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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0화 (200/232)

200.

칸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릴리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자애롭게 웃고 있는 칸나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다소 딱딱했던 말투도 변해 있었다.

칸나가 그녀에게 팔을 벌렸다. 칸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름끼칠 만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이리로 오세요. 릴리 아가씨. 여신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내려주셨는지 알려드릴게요.”

“카, 칸나. 왜 그래?”

릴리가 기겁을 하며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안톤이 흡족하게 웃으면서 문밖으로 나가려는 릴리를 돌려세웠다.

“칸나가 아가씨를 잘 보살펴 줄 겁니다. 자, 예쁘게 방을 꾸며 뒀으니 구경하시지요.”

안톤이 등을 떠밀자 릴리는 어쩔 수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온통 핑크빛인 방 안은 기괴할 정도로 인형과 레이스, 리본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릴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칸나를 보고 솟아오르던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꾹꾹 눌러왔던 공포감이 익숙하지만 낯선 칸나에 모습에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릴리 아가씨.”

눈물을 슥슥 닦고 있는 릴리를 칸나가 안쓰럽게 불렀다.

평소와 비슷한 목소리에 릴리는 고개를 쳐들었다.

칸나는 방금 짓던 기묘한 미소와는 달리 정말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칸……!”

“쉬잇.”

칸나가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다댔다.

그녀는 릴리를 향해 걸어가더니 문을 향해 크게 외쳤다.

“걱정 마세요. 릴리 아가씨. 여기는 아주 즐거운 곳이랍니다. 여신님께서 주신 맛있는 간식과 이 어여쁜 인형들을 보십시오!”

그러곤 칸나는 문에 귀를 바짝 댔다.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안톤이 반대편에서 칸나와 똑같이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예, 예쁘긴 하네!”

릴리가 눈치껏 방울이 달린 인형을 흔들어댔다. 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이윽고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칸나는 얼른 달려가 릴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릴리가 꺼이꺼이 울었다.

“다행이야! 칸나가 이상하게 변한 게 아니라서!”

칸나는 릴리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선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손목에 밧줄이 스친 자국이 붉게 올라와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오신 겁니까?”

“레베카를 닮은 여자가 나를…….”

릴리의 말을 듣는 칸나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갔다.

* * *

“하아…….”

수행원의 보고를 듣는 크로아의 얼굴 위로 수심이 가득 드리워졌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림자기사단이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달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감옥 섬의 인질들을 구출하러 자리를 비웠다.

“용병이라도 써야 하나…….”

하지만 신전이 율리안을 저주받은 공작이라고 선언한 뒤로 공작가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돈을 많이 쥐여 준다면 선뜻 나설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자들은 대개 일처리를 잘 하지 못했다.

게다가 광신도들과 신의 기사단이 호시탐탐 공작 성을 노리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필사적으로 공작 성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고양이를 이용할 생각을 하시다니…….”

릴리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공작 성으로 들어오자마자 레베카는 고양이들을 입구로 모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단이 오면 대문을 열어줘요.’

‘예? 그랬다간 공작님을 그대로 갖다 바치는 꼴이 될 텐데요?’

‘고양이는 여신의 자식이에요. 기사단이나 광신도들이 쉽게 손을 대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들은 율리안을 무척 아끼잖아요.’

확실히 공작 성의 고양이들은 율리안에게 적대적인 인간과 우호적인 인간을 기가 막히게 구분했다.

고양이들 덕분에 침입자를 잡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레베카가 그 사실까지 꿰뚫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야.”

크로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기적을 일으킬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알고 있었다.

* * *

“자, 이걸 최대한 빨리 전해주렴.”

“예. 마님.”

크로아가 레베카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서신을 가득 담은 자루를 들고 가는 하인이 보였다.

하인은 크로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명을 수행하러 나섰다.

“저 서신들은 다 뭡니까?”

“아. 크로아. 어서 와요.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안심하라는 편지를 썼어요.”

“혹시 카트린느 황녀님 말씀이십니까?”

“네. 황녀님 말고도 카림 공작님, 연금술사들, 라본느 살롱의 식구들……. 타니샤와 콜린의 것도 있군요.”

이름을 찬찬히 되씹어보던 크로아가 눈을 반짝였다.

“잘된 일 아닙니까. 그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이 상황을 이겨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고양이 손도 빌리는 형편에…….”

“이 이상 그 누구도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쯤하도록 하죠. 외출해야 하니 다른 용건이 있다면 오후에 듣도록 하죠.”

단호하게 크로아의 말을 일축한 레베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아가 대번에 질색하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레베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뭐죠……?”

