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레베카가 머뭇거리고 있자 하녀장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손에 들린 약 꾸러미를 보았다.
“약을 가져온 모양이구나. 그럼 곧바로 내게 가져왔어야지. 왜 그러고 있어?”
“아. 잠시 현기증이 일어서……. 여기 있습니다.”
하녀장은 조금 이상한 듯 레베카를 바라봤지만 곧 그녀의 손에 들린 약 봉투에 신경을 뺏겼다.
하녀장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별일은 없었고? 라트라니스 공작이 요하네스를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이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때문에 별말 없이 약을 내주었습니다.”
“흠, 생각보다 아이를 애지중지하는가 보군. 좋아. 수고했어.”
레베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
그때 하녀장이 의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평소랑 목소리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말투도 그렇고?”
순간 아차 싶었지만 레베카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겨울이라 목이 쉰 것 같아요.”
“어휴. 그러게 내가 항시 목을 따뜻하게 하고 다니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스카프부터 매도록 해.”
하녀장은 혀를 끌끌 차며 별다른 의심 없이 레베카를 보내주었다.
“하아…….”
뻣뻣하게 긴장된 그녀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
레베카는 서둘러 칸나와 릴리가 잡혀 있을 별채를 찾았다.
‘서쪽의 첨탑 지붕이 있는 곳이라고 했지…….’
한참을 헤매던 레베카는 겨우 서쪽 별채를 찾아냈다.
경비가 삼엄한 걸 보니 제대로 찾은 듯싶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시기상조였다.
‘리사는 별채의 청소 담당이라고 했었어.’
아직 정보가 모자랐다. 레베카가 페튜니아를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이런 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 * *
리사가 공작 성으로 떠난 뒤 페튜니아는 방 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웨슬리와의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는 레베카의 협박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이 자신이 한 짓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아들의 목숨을 살려야 했다.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밀던 레베카는 예전에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능히 웨슬리의 연약한 목 정도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웨슬리…….”
그녀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페튜니아는 망연자실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웨슬리의 서신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고 남편에게 알렸지만 그는 질린다는 듯 페튜니아에게 말했다.
‘서신이 늦게 도착하는 건 흔한 일이야. 호들갑 떨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극성 엄마 취급을 하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레베카가 협박을 했다고 알릴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미 레베카의 부탁을 들어준 뒤였다.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을 터.
자신의 남편은 상벌에 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분노한 남편이 레베카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웨슬리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페튜니아가 랭스터 후작 부인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없다는 것과 제 목숨에 관한 지나친 염려 덕분이었다.
랭스터 후작의 정부로 살면서 그녀는 후작이 알려진 것처럼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정식 후작 부인이 되어서도 정체 모를 별채에 관해서 일절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묻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랭스터는 이를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아들의 목숨이 달렸다.
페튜니아는 별채와 남편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페튜니아는 피투성이가 된 칸나를 목격했을 때를 떠올렸다. 정원을 산책하다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이었다.
항상 레베카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아이였기에 페튜니아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별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다친 사람이 끌려가는 건 처음 봤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울음소리가 별채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페튜니아는 그 아이가 레베카가 그토록 찾는 릴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알프레도 랭스터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런 그의 실체가 어찌 됐든 페튜니아는 제 외아들을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웨슬리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레베카에게 협조를 하는 게 중요했다.
레베카의 뒤통수를 치는 건 웨슬리를 구하고 난 뒤에도 늦지 않았다.
“마님, 리사가 돌아왔는데요?”
하인의 묵직한 목소리에 페튜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사의 행방에 대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일러둔 참이었다.
페튜니아는 허겁지겁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레베카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제대로 일러주지 않았다. 그저 별채에서 일하는, 푸른 눈의 키가 큰 하녀를 보내라는 말만 전했다.
‘웨슬리의 소식을 가져왔을지도 몰라.’
페튜니아는 리사를 찾아 헤맸다. 별채 근처에서 그녀를 찾아낸 페튜니아는 성마르게 그녀를 돌려세웠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리고 리사가 입을 열었을 때 페튜니아는 경악했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레베카가 본래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 페튜니아.”
“레, 레베카? 설마 네가 직접 온 거야? 너, 미쳤어?”
“내가 미쳤다는 거 잘 알 텐데 뭘 새삼스럽게. 잘됐어. 네게 물어볼 게 아주 많았거든.”
“이, 일단 이곳은 위험해.”
