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1화 (201/232)

201.

“어제 내 행적이 궁금해요.”

“예?”

“아.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따라 흉내 낸 여자 말이에요. 아마 이 옷과 똑같이 차려입고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었을 거예요.”

“위치는 어딘지 아세요?”

“정확한 건 모르지만 대광장에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졌을 거예요. 그리고 아이를 납치하려고 했으니 마차를 대고 있었겠죠. 아무런 인장이 없는 마차일 확률이 높아요.”

“아이를 납치해요? 이거 큰일이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소년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천막으로 가더니 이것저것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곧 도시 곳곳으로 아이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몇십 분 정도 지났을 때, 자그마한 소녀가 껑충거리며 뛰어왔다.

“대장! 까마귀가 알고 있대!”

“그래? 데리고 와.”

까마귀라 불리는, 검은 더벅머리를 한 소년이 쭈뼛쭈뼛 레베카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본 게 이 귀부인이 맞아?”

“어. 확실해. 너무 예뻐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여자애 손을 잡더니 골목길로 들어가더라고. 혹시 누군가에게 쫓기나 해서 따라가 봤는데…….”

“봤는데?”

“어떤 남자가 튀어나와서 여자애를 기절시키고 마차에 태웠어.”

레베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불안한 예감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레베카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까마귀 소년에게 물었다.

“마차의 인장이나 특징적인 걸 본 건 없니?”

“어…….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는데……. 아! 그렇지. 직접 만나서 물어보실래요? 지금 상점가에 있어요.”

“뭐라고?”

“아까 뛰어오다가 봤는데 보석 가게 앞을 서성이던데요? 그렇게 예쁜 얼굴은 쉽게 잊을 수가 없죠.”

“야!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대장인 소년이 까마귀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갈겼다.

까마귀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대장이 갑자기 불러왔으면서 내가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소년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레베카와 크로아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까마귀에게 말했다.

“날 그곳으로 데려가 줘.”

* * *

알리시아는 결국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릴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소녀는 제 앞에서 피를 토하더니 잔뜩 저주를 퍼붓고 죽었다.

“꺄악!”

얼핏 선잠에 들 때마다 비슷한 악몽을 꾸었다.

눈부신 햇살이 침대 위로 쏟아지자 알리시아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아…….”

알리시아는 싫은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늘 다시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았다.

비척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은 알리시아는 푸석푸석한 제 피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최근 백작가의 자금 상황이 좋지 않아 평소에 쓰던 값비싼 화장품을 쓰지 못했다.

‘애초에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한 게 잘못이야. 돈 한 푼 안 벌어오는 주제에 무슨 드레스를 그렇게 사들인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을 하라고 닦달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면서도 제플린은 자금난을 알리시아의 낭비벽 탓으로 돌렸다.

알리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수를 얼굴에 발랐다.

고용인 여럿을 내보낸 터라 간단한 일과는 이제 스스로 해야만 했다.

비참한 일이었지만 알리시아는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했었지.’

데본셔 백작가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였다. 이 정도의 풍파로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게다가 고용인들이 줄어 자신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만족스럽기도 했다.

분주하게 치장을 마친 알리시아는 습관적으로 서랍장을 열어 안약을 찾았다.

안약의 양을 가늠해 보던 그녀의 미간이 깊게 팼다.

‘벌써 이렇게…….’

한 번 넣고 나면 없어질 정도로 남은 양이 적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

시야가 좁아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안약을 넣는 걸 멈출 생각이 없었다.

레베카와 닮은 외양으로 사는 건 생존의 문제였다.

이 모습을 유지해야 제플린이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인정해 줬다.

탄생절의 일도 자신이 레베카와 닮은 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마차에 실려 가던 앳된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알리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아이에게 털끝만큼의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그 아이에게 해코지한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알리시아는 자기변호를 했다.

“그나저나 돈을 어디서 구한담…….”

안약의 가격은 어마하게 비쌌다. 원래라면 그 정도의 돈은 옥타비오가 구해줬지만 이제 그도 곁에 없었다.

보석함을 연 알리시아는 잘 쓰지 않는 보석과 장신구들을 골랐다.

자신에겐 현금이 없으니 보석이라도 팔아야 했다.

하지만 이렌시아의 전당포를 찾아갔다가는 제플린의 귀에 소식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인접한 영지인 요하네스 공작령은 꺼림칙해서 찾아가기 싫었다.

