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볼 때마다 줄곧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제플린 앞에서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알리시아를 죽여버리고 싶다가도 그녀와 함께 했던, 그녀를 사랑했던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알리시아가 과거와 달리 그곳에서 직접 벗어나길, 자신에게 사과를 하길 남몰래 기도했다.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레베카는 제 망설임을 후회했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잔상 따위는 무시해 버릴걸.
그냥 알리시아도 제플린처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릴걸.
자신이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릴리는 공작 성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레베카는 제 이를 부서뜨릴 기세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다시피 하며 다른 손으로 알리시아의 양 볼을 세게 잡았다.
광대뼈에 가해지는 강한 압력에 알리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말해! 다들 지금 어딨어!”
“래, 랭스터…….”
“뭐?”
“랭스터 후작저에 있어요! 릴리 말고 또 누굴 말하는지 몰라도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예요. 아서를 두고 맹세할게요!”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리시아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곧이어 내팽개치듯 알리시아를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알리시아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비 오듯이 알리시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베카는 오물을 쳐다보듯 경멸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또다시 내 앞을 막는다면 그땐 정말로 찢어서 죽여버릴 거야. 그리고 들판의 개에게 먹이로 던져 줄 거야. 그러니 내 눈 앞에서 당장 꺼져.”
사정없이 자신을 찌르는 폭언에 알리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며 벌벌 떨었다.
“크로아, 가요.”
“예.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크로아가 진흙탕 속에서 울고 있는 알리시아를 힐끔 바라보다 레베카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투박한 발소리의 주인이 탈진할 정도로 울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담담하고 익숙한 음성에 알리시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베이츠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왈칵하고 한 번 더 눈물이 차올랐다.
이젠 한계였다.
알리시아는 억만금을 안겨준다고 해도 이런 무서운 일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레베카의 분노한 얼굴을 맞닥뜨렸다간 제 자그마한 심장이 충격에 멈춰버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베이츠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겼다.
“베이츠, 도망갈래요. 우리 도망가요. 이제 이런 거 다 지긋지긋해. 데본셔도 레베카도 다 싫어요.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나와 아서를 데려가 줘요.”
베이츠의 가슴팍에 동그란 눈물 자국이 생겨났다. 베이츠는 정신없이 우는 알리시아를 토닥거렸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베이츠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 * *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레베카는 일단은 공작 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 저런……!”
성의 입구를 발견한 크로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저기에 썩은 계란이 던져져 있었고, 담벼락에는 ‘기만자’라는 단어가 검은색 페인트로 크게 적혀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마차다!”
근처 덤불에 진을 치고 있던 광신도들이 일제히 마차로 달려들었다. 경비병 몇몇이 뛰어나와 그들을 막아섰다.
“이 배신자! 여신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에 부딪힌 계란이 터졌다.
그때 담벼락 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공작가의 고양이들이다!”
“신의 자식이여! 어찌하여 저런 배덕자를 감싸십니까!”
공격하는 고양이 수가 점점 늘어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 덕분에 마차는 대문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흰색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레베카가 실소를 터뜨렸다.
“참 재밌네요. 그동안 요하네스 공작의 이름을 드높게 외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손가락질을 해대다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들은 광신도들입니다. 공작님께서 저주받았단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신전이 공신력을 많이 잃었더군요. 어제의 사건은 신전이 헌금을 더 거둬가기 위한 술수라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건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보다 문제는 신의 기사단입니다. 지금이야 고양이님들이 힘을 써주시고 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분명 다시 올 겁니다. 그때는 대비책을 가지고 왔겠지요. 혹시 방법이 없으십니까?”
레베카는 커튼을 슬쩍 열었다. 달걀 물로 범벅된 창문 너머로 현관 앞을 가득 채운 물건더미가 보였다.
레베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 * *
고용인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며 마차에서 내린 레베카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레베카는 이렇게 많은 물건을 주문한 기억이 없었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 사이로 벨마와 대화를 하고 있는 타니샤를 발견했다.
“이 약초는 서늘한 곳에 저장해 둬야 해요. 그리고 저기 남방에서 온 과일은 금방 상하니 말려두시는 게 좋아요. 자세한 설명은 여기 서류에 적어놨으니 살펴보시고…….”
“타니샤!”
레베카의 부름에 타니샤가 뒤를 돌아봤다.
타니샤는 손에 든 서류 뭉치를 벨마에게 얼른 건네곤 레베카를 향해 달려왔다.
