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그래도 소름 끼치는 건 영 적응이 안 되네.’
칸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제 손등을 바라봤다.
별채에 있는 사람들은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여신을 들먹거리며 찬양해대는 꼴이 기괴하다 못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만큼 기분 나쁜 곳이었다.
칸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향했다.
별채는 데프리아교의 광신도를 육성해내는 곳 같았다. 부엌부터 시작해 기사들의 숙소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본채가 평범한 귀족 집안이라면 이곳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아. 칸나 자매님. 빈 그릇은 제게 주십시오.”
하녀가 방긋 웃으며 칸나에게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일전에 레베카의 쪽지를 건네준 하녀였다.
별채에서 지낸 지 꽤 오래된 하녀라고 했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눈의 초점이 바로잡혀 있었다.
칸나가 그녀에게 속삭이듯이 말을 걸었다.
“레오 님이 혹시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신가요? 축복을 받고 싶어서요.”
하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빠르게 주변을 확인한 하녀가 서둘러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분의 행방은 장로님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칸나의 얼굴 위로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주방장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하녀는 주방장이 식료품을 고르는 걸 흘깃 쳐다봤다. 그러곤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그녀에게 약 봉투와 물컵을 내밀었다.
“조사 결과, 약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확실히 구하기 힘든 약재들로 만들어졌더군요. 릴리 아가씨의 쾌차를 빕니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감사합니다. 여신께서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으실 겁니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칸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릴리와 자신이 용케 탈출한다고 해도 레오가 인질로 잡혀 있는 한 끝없는 투쟁이 계속될 뿐이었다.
‘분명 별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식료품 창고에 개박하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미뤄봤을 때 레오가 이곳에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본채만큼 널따란 이곳을 다 뒤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철저하게 가둬뒀는지 레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하며 방에 들어선 칸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청소가 다 끝났습니다.”
방 청소를 도맡아 하는 리사라는 하녀였다.
“감사합니다. 여신의 축복이…….”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던 칸나가 잠시 멈칫했다.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침대 위에 누운 릴리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리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칸나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레베카 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칸나는 레베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칸나는 벅찬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레베카도 먹먹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먼지떨이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칸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복도에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칸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베카가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칸나는 미끄러지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레베카의 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윽고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가 칸나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커튼 뒤에 두 자루의 검을 숨겨뒀어. 너희 둘 실력이면 충분히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레오 님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일단 너희 먼저 탈출해. 레오는 내가 찾아서 나갈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함께 탈출한 다음 방법을 모색하시죠.”
“하지만…….”
“같이 나갈 겁니다.”
레베카는 그녀를 더 설득하려다가 단호한 칸나의 눈매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칸나를 찾는 동안 충분히 맛보았다.
레베카는 자그맣게 숨을 내쉬곤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겠어. 그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잘 버텨주길 바랄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예. 신의 행운이 깃들기를.”
레베카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안에서 자신을 찾는 릴리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베키! 베키!”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약해지지 말자.’
그녀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을 털어냈다.
‘내가 모두를 구해내겠어.’
* * *
크로아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공작의 침실은 전날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대로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율리안도 어제와 같이 눈을 감고 있었다.
크로아는 음울하게 율리안을 내려다보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활짝 열자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퀴퀴한 공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얼음장 같은 겨울바람이 크로아의 코끝에 닿았다.
“으으…… 추워라.”
크로아는 양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는 어느 정도 환기가 끝났다 싶어 다시 창문을 닫았다.
난로에 마른 장작을 여러 개 넣고 풀무질을 하자 훈훈한 기운이 서서히 방 안에 차올랐다.
크로아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평화롭게 타들어 가는 장작을 뒤적거렸다.
원래라면 하인에게 시켜도 될 법한 일이었지만 레베카는 율리안이 쓰러진 뒤로 이곳을 직접 돌보았다. 그리고 레베카가 없는 동안은 크로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크로아는 숯과 물을 담은 유리그릇을 가져다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두었다.
겨울에 율리안은 쉽게 얼굴이 퍼석해지곤 했다.
