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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08화 (208/232)

208.

그가 내민 종이에는 공작 성으로 이어진 도로 일부분을 카림 라트라니스 공작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부인을 지켜달라고 하더군요. 내가 이걸 가지고 공작 성을 포위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하여간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카림이 호탕하게 웃었다.

“뭐, 그만큼 저를 신뢰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 몇 그루에 먼지만 날리는 이 땅을 꿀꺽할 생각은 없으니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얌전히 돌려드릴 겁니다.”

그의 말에 꼼꼼하게 서류를 살펴보던 레베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율리안은 자신이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카림에게 이런 이상한 부탁을 한 것이었다.

후계자가 공석인 채로 그가 앓아눕는다면 신전이 공작 성을 포위하고 레베카를 압박하려 들지도 모르니 말이다.

율리안의 저의를 알아차린 레베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레베카는 빠르게 눈가를 눌러 닦고는 카림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돌려받은 카림은 보란 듯이 종이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이게 바로 여기가 내 땅이라는 증거다! 이제부터 그 선을 넘어오는 자는 무단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라트라니스의 기사단과 맞서 싸울 배짱이 있는 놈들은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그가 손을 여러 번 튕기자 그의 기사단이 열을 맞춰 전투태세를 다잡았다.

그리고선 카림은 멍하니 서 있는 카트린느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저희가 왔으니 황녀께선 황궁으로 돌아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 비리비리한 녀석들을 데리고 용케 잘 버티셨네요.”

그의 말에 카트린느가 발끈했다.

“비리비리하다니. 이래 봬도 엄청난 실력자들이야. 자네가 와 준 건 고맙지만, 당신 없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고.”

“아, 그러십니까?”

“지금 날 무시하는 겐가?”

카림의 비웃는 듯한 어투에 카트린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녀와 북부 대공의 싸움에 신의 기사단이 주춤거렸다.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라트라니스 공작까지 끼어들었으니 사태가 복잡해졌습니다.”

부하의 말에 로이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원래라면 하루도 걸리지 않을 간단한 임무였다.

신을 기만한 요하네스 공작을 추포해서 심문을 하면 끝이었다.

그의 죄목은 명백했으니 잡아가기만 하면 처벌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그들은 요하네스 공작을 잡기는커녕 대문을 넘지도 못했다.

‘어째서…….’

로이드는 기를 쓰고 요하네스 공작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서로 그다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무리였다.

그나마 요하네스 공작과 깊게 관련된 것 같은 건 연금술사들뿐이었다.

제국민이라면 신의 기사단의 악명을 모르지는 않을 터.

로이드는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이 어째서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은 따라야 했다. 자신은 신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성하의 명이 곧 신의 명령.

자신은 의심 없이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조금 곤란한 상황일 뿐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항상 그랬듯이 신의 기사단은 여신의 행운을 등에 업고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제 몸집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아무튼 난 돌아갈 생각이 없네. 레베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

“마음대로 하십쇼. 대신 황녀님의 안전은 제가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시고요.”

카트린느와 카림은 신의 기사단의 존재는 잊어버린 채 서로 남겠다고 우기기 바빴다.

“꺼져라! 기사단 놈들!”

주먹 한 번에 나가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이지창을 들고서 기사단을 향해 욕설과 침을 뱉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장님!”

그의 부하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려 로이드는 두 눈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카림이 바닥에 그어놓은 선이었다.

선명한 선을 보자 일전 요하네스 공작의 연설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한 걸음만! 단 한 걸음만 내디뎌 보십시오. 용기 있는 그 발걸음을 여신께선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해 주실 겁니다.’

때마침 끊어졌던 붉은 선과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던 제국민들.

귀족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와 신도들을 막으라고 소리를 지르던 교황과 고위 신관들.

신전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그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당신의 자비롭고 평등한 사랑을 지키겠다 맹세하겠습니다.’

하얀 방에서 여신의 초상화 앞에서 맹세했던 그의 결의와 사뭇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이 저주받았다?

그래, 사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전이 그 저주를 이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과연 교황이 공작의 저주를 몰랐을까.

그의 머리가 팽팽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목숨줄처럼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손에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의 거친 손 안에서 데프리아 여신이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그는 여신상을 손에 꾹 쥐고서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싸움을 끝낸 라트라니스 공작과 황녀가 근엄한 얼굴로 기사단을 돌아보았다.

지친 기색의, 그러나 곧은 심지가 느껴지는 약자들이 무기를 손에 꽉 쥐고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베카가, 요하네스 공작 부인이 그 중심에 서서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노을마저 지고 어두컴컴한 땅거미가 내려앉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선 광채가 났다.

로이드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이기지 못하겠군.”