페튜니아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레베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곤 인적 드문 정원의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어릴 때 이후로 처음 잡는 페튜니아의 손에 레베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페튜니아와 자신은 미래의 남편을 그리며 달콤한 상상을 나눴었다.
어느 나라의 왕자님일까, 웨딩드레스는 어떤 디자인이 좋을까, 하는 철없는 꿈을 함께 꿨었다.
그리고 그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따뜻하고 보드랍던 페튜니아의 손은 차갑고 앙상하게 변해버렸다.
레베카는 그녀의 가느다란 약지에서 번쩍이는 커다란 결혼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런 그녀에게 페튜니아가 성마르게 질문을 던졌다.
“웨슬리는, 내 아들은 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말이야.”
레베카는 기나긴 설명 대신 손수건을 내밀었다. 페튜니아가 수를 놓아 아들에게 선물한 손수건이었다.
페튜니아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새하얀 손수건에 피라도 묻지 않았는지 자세히 살폈다.
페튜니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내 아들은 아무 죄가 없잖아.”
“릴리와 칸나도 아무 죄가 없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내 남편이 한 짓이라고!”
“알아. 그러니까 일을 제대로 해 준다면 네 아들을 사지 멀쩡하게 돌려 보내주겠다고 하잖아.”
“넌 정말이지…….”
“다시 한번 말할게. 조용히 협조해. 네 남편에게 알릴 생각은 하지 말고.”
페튜니아가 흠칫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실 그녀는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곧장 남편에게 이를 생각이었다.
레베카는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쓸며 말했다.
“남편에게 말하면 웨슬리는 죽어. 네가 허튼 수작을 해도 죽어. 만약 릴리나 칸나에게 무슨 변고가 일어난다면 그 아이에게 똑같이 해주겠어. 그러니 잔말 말고 내 말에 따라. 네 남편이 망하더라도 네게 살 길을 열어줄 테니까.”
“그 말은 우리 가문이 망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았어? 랭스터 후작이 뭔가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
페튜니아는 대꾸할 말을 찾으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귀에 대고 레베카가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아주 벼르고 계셔. 자그마한 증거 하나라도 나오는 날에 어떻게 될지 눈에 선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 자그마한 증거를 찾아낼 작정이야.”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웨슬리를 생각해야지, 페튜니아. 아들 대신 남편의 가문을 택할 셈이야?”
“독한 것. 어떻게 자식을 가지고 부모를 협박할 수가 있어?”
“네가 신나게 떠들고 다닌 것처럼 난 아이를 가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이런 짓도 얼마든지 가능해.”
냉정한 말투와 달리 바투 다가온 레베카의 눈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페튜니아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그 대답을 원했어.”
레베카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리사라는 아이의 일과를 빠짐없이 내게 전해줬으면 좋겠어. 아무런 의심 없이 녹아들 수 있도록.”
“그건 어렵지 않지만…… 진짜로 별채에 들어갈 생각이야? 별채 사람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너 혼자서 그 두 사람을 직접 구해낼 순 없을 거야.”
“난 혼자라고 말한 적 없는데? 페튜니아, 내 걱정할 시간에 네 아들 걱정이나 해.”
페튜니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내 아들을 굶기거나 때리는 건 아니겠지? 애가 강해 보여도 많이 연약해서…….”
“난 그러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워낙 거친 사람들이라 웨슬리가 짜증나게 군다면 알 수 없는 일이지.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해. 웨슬리를 구해내는 데 시간만 더 걸릴 뿐이니까.”
“알았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게 다야? 널 별채 안으로 무사히 넣어주는 거?”
“아니. 한 가지 더 있어.”
레베카는 제 머리까지 내려온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검 두 자루를 구해다 줬으면 좋겠어.”
“검을……?”
“그래. 아주 날카롭고 숨기기 좋은 검 말이야.”
* * *
칸나가 빈 접시를 들고 방을 나서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하인 한 명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신의 축복이 내린 좋은 저녁입니다.”
칸나도 인사에 화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당신의 저녁에 행운이 깃들기를.”
하인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를 지나쳐 갔다.
릴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칸나는 안톤에게 세뇌된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지 않게 서서히 그의 계략에 말려들어 간 척했다.
어려운 대상을 공략했다는 사실에 안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능력에 심취한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칸나를 하얀 방에서 풀어줬다.
칸나는 큰 어려움 없이 별채의 고용인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그들의 호감을 사는 건 간단했다. 여신을 찬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