“이 시국에 외출이요? 부인께 무슨 일이 생기면 공작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 죽이고 다시 기절하실 거라고요! 정 가시겠다면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레베카는 고집스럽게 다문 크로아의 입을 응시했다.

문득 그를 간호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크로아는 언제나 저렇게 일자로 입술을 다물고 고집을 피우곤 했다.

그의 아집을 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크로아에게 약을 먹이느라 애썼던 때를 회상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는 수 없죠. 크로아를 설득할 시간이 없으니 같이 가요.”

레베카는 서둘러 케이프를 챙겨 입었다. 어제와 똑같은 옷차림에 크로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와 같은 옷이네요.”

“왜요? 별로인가요?”

“그럴 리가요. 부인께선 항상 아름다우시지만…….”

“사정을 들으면 이해하실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해드리도록 하죠.”

한시가 급한 일인 듯 레베카는 바삐 발을 움직였다. 크로아는 그런 레베카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부부 아니랄까 봐 설명을 자주 생략하는 것까지 율리안과 똑 닮은 그녀였다.

“수도의 대광장 근처로 가주세요.”

레베카는 크로아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서 크로아는 레베카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퍽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전에 없이 날이 서 있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그녀의 몸에서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레베카가 자신을 관찰하는 크로아의 시선을 알아채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제가 왜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서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가는 이유가 궁금하시겠죠. 전 이 모든 사건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따지자면 데본셔 저택으로 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데본셔 백작이 꾸민 일이 분명합니다.”

“아니요. 제플린은 아마 명령을 수행한 쪽일 거예요. 그는 무려 신의 사자를 공격했어요. 제플린 데본셔는 그런 위험한 일을 독단적으로 벌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에요. 사태를 수습할 능력도 없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놓아줬던 빛의 장미와 관련이 있겠죠. 그들을 잡으면 칸나와 릴리, 그리고 레오까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방도가 있으십니까? 어제 급하게 사람들을 풀어봤지만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크로아는 릴리가 납치범을 순순히 따라갔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그, 글쎄요. 확실히 아가씨는 성인 남성 몇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는 완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치사한 수를 썼다면…….”

“릴리가 사라진 건 인파 속이었어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이를 납치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크죠. 그러니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릴리를 유인했을 겁니다.”

“아가씨가 낯선 사람을 쉽게 따라갔을 리가 없을 건데요.”

“물론이죠. 그때 저는 수행원과 동행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릴리가 안심하고 따라갈 만한 인물은 저뿐이죠.”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레베카 님을 흉내 내서 릴리 아가씨를 데려갔단 말씀인가요?”

“정답이에요.”

잠시 후, 기세 좋게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외침에 레베카는 서둘러 크로아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대신전으로 향하지 않고 으슥한 골목길을 기웃거리기 바빴다.

“분명 한 명쯤은 있을 건데…….”

“누굴 찾으시는 겁니까?”

“거리의 아이들이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지만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그 아이들 말이에요.”

레베카는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던 허름한 행색의 아이들을 상기했다.

돈이 될 만한 게 없을까 하며, 신전의 설교보다는 사람들의 주머니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소란이 생긴 상황에서 누구보다 더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 그 아이들이 있을 만한 곳은 제가 잘 압니다. 겨울엔 아마 그곳에 모여 있을 겁니다.”

크로아가 안내한 곳은 하천이 흐르는 다리 밑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에 허름한 천막을 쳐두고 옹기종기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온갖 쓰레기들을 장작 삼아 피우는 탓에 악취와 연기가 심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저벅저벅 천막으로 향했다.

잘 차려입은 어른들의 등장에 아이들의 눈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들이 무슨 일이십니까?”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아이가 비아냥거리며 레베카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정체 모를 풀을 질겅거리며 레베카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이 건방진……!”

크로아가 위협하듯 눈을 부라렸지만 레베카가 그를 막아섰다.

“안녕하세요. 신사님. 전 레베카 오벨리아라고 해요. 여쭤볼 게 있어 찾아왔는데, 실례가 됐을까요?”

살며시 눈을 접는 레베카의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를 대우해주는 듯한 상냥한 어투에 소년의 반항적인 태도가 한층 누그러졌다.

소년은 얼굴을 붉힌 채 레베카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흘깃거렸다.

“크흠. 적당한 값만 치러준다면 실례될 것 없죠.”

그 말에 레베카가 돈주머니를 꺼내 들어 소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소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정도면 패거리를 한 달이나 넉넉하게 먹일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소년은 대번에 우호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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