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4화 (204/232)

204.

제플린은 초조하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젠장…….’

빛의 장미는 지혜의 불꽃을 죽이기 전까지 후원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더러운 일은 자신이 다 했는데도 그들을 공을 치하하기는커녕 할당량을 채운 죄수를 대하듯 했다.

그레이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빛의 전당의 예산을 줄이시는 게 어떠십니까? 빛의 전당의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들어요.”

그레이스는 내심 빛의 전당이 흉물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식으로 보기엔 좋았지만 고풍스런 저택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제플린은 그녀와 생각이 아주 달랐다.

“그건 안 돼!”

갑자기 높아지는 그의 언성에 그레이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는 한이 있어도 그곳만큼은 건드리지 마!”

제플린은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예산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지. 그때까지 공사를 미루는 걸로 하고 일단 나가 봐.”

“예……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서재를 나섰다.

대체 왜 저렇게 빛의 전당에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빛의 전당에 있는 예술품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녀가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아. 베이츠로군.”

“예. 백작님께 보고하러 가는 중입니다.”

“그래. 항상 수고가 많아.”

“예. 그럼.”

그는 옥타비오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그레이스는 공사를 미룬 것에 만족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 * *

베이츠가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제플린이 짜증을 냈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바다에 수장하라고 명령한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난 것 같은데?”

“그게…… 중간에 서신이 다른 곳으로 샌 것 같습니다.”

“뭐라고?”

“워낙 먼 곳이지 않습니까. 서신이 누락되는 건 왕왕 있는 일이지요.”

“젠장! 뭣 하나 되는 게 없어! 그럼 당장 다시 보내.”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예. 직통으로 보낼 수 있는 곳까지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제플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베이츠의 부재는 자신에게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의 고민을 알아차린 베이츠가 입을 열었다.

“기사들에게 백작님을 잘 보필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아주 중요한 일이야. 좋아. 네가 직접 갔다 오도록 해. 대신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제플린은 빠르게 서신을 휘갈겨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신을 받아든 베이츠는 제플린에게 인사한 뒤 밖을 나섰다.

알리시아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팔 수 있는 보석과 드레스들을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득 그의 시선을 느낀 알리시아가 얼굴을 들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베이츠가 그녀를 향해 눈짓했다.

그 눈짓의 의미를 알아챈 알리시아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리시아의 입에서 랭스터 후작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레베카는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페튜니아.’

랭스터 후작저에 무턱대고 찾아가 릴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랭스터 후작이 빛의 장미라면 정면 돌파는 무리였다. 레베카는 그의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빛의 장미가 제국을 쥐락펴락한 세월을 생각해보면 황제 못지않은 사병을 숨겨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감옥 섬에도 그들의 입김이 들어갔겠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때문에 은밀한 곳에서 그의 허를 찔러야만 했다.

그리고 레베카는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웨슬리를 사로잡았습니다. 호위 기사들의 반항이 있었지만 잘 해결했습니다. 후작 부인이 보냈다고 하며 순진한 도련님을 살살 구슬렸더니 순순히 따라오더군요. 아무런 유혈사태 없이 일을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연락을 주실 때까지 성심을 다해 보살피겠습니다…….>

제 아들이 있는 집 안에 릴리를 잡아두는 게 꺼림칙했는지 랭스터 후작은 그의 외아들을 페튜니아의 친정으로 보냈다.

페튜니아의 친정은 랭스터 후작령에서 일주일은 가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간중간 호위 기사가 보낸 척 후작저에 서신을 보내 놓으면 긴 여행 기간 동안 웨슬리가 다른 곳에 구금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들키지 않을 것이었다.

타니샤의 서신을 받은 레베카는 곧장 페튜니아를 라본느 살롱으로 초대했다.

페튜니아의 흥미가 동하도록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언급하며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은 서신을 함께 동봉했다.

레베카의 비참한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페튜니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초대에 응할 게 확실했다.

레베카는 마차 창문에 말라붙은 계란 흰자를 바라보았다,

공작 성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광신도들은 카트린느가 다 쫓아냈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숨어 있던 사람들까진 피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마치 삶의 목적이 요하네스 공작가를 공격하는 데 있다는 듯 어김없이 계란을 던져왔다.