저런 견고한 성벽을 가진 공작을 과연 저주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일단 퇴각…… 퇴각한다.”

* * *

레베카는 입구 너머에서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섬광을 질린다는 듯 바라봤다.

카림이 가세하자 신의 기사단은 원군을 더 끌어모아 본격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트라니스의 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변경에서 마물과 싸우던 이들 눈에 신의 기사단은 천사처럼 상냥한 적이었다.

북부의 기사들은 간만에 찾아온 대결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 신나게 칼을 휘둘렀다.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공격이 이어졌다.

이건 작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카림의 등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카트린느와 몇몇 연금술사들은 그대로 남아 공작 성을 지키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레베카는 창밖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속삭였다.

“조금만 더 버텨주시길…….”

곧이어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거울 앞으로 다가가 짙은 갈색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변장 가면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 급하게 연급술탑에 초상화를 보내 맞춘 것이었다.

흐물거리는 반죽 같은 가면을 얼굴에 쓰자 원래 그녀의 피부인 양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레베카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옷매무새까지 정리한 다음 뒤를 돌아봤다.

“어때? 너와 비슷한 것 같니?”

의자에 묶인 랭스터 후작가의 하녀가 재갈을 물고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녀의 얼굴에 두려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는 릴리의 약을 받아 가기 위해 공작가를 찾아온 하녀였다.

레베카는 먼저 하녀와 호위 기사들을 응접실로 안내한 뒤 극진하게 대우하라 일렀다.

요하네스가는 이제 몰락한 공작가였다.

성 입구의 흉흉한 분위기와 곳곳에 퍼진 암울한 고용인들의 표정이 공작가의 추락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 공작 성에 들어온 이들의 경계심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인질을 잡고 있는 건 랭스터 후작가였고, 아쉬운 건 공작가 쪽이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레베카는 페튜니아가 보낸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하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약을 주겠다는 자신을 따라왔다. 그리고 보기 좋게 의자에 포박당했다.

“읍! 읍! 읍!”

레베카는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하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파란색 눈동자에 키도 얼추 나와 비슷한 것 같구나. 어디 보자, 이름이 리사라고 했었나? 열 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고,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신다고 했지?”

레베카가 가족의 신상을 줄줄이 읊자 리사가 격하게 반항했다.

들썩거리는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베카는 그녀의 재갈을 풀어줬다.

혀가 자유로워지자 리사가 발악을 하며 외쳤다.

“내 가족은 건드리지 마! 이 마녀!”

“마녀?”

“그래. 랭스터 후작님께서 당신은 데프리아 여신의 얼굴을 하고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간악한 마녀라고 하셨어! 요하네스 공작이 저주를 받은 것도 실은 당신이 무슨 술수를 썼기 때문이지?”

“마녀라…….”

곰곰이 그녀의 말을 곱씹던 레베카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들어봤던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구나. 그래. 나는 지옥에서 환생한 마녀야. 날 괴롭힌 것들을 지옥에 처박기 위해 돌아왔지.”

레베카는 리사의 볼을 톡톡 쳤다. 리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걱정 마. 네가 허튼 짓만 하지 않는다면 사지 멀쩡하게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넌 랭스터에게 단단히 세뇌당한 것 같구나. 그자의 정체를 알고서도 이렇게 충성하는 걸 보면 그래.”

“세뇌라니. 축복이야! 그분께선 진정한 여신의 사람이시다. 요하네스 공작 따위는 비교가 안 되지.”

“그 열정을 다른 곳에 부었다면 진작에 성공하고도 남았을 텐데 안타깝구나.”

“어차피 넌 그분께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해. 여신께서 그분을 지켜주실 테니!”

“그건 두고 봐야지. 행운이 과연 누구 편일지는.”

레베카는 섬찟한 미소를 남긴 채 방을 떠났다.

리사는 레베카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며 저주를 내리는 기도문을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 * *

“약을 받아왔으니 이만 가죠.”

레베카는 리사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흉내 내며 디저트를 즐기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기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에게 꽂혔다.

레베카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태연하게 약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다행히 기사들은 하녀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저흰 이만…….”

벨마가 그들을 배웅했다.

안주인인 레베카가 나오지 않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이 상황에 반갑게 배웅한다는 게 더 이상했다.

기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후작가의 하녀가 마차에 오르는 걸 무심하게 바라봤다.

후작가에 도착한 레베카는 잠시 멍해졌다.

랭스터 후작저는 일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손님이나 주인이 쓰는 장소는 익숙했지만 고용인들이 쓰는 곳은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페튜니아가 보낸 랭스터 후작가의 지도를 머릿속에 열심히 떠올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그때 구세주처럼 노부인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베카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하녀장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릴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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