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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5화 (205/232)

205.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살롱의 꼭대기 층이었다.

페튜니아는 이곳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귀빈만 들어갈 수 있는 라본느 살롱의 최상층.

황녀나 황후도 쉽게 방문하지 못한다는 이곳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한 곳이라고 했다.

‘레베카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지.’

페튜니아는 벌써부터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녀가 잔뜩 과시할 말들을 골라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직원이 그녀를 빠르게 방 안으로 밀치곤 사라졌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그럼 저는 이만.”

졸지에 떠밀려 들어온 페튜니아는 방 안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껌뻑였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꼭대기 층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광활한 정도로 넓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작은 티 테이블과 소파가 전부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겨울 햇살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순간 등 뒤에서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페튜니아가 기겁을 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아무런 수행원도 없이 이곳에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음습한 목소리에 페튜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레베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먹지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레베카?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그야 널 감금하고 협박하려고.”

입에서 내뱉는 말과 달리 레베카는 순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녀가 또각또각 옹골찬 구둣발 소리를 내며 페튜니아에게 다가갔다.

레베카의 음산한 분위기에 페튜니아는 기겁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뭐 그렇게 겁을 내고 그래. 이것 봐. 난 무기 하나 없어.”

레베카는 양손을 펼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페튜니아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페튜니아. 물론 차린 건 없어.”

레베카는 페튜니아를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제 옆자리를 팡팡 쳤다.

페튜니아가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자 그녀가 미소를 거둬들이고 차갑게 뇌까렸다.

“자꾸 내 말 안 들으면 정말 네 상상대로 될 수도 있어.”

할 수 없이 페튜니아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소파로 다가갔다.

그녀 옆에 앉기를 망설이는 페튜니아의 손을 레베카가 확 잡아당겼다.

“악!”

레베카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아끌며 웃었다.

“이것 봐. 이렇게 곁에 있으니 참 좋잖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네가 날 죽일 듯이 싫어했던 그때로 말이야. 아, 그건 지금도 똑같나?”

“원하는 게 뭐야…….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 남편이 너를…….”

페튜니아가 랭스터 후작을 언급하자 생글거리던 레베카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네 남편. 난 네 남편에게 볼일이 있어.”

“그러시겠지. 요하네스 공작을 살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내 남편도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공작은 저주받았잖아? 그건 되돌릴 수 없어. 어쩌나 네가 잡은 구명줄이 썩은 줄이어서.”

레베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페튜니아를 살폈다.

랭스터 후작이 빛의 장미라면 그녀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잘게 떠는 그녀의 손을 보고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렇게 새가슴인 페튜니아에게 랭스터가 제 정체를 말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튜니아가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레베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페튜니아, 우리는 이곳을 가능성의 방이라고 불러.”

“뭐?”

“이곳을 찾는 손님이 누구인지에 따라 이곳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거든. 알아듣겠니?”

“지금 협박을 하는 거야?”

“맞아. 아까 말했잖아. 널 감금하고 협박할 거라고.”

레베카는 품속에서 천천히 총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자신을 향하는 총구를 발견한 페튜니아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레베카!”

“미안. 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 네 저택에서 일어난 변화가 뭐지? 빠짐없이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무, 무슨 변화를…….”

“율리안의 동생과 내 친구가 납치됐어. 그리고 그들은 지금 랭스터 후작저에 잡혀 있지.”

“그게 무슨 억측이야! 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짓말. 네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럴 리 없다고 말했겠지. 모른다고 하는 건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때 쓰는 말이잖아?”

칼날 같은 미소가 페튜니아의 눈동자에 날아들었다.

레베카가 그녀의 목 아래에 총구를 바싹 가져다 댔다.

쇠붙이 아래 깔린 페튜니아의 대동맥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페튜니아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여기서 말만 잘한다면 레베카는 총을 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저 총조차 가짜 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의 말에 넘어가 진실을 나불거린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렝스터 후작가도 끝장이었다.

여기서 죽나 나중에 죽나 매한가지였다. 그럴 바엔 좀 더 살 확률이 높은 쪽을 시도해 보는 게 좋았다.

페튜니아가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아, 아니야. 난 정말 몰라. 너도 알잖니. 난 정부 출신이라서 남편이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 남편은 날 정말 사랑하지만 사업이나 정치적 이야기는 하지 않아.”

