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크로아의 협박 아닌 협박에 율리안은 신음을 흘렸다.
“눈을 치켜뜨고 혼쭐을 내겠지. 젠장. 지금은 그 모습마저도 보고 싶어 죽겠어. 그녀의 얼굴을 못 본 지 대체 얼마나 된 거지?”
율리안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크로아는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니 얼른 움직이셔야죠. 인사를 하고! 레오 님과 무슨 음모를 꾸미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하시고요!”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레베카와 칸나를 같이 찾으러 가기로 약속했었지. 그런데 약속 시간에 너무 늦어버렸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숙녀분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셔야죠.”
크로아는 쾌재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 당분간 레베카 핑계가 잘 먹힐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율리안은 주먹에 힘을 줬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을 뿐 쓰러져 있는 동안 그의 의식은 살아 있었다.
레베카가 눈물로 속삭이던 말들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구해줄게, 율리안.’
그녀는 이미 자신을 구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며 율리안은 세차게 뛰는 심장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 * *
레베카는 종종걸음으로 별채를 누볐다.
청소 하녀로 변장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느 장소에 섞여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별채는 오층까지 있는 큰 건물이었다. 방마다 기도 제단이 있어 마치 작은 신전과도 같았다.
레베카는 커다란 데프리아 여신상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사층까지는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대부분 데프리아교의 신도들이 묵는 방이 전부였다.
마치 광신도를 양성해내는 곳처럼 섬뜩한 기도 소리가 별채 안에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광신도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궁금했는데. 여기였구나.’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음산한 기도 소리에 레베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서둘러 기도실을 벗어나 오층 계단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오층의 입구는 쇠창살로 된 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상주하는 기사까지 있었다.
레베카는 층계를 빗자루로 쓰는 척하며 한발 한발 위층으로 향했다.
오층까지 가는 계단을 반쯤 올랐을 즈음 기사가 반응했다.
“뭐하는 거지? 이곳의 청소는 네 담당이 아닐 텐데?”
레베카는 쇠창살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곤 고개를 얼른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신의 말씀을 되새기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기사가 손을 홰홰 저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기사에게 레베카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가, 갑자기 왜 저러시지?”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쇠창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혹여나 그 소리를 하녀가 들었는가 싶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하녀는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레베카는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쇠창살 안에는 여태껏 본 적 없이 화려한 황금색 문이 하나 더 있었다. 황금 문엔 데프리아 여신의 모습이 음각으로 새겨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오던 고양이 울음소리를 레베카는 똑똑하게 알아들었다.
‘레베카! 나 여기 있어! 율리안이 깨어났어!’
레오였다.
그의 전언을 똑똑하게 들은 레베카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율리안이 깨어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 * *
“이제 도장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부동산 중개인의 설명에 따라 베이츠는 계약서에 도장을 꾹 눌러찍었다.
중개인이 돈주머니를 짤랑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자. 이제 저택은 기사님의 것입니다.”
베이츠는 멀거니 저택을 올려다봤다.
데본셔만큼은 아니더라도 큰 저택이었다. 특히 사시사철 흐드러지게 꽃이 핀다는 정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서리가 내려앉은 정원 위에 봄이 찾아오는 걸 상상했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꽃을 꺾고 그 옆에서 아서가 뛰어노는 걸 머릿속에 그렸다.
여태껏 견뎌왔던 지저분한 일들의 보상 같은 광경이었다.
그가 사냥개로 지내며 모은 돈은 꽤 큰 돈이었다.
옥타비오에게 속아 알리시아를 취했던 날, 베이츠는 직감했다.
자신은 저 여자에게 평생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자는 레베카의 하녀가 되고, 제 주인의 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제 아이를 가졌으나 그 또한 제 주인의 아이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베이츠가 이를 악물고 돈을 끌어모은 것은.
알리시아는 보석과 값비싼 물건들을 사랑했다. 그는 종종 장신구 따위를 사서 몰래 알리시아의 보석함에 넣어두곤 했다.
워낙 많은 보석에 그녀는 자신이 산 거라 착각하고 이따금씩 베이츠가 넣어둔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 다녔다.
그건 베이츠의 메마른 삶의 유일한 빛이었다.
그리고 제플린이 무너졌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몰락할 것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침몰하는 배 위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베이츠는 그래도 수긍했다. 그는 알리시아의 행복을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내했다. 레베카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을 때도 인내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원하는 걸 얻었다.
‘베이츠, 도망갈래요. 우리 도망가요. 이제 이런 거 다 지긋지긋해. 데본셔도 레베카도 다 싫어.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나와 아서를 데려가 줘요.’