‘이런 데 계란을 낭비할 돈이 있다면 신전의 고아원에 기부나 할 것이지…….’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트린느가 호위로 붙여준 기사가 마차에서 먼저 내려 주변을 살폈다.

“수상한 인물은 없습니다. 내려오셔도 좋습니다.”

그의 말에 마차에서 내린 레베카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이게 대체…….”

새하얀 라본느 살롱 건물 위에 검은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마치 곰팡이가 핀 것처럼 얼룩덜룩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어떻게 올라간 건지 간판 위에 검은색 페인트로 커다랗게 글자를 적어두기까지 했다.

<‘저주받은 공작의’ 라본느 살롱>

교묘하게 간판과 비슷한 글씨체로 써두어 자신도 모르게 간판과 글자를 이어서 읽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라면 사람들이 붐빌 시간인데도 주변이 한산했다.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페인트를 지우려고 애를 쓰는 직원들뿐이었다.

레베카를 발견한 마가렛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금방 원래대로 원상복구 하겠습니다.”

레베카는 잠시 턱을 쥐고서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라본느 살롱을 찬찬히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검은색도 나쁘지 않겠군요.”

“네?”

“마가렛. 지금 당장 도장공을 불러주시겠어요?”

“아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검은색 위에 흰색을 덧칠하면 티가 나지 않을까요? 약품을 써서 검은색을 지워내는 게 더…….”

“흰색을 칠하려는 게 아니에요.”

“네?”

“검은색을 칠하도록 하죠. 그거 아시나요?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한다는 거.”

레베카는 레드카펫 위를 거침없이 걸어갔다.

“이제 착한 척하는 걸 그만둘 때가 된 것 같군요. 검은 라본느 살롱,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지 않나요?”

레베카의 말에 마가렛은 제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머릿속에 미래를 그렸다.

마가렛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네요. 검은색은 예로부터 우아함을 상징하는 색이었으니까요.”

마가렛의 웃음을 확인한 레베카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대로 로비로 들어서려던 레베카는 잠시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랭스터 후작가의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 * *

페튜니아는 기분이 좋았다.

카트린느 황녀가 자신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순식간에 잃었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데보라가 그 자리를 꿰찼다. 때문에 페튜니아는 최근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레베카가 보낸 서신은 그런 그녀에게 오랜만에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레베카가 보낸 서신을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얼마나 읽어댔는지 이제는 외울 지경이었다.

<……그러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나를 도와주길 바라.>

그 레베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해 보였던 예쁘장한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고 생각하니 발끝까지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지금 기분엔 데보라가 속을 긁어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

마차에서 내린 페튜니아는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미처 감추지 못했다.

기가 질릴 정도로 웅장하고 신성해 보이던 라본느 살롱이 형편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저주받은 공작의 라본느 살롱이라고? 너무 웃긴걸.’

그녀는 조소를 흘리며 여유롭게 살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비를 휙 둘러본 페튜니아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얼핏 스쳤다. 손님이 줄기는 했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저번에 주문한 케이크를 찾고 싶은데요.”

“마들렌을 대량 주문할 수 있을까요?”

“네? 벌써 품절이라고요? 일부러 빨리 온 건데…….”

라본느 살롱의 디저트 사업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어딜 가도 여기만큼 맛있는 디저트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설탕의 달콤한 중독성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점은 페튜니아마저도 인정하는 바였다.

페튜니아는 입술을 씰룩이며 접수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튜니아 랭스터 후작 부인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페튜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여러 번 살롱을 방문했으나 이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다.

‘정말 레베카가 나에게 빌기라도 할 모양이야.’

랭스터 후작가는 요하네스 공작가 못지않게 신전과 연이 깊은 집안이었다.

역대 데프리아교의 교황 중 다섯 명이 랭스터 후작가 출신이었다.

지금도 후작가의 직계나 방계 할 것 없이 고위 신관의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었다. 신전의 사업을 총괄하는 집안이었으니 재력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페튜니아는 레베카가 율리안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한다고 추측했다.

페튜니아에겐 그럴 힘이 없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설설 기는 레베카를 보며 마음껏 즐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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