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싫어요!”
카트린느가 커다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내려놓은 자루 안에는 새롭게 개발한 무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레베카는 우리의 은인이에요. 그런데 은혜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너무 치사하네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상대는 신전이에요. 자칫하다간 이단으로 몰리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어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겠어요? 레베카는 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황제 폐하를 설득했어요. 다른 이들도 당신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은 건 마찬가지라고요. 레베카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아예 신전으로 쳐들어갈 거예요. 이단 까짓거, 하고 말죠.”
“카트린느…….”
“우릴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 작정인가요? 이보게들, 레베카가 우리를 내쫓으려고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카트린느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는 고집스럽게 소리쳤다.
“그럴 줄 알고 노숙할 장비까지 다 챙겨 왔어요!”
“레베카 님. 우리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이 기회에 확인시켜 드리죠.”
여기저기서 원망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돕게 해주세요!”
주먹까지 내지르며 항의하는 사람들의 원성에 레베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회귀한 이후로 레베카는 줄곧 부채감에 시달려 왔다.
덤처럼 얻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속임수를 쓰는 것 같다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이 알던 사람의 불행한 삶을 바꿔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이 끔찍한 죄책감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레베카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이제 돌려보내기는 그른 것 같았다.
카트린느가 쐐기를 박듯 레베카에게 단호히 말했다.
“이건 황명이기도 해요.”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제게 그러셨어요. 레베카와 율리안을 도우라고요. 뭐, 공식적으로 폐하께선 침묵하고 계신 게 되겠지만요. 제가 황명을 거절할 순 없잖아요? 명색이 황녀인데.”
카트린느는 망토를 고정하고 있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그곳에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금색 브로치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베카가 설레설레 도리질 쳤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펠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큰 외침에 레베카의 시선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연금술사들을 향했다.
“할 일이 많으실 텐데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전에 핍박받는 우리를 구해준 게 바로 요하네스 공작가입니다. 게다가 율리안 공작님께 받은 은혜 또한 아주 큽니다. 저희가 일에 미쳐 있기는 해도 도의를 내팽개칠 만큼은 아닙니다.”
레베카는 결의를 태우는 연금술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레베카 님…….”
그때 누군가가 부드럽게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라본느 살롱의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레베카의 손을 쓸어내렸다.
“이제 행복하실 일만 남은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괜찮아요. 그레이스.”
라본느 살롱의 직원들과 대화를 하는 레베카에게 다나에와 테오가 성큼 다가왔다.
리비아와 헤레나도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라왔다.
자신이 요하네스 공작 부인인 이상 광신도들이 오벨리아 저택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레베카는 가족들과 오벨리아 저택의 하녀들까지 모조리 성으로 불러왔다.
헤레나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
“릴리가 납치됐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는지 두 여동생의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레베카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금세 어둠을 떨쳐버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 내가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그럼 이제 우린 뭘 하면 되겠니?”
다나에가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레베카는 찬찬히 사람들을 돌아봤다.
“여러분들의 의지가 이렇게까지 확고하니 하는 수 없군요. 부디 율리안을 지켜주세요. 신의 기사단이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베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전처럼 신의 기사단이 함부로 민간인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한 일인 건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 버겁다고 느껴지신다면 거절하셔도 좋아요.”
“우리가 거절할 리는 없어요.”
카트린느가 고집스럽게 소리쳤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도망쳐 주세요. 며칠만 버텨주신다면 지원군이 올 겁니다.”
레베카는 카림에겐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뒀다.
여기에 모인 이들과 달리 그에겐 무력이 있었다.
그리고 율리안이 곤란에 빠졌을 때 모른 척하라 이르는 게 오히려 카림에게 더 큰 무례였다.
카림의 영지는 멀었지만, 일전 예고 없이 공작 성에 들이닥쳤을 때처럼 그는 율리안을 위해 망설임 없이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여러분을 지켜줄 만한 도구를 여기 계신 황녀께서 준비해두셨습니다.”
