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레베카와 헤어진 릴리는 인산인해에 하염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에 체력을 단련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그들의 발에 짓밟혔을지도 몰랐다.
“레베카! 베키! 베키!”
레베카를 애타게 부르던 릴리의 손목을 누군가가 덥석 잡았다. 그러곤 그녀를 밖으로 빼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릴리는 순간 반항했으나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의 뒷모습을 알아보고 순순히 따라갔다.
벌꿀처럼 진한 금발 머리에 하늘색 드레스까지, 완벽한 레베카였다.
신장도 비슷했기에 릴리는 금세 마음을 놓고선 그녀와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베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오빠가 피를 흘리던데, 괜찮은 거야?”
하지만 레베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자 주변의 소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릴리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제 손목을 쥐고 있는 그녀는 평소의 레베카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릴리가 거세게 손을 뿌리치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당신, 누구야?”
정체불명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릴리는 순간 레베카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그만큼 그녀는 레베카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둥그런 눈매가 레베카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안녕하세요. 꼬마 아가씨.”
알리시아가 천천히 릴리에게 다가왔다.
릴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베키는 어디 있어?”
“글쎄요. 어디 있을까요? 지금부터 얌전히 저를 따라가시면 레베카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알리시아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릴리는 단번에 그녀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차렸다.
“거짓말! 순순히 따라간다고 해도 레베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잖아?”
“이런. 소문보다 훨씬 영리한 소녀였군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알리시아가 곤란하단 얼굴을 했다.
릴리는 빠르게 알리시아를 훑어내렸다. 그리고 무술과는 연관이 먼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발견하곤 쏜살같이 알리시아에게 달려들었다.
“레베카를 돌려줘!”
그러나 그녀의 단단한 주먹은 알리시아에게 닿지 못했다.
어느새 나타난 베이츠가 릴리의 목 뒤를 내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릴리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공포가 피어올랐다.
“이 아이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어……!”
베이츠도 놀란 눈을 하고서 기절한 릴리를 들쳐 멨다.
“아직 어리지만 실력이 엄청난 것 같군요. 정확하게 당신의 급소를 노렸습니다. 이 정도의 살기를 느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정말 소름 끼쳐! 요하네스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알리시아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연신 문질렀다.
그리고 베이츠가 준비된 마차에 릴리를 싣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를 죽이진 않겠지……?”
베이츠가 마차의 문을 닫고서 문을 툭툭 쳤다.
마차가 예정대로 무사히 출발한 걸 확인한 그가 무감하게 답했다.
“예. 정신적 고문을 하겠지만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고문이란 말에 알리시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베이츠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일말의 희망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알리시아는 그가 건네는 케이프를 거칠게 받아들며 앙칼지게 답했다.
“아니!”
하지만 단호한 대답과는 달리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알리시아는 피가 배어날 정도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 * *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을 추포하라. 그의 자세한 죄에 대해서는 훗날 심문으로 밝혀낼 것이다.>
신의 기사단에 유례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몇백 년 동안이나 요하네스가를 지켜오던 그들의 칼날이 요하네스가를 향했다.
믿을 수 없는 명이었으나 신의 기사들에게 생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신전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까지 율리안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무장을 한 채 요하네스 공작 성으로 향했다.
공작 성의 굳게 닫힌 철문이 보이자 백마를 탄 로이드가 앞장서서 외쳤다.
“요하네스 공작을 추포하라는 교황 성하의 명이시다! 요하네스 공작은 얌전히 나와 명을 받들라!”
끼이익-
그러자 거짓말처럼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
예상과는 달리 율리안은 명령을 순순히 따를 모양이었다.
내심 율리안과 유혈사태를 벌이고 싶지 않던 로이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대문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캬아악!
하지만 그들을 맞으러 나온 건 뜻밖의 복병이었다.
숲에서 수백, 아니 수천은 되어 보이는 고양이 무리가 예리한 발톱을 드러내며 기사단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자신을 여태껏 돌봐준 요하네스 공작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위협적으로 울어댔다.
자욱하게 퍼지는 날카로운 괴성에 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날뛰었다.
로이드는 말이 고양이를 짓밟을까 싶어 서둘러 진정시켰다.
모여든 고양이들이 대문을 경계선으로 삼아 기사단과 대치했다.
나무와 담장 위에 올라선 고양이 무리가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어, 어떡할까요?”
부하의 질문에 로이드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고양이들은 모두 신의 자식이었다. 신의 사자도 고양이의 모습으로 이 땅에 현신했다.
그런 상징과도 같은 존재를 해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선다면 임무 실패였다.