그런 그를 위해 크로아는 습기를 내뿜는 숯을 가져다두곤 했다.
“공작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크로아는 손수 약을 떠서 율리안의 입에 흘러 넣었다. 심장에 좋다는 약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
크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베카는 결국 랭스터 후작저에 직접 쳐들어갔다. 레베카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크로아는 그녀를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기필코 모두를 구해내고 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크로아는 율리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레베카 님께서 고군분투하고 계시니까 어서 빨리 일어나세요.”
“…….”
역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크로아는 실망 어린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곤 등을 돌려서 나가려는데 묵직한 손길이 그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레베카가…… 내 아내가 어쨌다고?”
크로아가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율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고, 공작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로 율리안이 음습하게 읊조렸다.
“레베카는 지금 어디 있지?”
* * *
“아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물 한 컵을 들이켜더니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혼잣말이 이어졌다.
퀭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그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오래 누워 있어 그의 머리가 어딘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었다.
크로아는 한 시간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초조하게 그의 결단을 기다리며 크로아는 애꿎은 휴지조각을 갈기갈기 찢었다.
“레베카가 거기에 가 있어. 그녀와 만날 기회를 어떻게든 잡아봐. 적당한 타이밍에 내가 갈 테니까. 그래. 몸조심하고.”
말을 마친 율리안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는 피곤한 듯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크로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소리쳤다.
“누구와 그렇게 대화를 하신 겁니까? 혹시라도 환청이 들리시는 거라면…….”
“크로아. 난 미친 게 아니야. 내가 이런 식으로 대화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당연히 레오지.”
“레오 님이요?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대화가 통한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가능해. 이상하게 신성력이 넘쳐흘러. 이것 봐.”
율리안이 손을 폈다. 그러자 황금색 빛줄기가 그의 심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금빛이 방 안에 가득 찼다.
크로아는 그 찬란한 빛에 눈을 뜰 수조차 없어서 무릎을 꿇었다.
“그, 그만. 그만하십시오!”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신기하게 관찰하던 율리안이 크로아의 비명에 얼른 빛을 거둬들였다.
“미안하군. 나도 처음인지라……. 괜찮나?”
크로아는 율리안이 내민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그는 눈을 벅벅 비비며 말했다.
“확실히 전에 없던 신성력이군요. 이 정도면 신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겠어요. 제 눈이 멀 뻔했습니다!”
“신의 강림이라…….”
율리안이 눈을 빛냈다.
“좋은 생각이군. 지금 당장 황제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잠시만요. 공작님! 지금 성안에는 손님들이 우글거린다고요. 그 꼴로 나가시게요?”
“손님이라니?”
크로아는 얼른 셔츠와 조끼를 가져와 반라 상태의 그에게 내밀었다.
율리안이 옷을 입는 동안 크로아는 그가 혼수상태였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전열을 가다듬으려는지 신의 기사단이 잠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라 라트라니스 공작님과 카트린느 황녀님께선 여전히 성에 계십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율리안은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그러니까 그동안 레베카가 썩은 계란을 맞았다는 거야?”
“공작 부인께서 맞으신 게 아니고 마차랑 성문에 던졌다니까요. 그나저나 분노하는 포인트가 그거예요? 아니, 신의 기사단이 공작 성을 공격했다니까요?”
“레베카가 얼마나 놀랐겠어? 이 씹어먹어도 모자를 자식들을…….”
“정작 레베카 님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는데요? 라본느 살롱의 낙서를 보시곤 아예 검은색 페인트를 칠해버리셨어요. 나쁜 쪽이긴 하나 그 덕에 화제가 돼서 살롱이 다시 살아났지만요.”
크로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율리안은 이를 뿌득 갈기만 했다.
“감히 레베카에게 그딴 짓을 해?”
“아휴. 듣지도 않으시네. 여하튼 서신을 보낼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로비로 내려오셔서 손님들께 인사나 하세요.”
“한시가 급해. 그건 나중에 해도…….”
“레베카 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뭐라고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