레베카의 말에 카트린느가 가슴을 활짝 피며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자자. 자세한 설명은 내가 하도록 하지.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레베카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어벽을 개발했어. 그리고 여기 있는 안경과 귀마개를 착용하면 수정구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야. 또 이 무기는…….”
카트린느의 장황설이 이어졌다.
모두가 주의 깊게 그녀의 설명을 새겨들었다.
“선두는 제가 맡죠. 아무리 신의 기사단이라고 하더라도 황녀인 저는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카트린느…….”
망설이는 레베카에게 카트린느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평생 발목만 잡았던 황녀라는 이름을 이렇게라도 쓸 수 있어서 전 기쁜 걸요?”
카트린느의 말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좋습니다! 예전부터 신의 기사단 놈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요.”
“드디어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어 기쁠 뿐입니다.”
“당장 부수러 갑시다!”
“부수는 게 아니고 지키는 걸세…….”
그때 벨마가 서신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라트라니스 공작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서신을 찬찬히 읽어보던 레베카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카림이 그녀의 서신을 받자마자 기사단을 이끌고 영지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서신을 곱게 접으며 벨마에게 말했다.
“여기 계신 모두에게 좋은 방과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고용인들도 배정해주시고요. 귀빈들이시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크로아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벨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레베카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불과 오늘 아침에만 해도 공작 성은 지킬 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온갖 구호 물품과 도움의 손길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크로아는 눈을 끔뻑거리며 연신 레베카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모두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주술…… 따위가 아니야.’
크로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레베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동안 레베카의 행보를 찬찬히 되새김질했다.
크로아는 그녀가 너무 쉽게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레베카의 노력이 있다는 건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니까.
한순간에 모두를 홀릴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외모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행복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제 주변인의 행복을 바라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녀는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친절했을 뿐이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살기를 알아차리듯 사람은 다정한 사람 주위로 모여드는 법이었다.
차갑고 냉철한 레베카는 어느새 한겨울 날의 모닥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이끌려 크로아는 저도 모르게 레베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 * *
그레이스는 공사의뢰서를 한 손에 쥐고 비장하게 서재로 향했다.
옥타비오가 사라진 뒤 그가 맡았던 집사 업무를 베이츠와 그녀가 나눠서 전담하고 있었다.
서재의 문을 두드리기 전, 그레이스는 잠시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알던 그 아름다운 백작저와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갱생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요하네스 공작이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하더라도 그레이스는 레베카가 약속한 바를 꼭 이루어내리라고 믿었다.
어쩐지 이 이상한 상황도 레베카의 계획 중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레베카가 자신에게 저택을 넘겨주기 전까진 이곳을 끝까지 지키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내 거야. 이 저택은, 이 그레이스 던컨의 것이야. 그러니 여기서 더 망가지게 둘 수는 없어.’
그레이스는 빙글 돌아서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욕망만큼이나 무거운 노크 소리가 공허한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백작님. 하녀장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햇빛을 등진 제플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렸지만 제플린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냉엄한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굳게 잡고는 목을 큼큼 울리며 말했다.
“흠, 흠. 예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공사를 진행할 돈이 없습니다.”
“뭐? 대체 살림을 어떻게 하기에 돈이 모자라.”
“지금 들어오는 수익은 겨우 저택을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사는 무리라고요!”
쾅-!
제플린이 거세게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놈의 돈! 돈! 내가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나! 잔말 말고 의뢰서를 넣어!”
“이제 가불은 불가합니다. 이전 공사도 잔금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시공사도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연금술탑에서도 데본셔가와 관련된 어떤 일도 맡지 않겠다고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아무래도 일전의 그…… 일 때문인 듯합니다.”
“빌어먹을!”
제플린이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분명 율리안을 끌어낸 건 자신인데 아무도 자신의 공을 치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사자를 찌른 것 때문에 그 또한 역풍을 맞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신문에선 율리안의 처분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제플린에 대한 비판도 함께 따라왔다.
그를 비난하는 익명의 편지가 매일같이 날아들었다. 이제 그와 왕래를 하고 싶어 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