“레베카 님,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물론 최근에 일어난 일로 잘 지내지 못하셨겠지만……. 어찌 됐든 정말 반가워요!”
타니샤는 레베카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레베카는 호감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반가워요. 그런데 저 물건들은 다 뭔가요? 전 주문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 저거요?”
타니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네. 익명을 자처하신 제 고객님들께서 공작님께 보내는 선물이에요. 성 안에 한 달 넘게 고립되어도 고용인들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들이랍니다. 그리고 비상약과 심장에 좋다는 약초들도 잔뜩 들여왔지요.”
“익명의……?”
레베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타니샤가 주변을 휙휙 살피더니 이윽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몽블랑 케이크를 좋아하시는 분들 말이에요.”
“타니샤가 그분들을 어떻게…….”
“제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몇 년 동안 요하네스가의 정보원이었다고요. 공작님의 뒤를 캐다가 공작님께 걸려버렸지 뭔가요. 그러다가 황제 폐하까지 만나 뵈었고요. 다행히 폐하께서 저를 써주겠다고 하셔서 망정이지, 목이 달아날 뻔했어요.”
“전 전혀 모르는 사실인데요?”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서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공작님께 부탁드렸었거든요. 다음 몽블랑 모임 때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타니샤는 멋쩍게 머리를 긁다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커다란 짐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다들 직접 병문안을 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여기 어디 편지가 있을 텐데…….”
곧이어 타니샤는 편지뭉치를 찾아내어 레베카에게 건넸다.
살바도르부터 시작해 첼스턴 서몬드 백작, 그리고 헬레나와 테레사의 것까지 있었다.
특히 테레사의 편지가 가장 두툼했다.
레베카는 테레사의 편지를 뜯어서 살펴봤다.
요하네스 공작의 연설에 감명받았다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쾌차를 기원한다는 말과 함께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
그동안 율리안을 차갑게 바라보던 테레사의 태도와 상반되는 내용의 편지였다.
타니샤가 흘깃 편지를 훔쳐보며 말했다.
“살다살다 율리안 공작님의 덕망을 찬양하는 건 처음 보네요. 이게 다 레베카 님 덕분인 건 아시죠?”
“그럴 리가요. 율리안이 그간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게 바로 레베카 님의 공이라는 거예요. 공작님께서 노력을 하게 만들다니. 오빠가 몇십 년 동안 하지 못한 걸 몇 개월 만에 해내셨잖아요.”
“그런가요…….”
이어지는 타니샤의 낯간지러운 칭찬 세례에 레베카는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타니샤의 정보력은 정말로 뛰어난지 레베카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일까지 그녀는 모조리 알고 있었다.
“어제 부랑자 아이들을 만나신 건 잘 해결이 되셨나요?”
“그것까지 아는 거예요? 정말 이제는 소름이 끼칠…….”
“왜 그러세요?”
레베카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타니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타니샤. 혹시 저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물어 뭐하나요. 범죄를 저질러달라고 해도 도와드려야죠. 말씀만 해 주세요. 누구의 목을 칠까요?”
타니샤의 농담에도 레베카는 웃지 않았다.
진지한 레베카의 눈빛에 타니샤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농담이 아니군요.”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조금 꺼림칙한 일이에요. 해 줄 수 있나요?”
타니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으니 말씀해주세요.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습니다.”
레베카는 자신의 계획을 타니샤에게 차근차근 일러줬다.
그녀의 설명을 다 듣자 긴장되어 있던 타니샤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그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또 정말로 목을 가져와야 하나 고민했다고요.”
“그런 끔찍한 일을 타니샤에게 어떻게 시키겠어요. 내가 직접 하면 모를까…….”
“예……?”
“농이에요.”
피식 웃음을 흘리는 레베카의 모습에 타니샤는 어쩐지 오한이 들었다.
“저…… 레베카 님. 안에서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벨마가 조심스레 다가와 레베카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받은 물건을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베카 님께서 말씀하신 일은 오늘 안으로 해결하도록 할게요.”
벨마의 초조한 기색을 눈치챈 타니샤가 서둘러 작별 인사를 했다.
레베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현관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레베카 님!”
레베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로비에 북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결국 다들 고집을 꺾지 않으셨군요.”
레베카의 가족들부터 시작해 카트린느와 연금술사들, 그리고 라본느 살롱의 직원들까지 레베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발을 디뎠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들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레베카가 눈을 치켜뜨고선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만 돌아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