사실 제플린의 서신은 테디에게 제때 도착했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집행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여기까지 내려온 건 순전히 알리시아와 도망칠 경로를 미리 알아두려는 목적에서였다.
‘데본셔 백작님의 명이 떨어졌다. 몇 명만 남고 전원 북쪽 별장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베이츠는 제플린이 훗날 자신들을 쉽게 추적할 수 없도록 기사들을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자신과 알리시아의 도망을 제플린이 알아차렸을 땐 이미 멀리 떨어진 이 아름다운 저택에 숨어든 뒤일 것이다.
베이츠는 흐뭇하게 미래를 그리며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요기나 할 겸 식당에 들렀다.
그는 해산물을 잔뜩 넣은 파스타를 주문하곤 여유롭게 음식을 기다렸다.
남부의 바닷가는 겨울에도 따뜻했기에 그는 테라스에 앉아 평화로운 풍경을 만끽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여럿 들어왔다.
‘기사들……? 저자는 서몬드 백작가의 기사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블란쳇 남작가의 기사도 있군. 영지에 있어야 할 기사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
베이츠는 구석 자리에 몸을 숨기고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다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신귀족의 기사들이 항구에 바글거렸다. 그중에는 황실 해군 복장을 한 이들도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필 감옥 섬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 황제의 편에 선 가문의 기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니.
‘분명 황제와 요하네스 공작이 손을 잡았다고 했었지.’
그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은밀히 기사들에게 접근했다.
“배는 전부 준비되었네. 내일 대량의 물자가 들어갈 예정이야. 수송선에 공간을 마련해뒀으니 미리 승선해 있게.”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나 특이한 목소리로 베이츠는 그가 파블로 자작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놀라운 광경에 그는 물을 뿜을 뻔했다.
“밀림에 대부분의 경비 인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뒤로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츠는 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진 흉터를 똑똑히 보았다.
‘로버트……! 죽은 게 아니었어?’
분명히 자신이 그의 시체를 운반했었다. 화장장에 들어가는 것까지 제 두 눈으로 확인했다.
베이츠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 모든 게 요하네스 공작, 아니 레베카의 계략인가?’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모든 정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저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감옥 섬의 인질들을 구출해내는 것.
하지만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라면 내전 규모로 일이 커질 것이었다.
빛의 장미는 감옥 섬 안에 연금술 무기를 잔뜩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편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실력 있는 기사들에 황실 해군, 그리고 율리안의 연금술탑까지.
그 누구도 승리를 쉽게 거머쥘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제플린에게 알릴지 아니면 율리안에게 알릴지 고민했다.
순간 종업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베이츠의 시선이 김이 모락모락나는 파스타를 향했다.
신선한 해산물이 탱글탱글하게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는 충성심을 내버린 지 오래였다. 율리안에 대한 의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알리시아와 아서의 행복을 향하고 있었다.
베이츠는 파스타를 포크로 둘둘 말았다.
“오히려 잘됐어.”
감옥 섬에 제플린의 신경이 쏠린다면 야반도주 따위는 그리 큰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감옥 섬을 지켜야 데본셔가가 다시 살아날 테니.
베이츠는 주변에서 무슨 말이 들리든지 신경 쓰지 않고 무감하게 포크질을 계속했다.
그는 여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 * *
자신이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것을 알게 된 레베카는 그동안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신성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치유를 하거나 몸을 돌처럼 굳힐 수 있거나 불을 뿜거나 하는 초능력적인 힘을 쓸 수 있었다.
물론 신성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두가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드문 현상이었다.
레베카의 신성력은 타인을 설득하는 힘을 지녔다.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상대방을 조종할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이었다.
하지만 강한 힘에는 으레 제약이 따르듯이 그녀의 힘에도 조건이 있었다.
“이걸 릴리 아가씨께 가져다주시겠어요?”
레베카가 당근 케이크를 하녀에게 건넸다.
“원래 사식은 따로 드릴 수 없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별채의 간식들은 너무 달아서요. 칸나 자매가 따로 제게 부탁한 거예요. 릴리 아가씨가 아마도 로렌의 여동생 또래였지요? 이맘때쯤의 아이들이 간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요.”
말을 마친 레베카는 단전에서 호흡을 끌어올렸다. 일순 로렌의 눈동자에 황금빛 이채가 맴돌았다.
그러자 로렌은 미간을 펴곤 레베카가 건넨 당근 케이크를 받아들였다.
“그렇죠. 아픈 아이들은 금세 지치니까요. 저도 제 여동생이 아플 때마다 사탕을 하나씩 주곤 했답니다. 칸나 자매님께서 오시면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