그나마 가깝고 전당포가 많은 곳은 수도였다.

오늘 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알리시아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현관을 나서자 베이츠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디 가십니까? 동행하겠습니다.”

“아니. 생각이 복잡해서 혼자 가고 싶어.”

“하지만 위험합니다.”

“혼자 가겠다고 하잖아!”

베이츠의 고집에 알리시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전당포에 들락거리는 비참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게 베이츠라도 말이다.

베이츠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님께는 산책하러 가셨다고 말해 두겠습니다.”

순순히 저를 도와주겠다는 베이츠의 말에 알리시아는 성질을 낸 게 머쓱해졌다.

그녀는 사과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 * *

“생각보다 돈이 별로 안 되네…….”

전당포를 나온 알리시아는 생각보다 가벼운 돈주머니를 짤랑거렸다.

딱 안약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저 장신구들을 살 때는 이것보다 몇 배의 가격을 냈었다.

“헌 게 값어치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알리시아는 단념하고 시장의 활기찬 분위기를 눈에 담았다.

자유롭게 거리를 나다닌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알리시아는 시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다들 저보다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순간 알리시아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여쁘고 순박한 시골 아가씨.

그때의 자신은 지금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처럼 생기가 넘쳤다. 비록 시궁창 같은 생활을 저주했지만 그땐 행복이 뭔지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게 명확했었다. 열정이란 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데본셔 백작 부인의 화려한 삶?

그래, 그랬다. 그걸 동경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싶던 걸 손에 거머쥘수록 허무하고 속이 답답해졌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갈증이 심해졌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싶었다.

알리시아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곳엔 누가 봐도 아름다운 귀부인이 서 있었다.

그 귀부인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연히 지금이 더 행복해.”

알리시아는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읍!”

그 순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입 안에는 거칠한 헝겊이 밀려 들어왔다.

축축한 벽에 등을 세게 부딪친 알리시아는 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 덜덜 떨며 팔뚝으로 자신의 목을 압박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난 네가 그래도 어느 정도 학습 능력은 있다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스스로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할 거라 믿었지. 하지만 이제 보니 멍청한 악마 새끼였구나.”

푸른 눈이 축축한 어둠 속에서 알리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레베카……?’

그녀는 가히 사람 서넛은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으로 알리시아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어딨어? 다 어디 숨겼어!”

그녀의 고함이 텅 빈 골목길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옆에서 크로아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말했다.

“부, 부인……. 사람들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언성을 낮춰 주시면…….”

레베카는 크로아의 간곡한 청에 몸에서 힘을 조금 뺐다.

그러곤 여전히 반항할 생각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떠는 알리시아의 입에서 헝겊을 빼냈다.

“소리 지르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

알리시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한 게…….”

“네가 한 게 아니라는 그딴 변명은 하지 마. 네가 릴리를 납치한 거 알고 있어. 날 흉내 낸 그 얼굴을 이용해서 말이야.”

꿰뚫어 보는 듯한 레베카의 눈빛에 알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진실을 실토할 수도 없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귀동냥으로 들었을 때 ‘빛의 장미’라는 조직은 제국의 숨겨진 실세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릴리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레베카가 릴리를 구출해내기라도 한다면 빛의 장미는 데본셔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알리시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레베카는 혀를 찼다.

“엄마라는 사람이 다른 아이의 목숨은 파리처럼 여기다니……. 다시 한번 묻겠어. 릴리, 어딨어.”

알리시아는 의아하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릴리는 레베카의 배다른 시누이였다.

피가 이어져 있지도 않았고, 율리안이 여태껏 숨겨왔다는 걸 듣고 보면 공작이 그렇게 아끼는 여동생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흥분한단 말인가.

알리시아는 고르고 골라 겨우 말을 뱉어냈다.

“아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걱정 마세요.”

레베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헛웃음을 짓다가 치마를 걷었다.

크로아가 기겁하며 눈을 돌렸다.

알리시아는 제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의심했다.

레베카의 쭉 뻗은 다리에 총이 매여 있었다.

레베카는 은색 총을 꺼내들고는 알리시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알리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뭘 하시려는…….”

“보아하니 아직도 제플린을 싸고도는 모양인데, 네 목숨을 걸 만큼 그를 사랑하는 거야?”

덜컥-

묵직하게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댔다.

서늘한 쇳덩이의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레베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당장 말해. 그 예쁜 이마에 총구멍 나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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