명령을 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레오와 닮은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까지 나타나자 로이드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사자와 같은 샛노란 세 쌍의 눈이 자신을 꿰뚫듯이 노려봤다.
레오와 오래 지내다 그의 신성력을 옮겨 받기라도 한 것일까.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에게선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로이드는 머뭇거리다가 질끈 눈을 감고 외쳤다.
“일단 철수한다!”
그의 말에 기사단이 일제히 말의 머리를 돌렸다.
로이드는 말을 몰며 흘깃 뒤를 돌아봤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공작 성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가시처럼 박혀 있던 율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다만 다음에는 무작정 상부의 명만 따르지 말고 생각이란 걸 해봤으면 좋겠군.’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고양이가 저렇게 보호하는 요하네스 공작이 정말 저주받은 공작이라고……?’
단단하게 세뇌된, 바위 같던 그의 머릿속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공작 성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릴리와 칸나의 행방이 묘연했고, 레오도 제플린의 손에 잡혀갔다. 그리고 율리안은 죄인이 되어 병석에 누워 있었다.
레베카는 불 꺼진 침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운 율리안을 바라봤다.
처음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의 감각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타고난 신성력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레베카는 또다시 울지 못했다.
견디지 못할 슬픔 앞에선 눈물샘도 막히는 법이었다.
“율리안, 미안해. 당신이 마음껏 울라고 했는데 또 눈물이 나오질 않아…….”
그녀는 커다란 율리안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맞댔다.
메마른 그녀의 입술 위로 여전한 그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레베카는 숨을 몰아쉬는 율리안을 고요하게 응시했다.
한순간에 소중한 사람들이 여럿 다쳤다.
하지만 이제 레베카는 그걸 제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레베카. 당신 탓이 아니야.’
율리안이 가르쳐줬다.
잔인한 운명의 농간은 제 탓이 아니라고.
그저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자책할 시간에 운명을 부수는 게 더 낫다고.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율리안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쳐들었다.
레베카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밝게 떠오른 달을 바라봤다.
얼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차가운 빛무리에 그녀는 잠시 넋을 잃었다.
앨리스가 자신을 배신한 그날 밤처럼 참으로 시린 달빛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랐다.
이 순간 레베카는 혼자였지만 그때와 같은 혼자가 아니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손을 놓고 그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코니 위에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굴러다녔다.
그 스산한 광경에 율리안을 찌르던 제플린의 흉흉한 표정이 떠올랐다.
투명한 창문 위로 그녀의 섬뜩한 눈동자가 비쳤다.
만약 제플린이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가 자신을 포기했더라면, 레베카는 지금의 생이 너무 행복해 복수를 단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플린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레베카를 욕망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을 황폐하게 했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이전 생과 같았다.
몇 번의 회귀를 거듭하더라도 그는 레베카의 삶을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였다.
“이제 죽여버려야지……. 그래, 그럴 때가 됐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책하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눈앞에 파멸만이 남아 있더라도 레베카는 두렵지 않았다.
* * *
릴리는 눈가리개를 한 채 기나긴 계단을 내려갔다. 두 손이 포박되어 있었지만 릴리는 떨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아이들을 납치하는 일은 번번이 있어 온 일이었다.
때문에 공작가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간단한 탈출 방법이나 납치당했을 때의 요령 따위를 배웠다.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정교사가 신신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겁니다.’
릴리는 다짐하듯이 똑같은 말을 수십 번이고 중얼거렸다.
‘오빠와 레베카가 반드시 날 구하러 올 거야.’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이 할 일은 목숨을 성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눈가리개가 벗겨지고 눈앞이 환해졌다. 크림색의 화려한 문이 릴리를 반겼다.
릴리는 자신을 데려온 사내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을 굽혀 릴리의 손에 묶은 밧줄을 풀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졌지만 릴리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사람을 찬찬히 관찰했다.
자신을 ‘안톤’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무척이나 평범했다.
뒤돌아서면 다시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희미한 선을 가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큰 눈망울에 번진 흐릿한 동공이 어딘가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은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했다.
“얌전하기도 하시지. 안에 들어가시면 반가운 이가 있을 겁니다.”
릴리는 깍듯한 태도의 이 남자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뭘지 곰곰이 생각했다.
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공작가를 향한 복수?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반기는 사람을 발견하자 그녀의 고민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칸나!”
릴리는 덫을 향해 돌진하는 토끼처럼 얼른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러곤 칸나의 품에 폭 안겼다.
“여행을 갔다고 들었는데, 칸나도 잡혀 온 거야?”
릴리가 안톤을 흘깃 보며 속삭였다. 칸나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전 잡혀 온 게 아니랍니다. 여신님께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어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