“아. 정말 짜증나네.”

“그렇지? 짜증나는 일이야. 그러니 아무리 날 다그쳐도 얻을 게…….”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더니 미간을 잔뜩 구겼다.

“내가 널 협박하려는 게 고작 네 목숨뿐인 줄 알아? 네 아들 이름이 웨슬리였나?”

“웨슬리는 왜……?”

“듣자하니 네 친정으로 급하게 여행을 떠났다고 하던데……. 아들에게 숨겨야 할 일이라도 있나 보지? 그나저나 여행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워낙 험한 세상이잖아? 비명횡사라든가 말이야.”

“내 아들은 건들지 마!”

페튜니아가 레베카를 밀치며 악을 질러댔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줄곧 겁에 질려 있던 페튜니아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레베카는 밀려 나간 자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페튜니아의 머리통을 잡고 그녀의 목 밑에 총을 다시 겨누었다.

레베카의 눈에 핏발이 섰다.

“왜 안 되지? 네놈들은 내 소중한 것을 훔쳐 간 주제에,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건가?”

레베카가 잠시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 보자. 앞으로 십 분 남았어. 십 분 뒤에 내가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면 랭스터가의 대는 그만 끊기고 말 거야.”

레베카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페튜니아가 도리질 쳤다.

“거, 거짓말이지? 네가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원래의 나라면 그랬겠지만 소중한 걸 잃은 나는 달라. 내 눈에서 눈물이 났으면 네 눈에선 피눈물이 쏟아져야 내 성이 풀릴 것 같거든.”

레베카는 총으로 페튜니아의 턱뼈를 세게 누르며 고함쳤다.

“말해! 내 사람들 어딨어!”

덜덜 떠는 페튜니아의 짙은 녹안에 황금빛이 스며들었다.

이윽고 진실을 담은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 *

한편, 요하네스 공작을 추포하러 다시 성을 찾은 신의 기사단은 멍하니 자신을 막아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머. 여기서 캠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우연이군.”

완전 무장한 카트린느가 팔짱을 끼고서 기사단을 바라봤다.

그들을 위협하던 고양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챙겨온 고양이 전용 마취탄이 소용없어졌다.

로이드는 공작 성 입구를 봉쇄하듯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캠프란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여기저기 천막이 쳐져 있고 각종 캠핑 장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모닥불 위에서는 수프까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인이나 허약해 보이는 청년들뿐이었다.

위협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여기란 말인가.

로이드는 일전의 연금술탑 소동을 떠올렸다. 그때도 카트린느의 존재가 적잖이 방해가 됐었다.

“저희는 그저 공작 성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길만 터 주시면 아무런 방해 없이 지나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예?”

“저길 보게. 자네가 이곳을 지나가려면 입구에 있는 천막을 치워야 해. 그게 방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로이드는 카트린느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과연 대문 앞에 커다란 천막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지금 신의 기사단의 사명보다 캠핑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어머, 당연한 소릴. 당신한테나 사명이지 우리에겐 사명이 아닌걸. 이건 친목을 도모하는 아주 중요한 캠핑이야. 평가절하하면 곤란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뒷문으로 들어가죠.”

“미안하지만 거기에도 우리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어.”

카트린느의 되지도 않는 변명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정을 잃는 법이 없는 로이드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겠군요. 억지로 쫓아내겠습니다.”

“지금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대겠다고 하는 건가? 저 불쌍하고 힘없는 약자들에게도? 신의 기사단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자비가 없어서야…….”

“농은 여기까지입니다. 어서 이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라! 황녀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로이드가 카트린느의 팔뚝을 잡았다.

그러자 카트린느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그의 팔을 쳐냈다.

“아무리 신의 기사단 소속이라고 해도 그대들 또한 제국의 일원인 것을.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대?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어질 내 행동은 정당한 자기방어가 되겠군.”

카트린느가 손을 위로 뻗었다. 그걸 신호로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손에 수정구와 이지창을 든 상태였다.

“보호막!”

카트린느가 발을 구르자 투명한 막이 하늘 끝까지 솟아올라 공작 성을 에워쌌다.

아직 시제품이라 칼질 몇 번에 사라질 보호막이었지만 존재만으로도 기사단이 주춤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카트린느가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서 말했다.

“어디 한번 뚫고 지나가 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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