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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7화 (207/232)

207.

성으로 돌아간 그녀는 주방장에게 기력을 회복시킬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몽블랑 클럽 회원들과 타니샤가 보내온 물품 대부분이 회복에 좋은 음식 재료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나도 같이 돕겠네.”

그때 레베카와 주방장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테오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주방장이 기겁을 하며 그를 만류했다.

“아, 안 됩니다! 자작님께 일을 시켰다는 걸 공작님께서 아시게 되는 날엔 저 모가지입니다.”

“모두가 내 딸을 도우러 힘을 합치는 와중에 우리는 성안에 가만히 있으라니…… 이런 거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나. 내 딸의 일이니까.”

테오가 흘깃 레베카를 돌아봤다.

어느새 그릇을 잔뜩 손에 든 다나에가 다가와 테오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이렇게 많은 손님을 대접하려면 손이 많이 필요하지. 레베카. 이번에는 말리지 말거라.”

“우리도 도울래!”

헤레나와 리비아도 냅킨 바구니를 들고서 뛰어왔다.

레베카는 고집스런 식구들의 얼굴을 보고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녀가 거절할까 긴장하고 있던 오벨리아 사람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주방장은 목을 긁적이며 마지못해 테오에게 칼을 내밀었다.

“어…… 그렇다면 오벨리아 자작님께선 이걸 도와주십시오.”

레베카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족들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주방을 벗어난 그녀는 주치의가 묵는 방으로 가 율리안의 징후에 대해 이것저것 물은 다음 약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침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율리안. 나 왔어.”

레베카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율리안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레베카는 가만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댔다.

다행히 그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레베카는 자그마한 숟가락에 약을 따르곤 그의 입에 흘려넣었다.

마구잡이로 토해내던 지난밤과 달리 그는 안정적으로 약을 받아먹었다.

오늘치의 약을 다 먹인 뒤 레베카는 율리안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거칠었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광대뼈가 도드라진 게 많이 야위어 있었다.

의식도 없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율리안을 보니 문득 병상에서 삶을 마친 이전 생의 그가 떠올랐다.

후계자가 없던 그는 결국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했었다.

지금 그의 모습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레오의 고통을 그대로 짊어진 채 율리안은 말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그가 눈을 뜨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원래의 그의 운명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섬뜩한 상상이 들었다.

레베카는 다급하게 율리안의 손을 잡았다.

처음 그의 손을 잡았던 그때처럼 거칠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레베카는 기도하듯이 그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들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이고르가 말했던 방법밖에 없나 봐…….”

밀려드는 먹먹함에 그녀는 한참 율리안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레베카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곤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가……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릴리도 칸나도, 그리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그 모든 사람들을 내가 지켜낼게.”

레베카는 울음을 집어삼켰다.

“그러니까 당신도 지지 마. 내가 당신을 구해내기까지 이 망할 운명에 굴복하지 마.”

당연하게도 그의 입에서 답이 흘러나오진 않았다.

레베카는 그의 입술에 기나긴 입맞춤을 했다. 버석한 그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베카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공작 성을 흔들고 있었다.

* * *

근래 들어 휑하게 비어 있던 큼직한 식탁은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전에 없던 활기찬 식당 분위기에 주방장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래서 말입니다. 레베카 님. 그자가 저더러 나이를 먹었으면 집에서 수행을 하는 게 미덕이라고 하더군요. 제 머리채를 잡기에 옆구리에 전기를 먹여주었지요. 이 노인네도 한다면 하는 겁니다!”

“뭐가 신의 기사단입니까. 눈을 씻고 봐도 기사도를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자네는 무서워서 숨어 있지 않았나. 그보다 황녀님의 활약이 대단했지.”

저마다 무용담을 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베카는 바쁘게 눈을 돌렸다. 다친 사람이 있을까 싶어 식당을 가득히 메운 사람들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다행히 조금 지친 기색이긴 해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레베카는 안도의 숨을 쉬고 약초를 넣어 만든 스튜를 겨우 떠먹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선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나요?”

카트린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아직 눈을 뜨지 않았네요.”

순간 목으로 넘긴 크림스튜에서 쓴 맛이 났다.

식욕이 달아난 레베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는데 문득 율리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다 먹어야지, 레베카.’

