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198화 (198/232)

198.

공식 석상에 선 율리안을 처음 본 릴리가 입을 헤 벌렸다.

“오빠 멋있다. 그치?”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릴리에게 레베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순간 연단 위에 선 율리안이 슬쩍 레베카를 향해 윙크를 보냈다.

그의 깜찍한 눈짓에 레베카의 가슴이 쿵쿵 두방망이질 쳤다. 저렇게 근사한 남자가 내 남자라니. 꿈결 같은 일이었다.

곧이어 율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대광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올해의 탄생절에는 여신님의 축복이 더더욱 넘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율리안은 처음엔 신전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그가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그를 유심히 쳐다보던 데스라치노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율리안이었다.

그는 연설문의 중간쯤을 읽었을 때 연설문을 손에 들고는 쫙 찢었다.

“하지만 이런 여상한 이야기는 앞서 교황께서 다 해주셨으니 저는 이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저!”

데스라치노가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율리안에겐 연설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단 아래에 있는 제플린을 노려봤다.

저 철없는 공작이 일을 치기 전에 얼른 처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제플린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턱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율리안은 연단 위에서 양팔을 활짝 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여신의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품으라는 것이지요.”

뜻밖의 건실한 말에 데스라치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교황의 곁에 앉은 자히드라가 웃음을 참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교황의 반응을 관찰했다.

“여신께서는 언제나 평등과 자유를 강조하셨지요. 여기 계신 여러분들에겐 여신께서 허락하신 자유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불온한 자들이 여신의 뜻을 곡해하고 훼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신전을 향해 하는 말인지 아니면 최근 들불처럼 번지는 ‘심판자’를 저격한 말인지 대상이 모호한 말이었다.

데스라치노의 인상이 점점 험악해졌다.

“부디 썩은 뿌리 같은 이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시길 이 자리를 빌어 간곡히 청합니다. 그리고…….”

율리안이 손을 튕겼다. 그의 말에 붉은 줄 뒤에 대기하고 있던 크로아가 가위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자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 경계를 싹둑 잘라버렸다.

기사들이 손쓸 틈도 없이 크로아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평생 넘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붉은 선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제 앞에서 사라진 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율리안이 외쳤다.

“지금부터 한 걸음만! 단 한 걸음만 내디뎌 보십시오. 용기 있는 그 발걸음을 여신께선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해 주실 겁니다.”

좌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의 기사를 포함한 군중들은 붉은 줄이 사라진 게 신전이 준비한 퍼포먼스인지, 아니면 율리안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건지 가늠할 수 없어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율리안의 신성한 미소가 그들의 판단을 이끌었다.

두 팔을 벌린 그의 뒤로 창백한 겨울 햇살이 후광처럼 비쳐들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선 레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건 결코 고양이가 지을 수 없는 미소였다. 마치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인자한 웃음이 그들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내, 내디뎠습니다!”

붉은 줄 뒤에 서 있던 사람이 폴짝 앞으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그 뒤를 이어 줄줄이 율리안의 말대로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모든 게 율리안의 독단적인 행동임을 알게 된 기사들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수많은 인파를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자유를 약속한 여신의 말을 믿고 견디는 자세. 그 믿음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이끌 겁니다. 용기를 내신 모든 분께 여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레베카는 뒤를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붉은 선 안에 있던 귀족들은 졸지에 평민들 사이에 섞여든 자신의 처지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평민들은 환희에 차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사라진 붉은 줄 안으로 들어온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된 씨앗이 드디어 싹을 틔웠다.

“푸하하! 웃기는군.”

열의에 찬 좌중의 환호 사이로 찬물을 끼얹는 듯한 조소가 날아들었다.

제플린이 크게 웃으며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불청객의 등장에도 아무도 그를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신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레베카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연단 위에 선 제플린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었다.

“저주받은 공작의 입에서 축복이란 말이 나오다니 아주 우습군.”

“뭐라고? 하. 여러분 드디어 데본셔 백작이 미쳤나 봅니다.”

율리안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플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율리안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미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알려주도록 하지.”

그는 레오의 목덜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레오의 하악질과 동시에 날카로운 단검이 레오의 심장을 관통했다.

“안 돼!”

순간 제플린의 목적을 알아차린 레베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꺄악! 신의 사자께서……!”

사방이 경악에 휩싸였다.

