숙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율리안이 연설을 준비하는 동안 레베카와 릴리는 연단 바로 아래에 위치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연설자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특등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였다.
사람들은 교황의 탄생절 설교에는 축복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도의 대광장은 매년 직접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자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신전은 귀빈들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을 반으로 갈라 붉은 줄로 엄격하게 구분했다.
붉은 줄 안에는 불의 마석으로 만든 따뜻한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탄생절날 많은 헌금을 기꺼이 낼 수 있는 귀족들이었다.
붉은 줄을 지키는 신의 기사단은 귀빈들의 안위만 살폈다. 그들은 붉은 줄 바깥에서 누가 깔려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흘깃 뒤를 돌아봤다.
나무 위에 사람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부랑자 차림의 어린아이들이었다.
평등한 쾌락을 추구하는 데프리아교의 교리와 사뭇 거리가 먼 풍경에 레베카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달갑지 않은 수군거림이 귀를 파고들었다.
“저 아이가 요하네스 공작의 여동생이요?”
“그런가 봐요. 그런데 하나도 닮지 않았네요. 저 기품 없는 분홍색 머리 좀 보세요.”
“무슨 하자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공작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숨겨뒀을 리가 있겠어요?”
귀가 밝은 릴리는 저를 두고 한 대화를 다 들었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자신의 분홍색 머리칼을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레베카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들을 노려봤다.
서리가 내린 듯한 그녀의 매서운 눈길에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레베카가 집요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칼을 날리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를 피했다.
레베카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율리안이 있었다면 오늘 저들의 이가 몇 개는 부러졌을 것이었다.
그녀는 시무룩한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릴리, 세상에는 못된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나도 살면서 욕을 많이 들었어.”
“정말?”
릴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사 같은 레베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럼. 저런 사람들은 99개의 좋은 점보다 1개의 나쁜 점을 찾아내서 깎아내리려고 해. 왜냐하면 자신들이 잘난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잘난 사람들을 자신처럼 못나게 만들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든.”
“못난 사람들이네!”
“그래. 그러니까 우리 릴리는 누가 뭐라든지 주눅들 것 없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리고 가족은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가족인 거야.”
어두웠던 릴리의 얼굴이 금방 폈다.
레베카는 릴리의 분홍색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넌 율리안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야.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릴리이고. 내 가족이야.”
릴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레베카의 코에 자신의 코를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이 서로 사이좋게 코를 비비고 있을 때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당신은 딸이 잘 어울려.”
제플린이었다.
레베카는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가는 레베카의 목덜미를 유심히 응시하던 릴리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레베카가 그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리, 릴리!”
릴리는 레베카를 향해 걸어오는 제플린의 앞을 막아섰다.
제플린은 제 명치보다 아래에 있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또 뭐지?”
“아저씨가 제플린 데본셔예요?”
“그렇다면?”
릴리는 귀동냥으로 제플린의 이름을 몇 번 들었다.
그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율리안은 이를 갈고 레베카는 몸서리쳤다.
릴리의 붉은 눈이 불타듯이 타올랐다.
“더 이상 공작 부인께 접근하지 마세요.”
제플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릴리를 노려봤다. 그러곤 협박하듯 읊조렸다.
“어디서 명령질이야. 난 내가 가고 싶은 곳엔 마음대로 갈 수 있어.”
“못할걸요?”
“글쎄. 과연 내가 못할까?”
제플린은 릴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뚜름하게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커, 커헉……!”
릴리가 재빠르게 제플린의 정강이를 세게 가격했다.
행동이 워낙 기민해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플린이 숨을 토해내며 정강이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릴리가 고개를 숙여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가족을 건드리면 다음엔 아저씨 목을 날려줄 거야.”
본능적으로 등골이 쭈뼛 설 정도로 음산한 겁박이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탈탈 털며 허리를 일으킨 릴리는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빛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백작 아저씨가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백작님!”
제플린의 수행원 몇 명이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제플린은 다시 레베카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가는 릴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제플린을 향해 자그마한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남매가 아주 쌍으로……!’
제플린은 이를 갈며 자신을 일으키는 수행원들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릴리는 제플린이 제 자리를 찾아 앉을 때까지 경계를 풀지 않고 그를 예의주시했다.
레베카가 그런 릴리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아주 겁도 없어.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난 강하니까. 베키를 괴롭힌 사람은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다부지게 앙다문 두 입술을 보던 레베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릴리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나도 그래. 널 아프게 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 *
탄생절 설교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매년 비슷한 내용을 늘어놓는 데도 사람들은 지루하지도 않은지 다들 눈을 빛내며 교황의 연설을 귀담아 들었다.
아이들만이 연신 하품을 해대며 부모를 조르고 있을 뿐이었다.
릴리도 지루했는지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놀았다.
“릴리, 이제 율리안 차례야.”
레베카의 말에 릴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율리안이 새하얀 정장을 입은 채로 성큼성큼 연단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걸음을 옮겼다.
율리안이 연단의 한가운데에 멈춰 서자 레오는 그 옆에 마련된 의자에 놓인 금색 쿠션 위로 폴짝 올라앉아 위엄을 뽐내었다.
“신의 사자시여!”
군중들이 레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훤칠한 율리안의 모습을 눈에 가득히 담았다.
그의 기다란 다리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끝이 났다.
한동안 몸을 태우지 않았는지 율리안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났다.
곳곳에서 탄식과 함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는 정말 신이 사랑하는 남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