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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6화 (206/232)

206.

“아가씨. 식사하세요.”

칸나가 생긋 웃으며 트레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릴리는 열린 문 뒤에 서 있는 기사를 슬쩍 보고 난 뒤 침대에서 기침 소리를 냈다.

“콜록. 콜록. 칸나…… 나 몸이 아파. 밥은 별로 안 먹고 싶어.”

“열이 나시는 걸 보니 또 다시 병이 도지신 모양이군요. 이를 어쩌나…….”

칸나는 기사를 향해 난감한 시선을 던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칸나가 울상을 짓고서 입을 열었다.

“저희 아가씨께선 어릴 때부터 불치병을 앓고 계셨어요. 그 때문에 지금껏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고요. 최근에는 씩씩하게 잘 계시는 것 같아 안심했는데 다시 도진 모양이에요…….”

인질이 아프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릴리를 바라봤다.

“으아앙. 너무 아파. 칸나!”

릴리는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버둥을 쳤다.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는 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칸나가 얼른 릴리의 팔다리를 잡으며 말했다.

“약은 특수하게 조합한 거라서 쉽게 구하지 못해요. 요하네스 공작가에 여분이 있을 터인데 혹시 가져와 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의 눈가에 난감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짜내는 릴리를 흘깃 보며 말했다.

“주인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칸나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기사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칸나가 얼른 트레이 위에 접시를 들었다.

“또 쪽지가 온 거야?”

언제 울었냐는 듯 릴리가 붉은 눈가를 슥슥 닦고 침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펼쳤다.

<……내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자그마한 틈을 만들어주면 좋겠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아. 조만간 직접 구하러 갈게. 레오도 그곳에 잡혀 있을 거야. 여건이 된다면 그의 위치를 파악해 줬으면 해.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거야. 꼭 구해낼게. 그때까지 두 사람이 건강하길 바라며. 칸나와 릴리를 언제나 사랑하는 R이. >

“베키…….”

릴리는 눈에 새길 듯이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칸나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레베카를 떠올리던 칸나는 젖은 눈가를 닦고 쪽지를 벽난로 안에 집어던졌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새하얀 종이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칸나는 식탁 위에 가져온 식사를 내려놓으며 릴리에게 말했다.

“레베카 님 말 들으셨죠? 건강하셔야 해요.”

릴리는 씩씩하게 끄덕끄덕하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그래도 난 아픈 아이니까 반만 먹을게. 너무 잘 먹으면 의심을 살 거야.”

“그럼 제 몫까지 드세요. 저는 식당에서 다른 걸 먹으면 됩니다.”

칸나는 릴리의 접시 위에 스테이크를 놓아주며 말했다.

열정적으로 고기를 씹는 릴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칸나가 갑자기 미간을 구겼다.

자그마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추었다.

칸나가 얼른 소리쳤다.

“릴리 아가씨, 데프리아 여신께서 베푸신 고기를 드셔보세요. 우리 삶 곳곳에 그분의 은총이 깃들어 있답니다.”

이제 익숙한 일인 듯 릴리가 맞받아쳤다.

“콜록! 콜록! 그럼 여신께서 내 병도 낫게 해 주실까?”

“그럼요. 믿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행운이 따른답니다.”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안톤이 조금 경직된 얼굴로 릴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후계자를 잔뜩 생산해야 할 아이였다. 병약한 건 곤란했다.

그가 칸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확실히 열이 좀 있군……. 요하네스 공작 성에 그 치료약이 있다고? 자세히 말해주겠나?”

* * *

한편, 황제의 알현실에선 볼리바르 추기경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폐하! 대체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신의 기사단을 공격하다니요!”

자히드라는 왕좌에 비스듬히 앉아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답했다.

“애초에 먼저 황녀에게 손을 댄 게 기사단일세. 그리고 공격이라니, 아무런 사상자도, 큰 부상자도 없는 걸로 아네만. 그 정도는 자기방어 수준이지. 황녀 하나와 노약자들을 데리고 쩔쩔매는 신의 기사단의 능력 부족인 거 아니겠나.”

“그거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기들로 공격하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눈을 잠시 멀게 하고 전기로 기절시키는 무기라니. 이건 신에 대한 반항…….”

“사사건건 여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게! 애초에 신성력에 반하는 무기도 아니지 않나. 그 넘치는 신성력을 가지고 여태껏 제압하지 못한 자네들의 잘못이지.”

“그 말씀은 황녀 전하를 제압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볼리바르의 날카로운 질문에 자히드라의 이마에 힘줄이 곤두섰다.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는 하는 소린가? 카트린느는 황녀이기에 앞서 내 자식이야. 감히 아비 앞에서 그딴 말을 해?”