하지만 제플린인 단검을 빼냈을 때 레오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레베카는 당장이라도 율리안에게 달려갈 기세로 좌석을 박찼다. 하지만 기사 몇 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거 놔!”

레베카의 새된 목소리에 멀뚱히 신의 사자를 훑던 시선들이 곧이어 율리안을 향했다.

“이…… 개자식이…….”

놀랍게도 율리안의 하얀 셔츠 위로 서서히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율리안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플린이 레오와 단검을 내팽개치고서 크게 외쳤다.

“이걸 보십시오! 요하네스 공작은 신의 사자의 불운을 짊어지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이 저주받은 가문은 가증스럽게도 지금껏 여러분과 신전을 농락해 왔습니다! 자신들이 축복받은 것처럼 꾸며서 말이지요.”

삐-

레베카는 발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율리안의 핏방울을 보며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시끄러운 소란 사이로 레베카의 귀에 이명이 들려왔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그녀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제플린의 기고만장한 표정과 연단 아래로 떨어지는 피투성이의 율리안.

그의 몸이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와 릴리의 울음이 한데 섞여서 웅웅거렸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율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쓰러질 리가 없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율리안이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곧 축 늘어졌다.

그의 밑으로 피 웅덩이가 진득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숨을 멈추었다.

율리안이…… 죽은 건가? 그가 날 떠난다고……?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자 아득할 정도로 아픈 고통이 그녀의 심장을 찌르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오빠!”

멍하니 서 있던 레베카는 릴리의 울음 섞인 외침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곧이어 엄청난 소음이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쓰러진 요하네스 공작을 확인하러 수많은 인파가 앞으로 모여들었다.

기사들이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통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레베카는 얼른 릴리의 손을 잡고 율리안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다 쏟아지는 사람들 틈에서 그만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베키! 베키!”

인파에 휩쓸린 릴리가 저 멀리서 레베카의 이름을 외쳤다.

“릴리!”

릴리에게 당장 달려가려던 레베카는 쓰러진 율리안을 머뭇거리며 바라봤다.

“여긴 제게 맡기시고 얼른 아가씨를 찾으러 가세요!”

구원자처럼 사람들을 헤치고 크로아가 등장했다. 레베카가 그를 발견하고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신전도 한패인 게 분명해요. 서둘러 율리안을 공작 성으로 데려가 주세요.”

크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는 릴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한편, 제플린의 행태에 격노한 레오는 그를 죽이려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 위에 검은 연기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율리안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었다.

레오는 멈칫했다.

지금 신성력을 쓴다면 치명상을 입은 율리안은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분한 얼굴로 제플린을 노려봤다.

제플린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의 목덜미를 다시금 그러쥐었다.

“그럼 얌전히 저를 따라주시지요. 신의 사자님.”

그는 준비한 작은 철창 안에 레오를 집어넣었다.

질색한 기사들이 그에게 칼을 겨누었지만 제플린은 여유롭게 칼끝을 밀어냈다.

“이게 다 신의 사자를 보호하려는 걸세. 교황 성하께서도 가만히 있지 않으신가.”

기사단의 시선이 일제히 교황에게 쏠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데스라치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 이게 무슨…….”

데스라치노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플린은 율리안을 끌어내린다고 말만 했지 감히 신의 사자에게 손을 댄다는 계획을 사전에 일러주지 않았다.

철창 안에서 연신 하악질을 하는 레오가 보였다.

신의 사자의 분노를 보자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제플린이 저렇게 날뛰는 걸 보면 빛의 장미께서 허락하신 일이 틀림없었다.

데스라치노는 심호흡을 하며 제플린을 포박하려는 기사단에게 손을 내저었다.

사태를 관망하던 자히드라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서 데스라치노에게 말했다.

“침착한 대처를 보아하니 교황 성하께서도 이를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데스라치노는 황제의 살벌한 어투에 움찔하며 그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사내가 약점을 발견한 듯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제 적수를 보며 데스라치노는 서서히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처럼 처음 안 사실입니다. 요하네스 공작이 저주받은 공작이라니요!”

그는 배신감에 충격을 받은 연기까지 했다.

자히드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데스라치노는 보란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뭣들 하는가! 지금 당장 신전을 농락한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을 포박하라!”

하지만 크로아가 한발 더 빨랐다.

기사단이 부상당한 율리안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을 때 이미 율리안은 요하네스가의 마차에 올라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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