율리안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해 주었을 것이다.

레베카는 눈물을 꾸역꾸역 목 뒤로 넘기며 숟가락을 다부지게 다시 붙잡았다.

묵묵히 스튜를 떠먹고 있을 때 아펠리가 근심이 내려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의 기사단이 언제까지 저자세로 나올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작정하고 우리를 쓸어버리려고 한다면 그땐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카트린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아무래도 방어벽을 좀 더 촘촘하게 짤 방법을 연구해야겠어요.”

“그럼 저희도 체력을 충분히 보충하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을 더 모아볼게요. 라본느의 사람들 말고도 레베카 님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식탁은 또다시 토론의 장이 되어버렸다.

열띤 토론을 지켜보는 레베카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치 상태를 오래 끌면 끌수록 신의 기사단이 마음을 바꿔 강경하게 나올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레베카는 이들을 집에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게다가 지원군이 올 거라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카림 측에선 아직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율리안이 깨어나 준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지겠지만 현재로선 버티는 방법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녀가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크로아가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모처럼 쉬는 시간인데 다른 이야기는 그만하고 휴식에 집중하죠. 후식으론 라본느 살롱의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오오! 그 라본느 살롱 말입니까?”

살롱의 직원들을 제외한 이들의 눈이 대번에 반짝반짝해졌다.

그제야 사람들의 포크질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크로아가 레베카의 스테이크를 손수 썰어주며 말했다.

“자, 부인께서도 식사를 마저 하시지요. 공작님께서 이를 아셨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고마워요. 크로아.”

레베카는 크로아의 바람대로 가니쉬로 나온 야채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꾹꾹 닦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식이 나왔다.

살롱 전체를 털어왔다고 믿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디저트가 식탁 위에 쏟아져나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달콤한 디저트들이 피로한 정신을 잠시나마 위로해주었다.

레베카는 사과 무스를 얹은 푸딩을 집어 들었다.

새콤달콤한 사과향과 함께 부드러운 우유의 풍미가 입안에 감겨드는 게 황홀한 맛이었다.

삐-삐-삐-

순간 귀청을 때리는 듯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본능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예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을 시간이었다.

“이게 대체…….”

“이러고 있지 말고 얼른 나가죠!”

기사단이 기습이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그러기엔 자리를 비운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그렇다면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린 건가?

온갖 생각을 하며 입구로 달려가던 레베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녀를 뒤따라오던 사람들도 함께 멈춰 섰다.

“으아아악!”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를 찔렀다.

레베카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을 텐데. 이 선을 넘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거대한 인영이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짜증난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라트라니스 공작! 민간인을 때리다니, 제정신입니까!”

“민간인이라고? 내 땅에 침범한 사람을 민간인이라 부르나? 이 사람들은 침입자일 뿐이야.”

“여기가 왜 당신 땅입니까!”

카림이 기사단과 대거리를 하는 동안 레베카는 서둘러 대문으로 달려가 쓰러진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신상을 목에 걸고 있었다.

“기사단이 광신도들을 앞세워 습격한 것 같습니다.”

아펠리가 한쪽 천막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연금술사들과 대화를 나누고서 레베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민간인에게 손을 댈 수 없으니 광신도들을 선동해서 싸움을 붙이려는 계획인 게 분명했다.

“아. 공작 부인. 오랜만입니다. 상황이 급박해 인사가 늦었군요.”

기사단을 향해 험한 말을 지껄이던 카림이 레베카를 발견하고 점잖게 인사를 해왔다.

맨손으로 사람을 때리기라도 했는지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베카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습니다.”

“별말씀을. 율리안이 제게 준 연금술사가 마석 마차를 만들어 줬습니다. 그 덕에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군요…….”

레베카가 부리나케 신의 기사단 쪽으로 도망가는 광신도들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이 이가 몇 개는 나가 있거나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들 중에는 귀족들도 있습니다. 혹여나 율리안 때문에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시는 거라면…….”

“아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 녀석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손을 써둔 게 있거든요.”

카림이 주섬주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는 꼬깃꼬깃한 종이가 조금 민망한지 볼을 긁적였다.

“이거, 급하게 오다 보니 모양새가 좀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든 레베카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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