“그렇다면 폐하께서 황녀 전하께 신의 기사단의 일을 방해하지 말아달라 명해주십시오.”

“그건 곤란하네.”

“대체 왜 그러십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나. 카트린느는 제 손으로 결혼을 깨버린 아이야. 내가 그 고집을 어떻게 꺾어.”

“그럼 황실 기사단을 지원해 주십시오. 황실 사람이 황녀 전하를 설득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속이 빤히 보이는 그의 말에 자히드라가 코웃음을 쳤다.

추기경의 말은 만약 카트린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황실 기사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머저리로 보이나…….’

자히드라는 볼리바르의 뻔뻔한 표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싫네.”

“예?”

“내가 왜 자네 집안일에 끼어들어야 하냔 말이야.”

“그, 그게 무슨……. 이 일이 어째서 신전만의 일이란 말씀입니까. 요하네스 공작의 기만은 나아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자히드라가 귀를 후비적거리다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아. 시끄럽네. 언제는 나더러 자치권을 보장해달라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 와선 손을 들어 달라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겐가? 제발 신전의 일에 끼어들지 말아달라던 그 소원을 들어줄 테니 그만하고 나가보게.”

“하오나 폐하!”

“자네 때문에 내 편두통이 도진 것 같아. 이보게, 애브러햄!”

자히드라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애브러햄이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예. 폐하.”

“당분간 내 몸이 안 좋을 예정이니 모든 일정을 취소해주게나. 알현도 포함이네.”

“알겠습니다.”

볼리바르가 기가 찬다는 듯 황제를 바라봤다. 아프다는 것도 아니고 아플 예정이라니…… 대놓고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히드라가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로 말했다.

“잘 들었겠지? 그럼 이 늙은이는 그만 괴롭히고 이만 돌아가 보시게, 추기경.”

볼리바르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예전의 자히드라는 이 정도로 기고만장하지 않았다.

신전의 힘은 곧 민심. 역대 황제들은 성난 민심을 맞닥뜨릴까 싶어 그동안 신전에게 쩔쩔맸다. 그건 자히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신전이 민심을 조금 잃었다 하더라도 데프리아교는 여전한 국교였다.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이토록 방자하게 구는지…….

볼리바르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오늘 일은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황제 폐하.”

“마음대로 하게. 그렇지. 나도 내 딸에게서 생채기 하나라도 발견되는 날에 가만히 잊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자히드라가 손을 내젓자 애브러햄이 볼리바르를 밖으로 몰아냈다.

알현실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볼리바르의 등 뒤에서 닫혔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으십니까?”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온 볼리바르의 수행원이 걱정스레 그에게 물었다. 볼리바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이제 황녀고 뭐고 봐주지 말고 밀어붙이라고 전해라.”

“예?”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지. 자히드라 황제.”

* * *

“오늘은 왜 뒷문으로 가지 않죠?”

대문으로 곧장 향해가는 마부에게 레베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저녁엔 정기 예배가 있지 않습니까. 신의 기사단도 예배를 드리러 자리를 비웠을 테니 정문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동안 비밀통로로 드나들던 게 큰 부담이었는지 마부의 얼굴이 평소보다 환했다.

그의 말대로 성문 앞에는 팽팽한 기 싸움 대신 방어벽이나 담벼락을 보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 레베카 님?”

마차의 인장을 보고 카트린느가 알은 척을 해왔다.

레베카는 창문을 열고서 지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오늘은 다 함께 만찬을 즐기도록 해요. 공작 성의 주방장은 솜씨가 아주 좋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기사단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에요.”

“방어벽에 경보를 달아 둘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저녁 시간 잠깐은 괜찮을 거예요. 기사단이 밤을 틈타 습격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카트린느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펠리와 그레이스를 불러 무언가를 의논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원을 반으로 나눠서 교대로 먹는 걸로 하죠.”

그 말에 레베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필사적으로 공작 성을 지키는 사람들은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많은데다가 바싹 마른 연금술사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신의 기사단이 온전히 제 실력을 냈다면 그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노약자였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것이다.

신전에 대한 세간의 여론이 좋지 않은 지금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큰 반항이 일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데스라치노는 최대한 민간인의 희생 없이 요하네스 공작만을 생포해오란 명을 내렸다.

신의 기사단 입장에선 무척이나 어려운 지시였다.

만약 그들이 신의 기사단 중 누구를 죽였더라면 명분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작 성을 지키는 이들은 방어만을 위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간혹 공격에 기절하는 기사가 나오더라도 그는 몇 시간 뒤엔 멀쩡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기사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며칠 동안 대치만 하다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앞으로의 상황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때문에 레베카는 지쳐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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