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레베카는 쾌재를 불렀다. 신성력이 발현되려면 틈이 필요했다.
그 틈은 상대방의 과거사가 될 수도 있었고, 그의 욕망일 수도 있었다.
로렌의 경우 그녀에겐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동생이 있었다. 레베카는 그 틈을 파고들어 그녀를 설득한 것이다.
그러니 신성력을 쓰기 위해선 상대방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
느닷없이 죽으라는 명령을 하거나 돈을 가져다 달라는 명령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다만 효과는 확실했다. 신성력에 설득된 사람들은 방금 내린 결정이 자신의 판단이라 굳게 믿었다.
레베카가 교묘하게 상황을 몰고 간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새삼 위험한 능력이야.’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실감하곤 페튜니아와 약속한 장소로 발을 옮겼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에 코끝이 시렸다. 레베카는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종종걸음으로 별채를 빠져나갔다.
일전 대화를 나누었던 나무 아래에서 페튜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 네가 부탁한 기사의 신상이야.”
레베카는 그녀가 건넨 서류를 무심하게 훑어봤다.
“수고했어. 의외로 별채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남편이 별채에 대해 네게 숨기는 거 아니었나?”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이래 봬도 난 랭스터 후작가의 안주인이야. 내 말에 충성하는 하인들이 여럿이야. 남편 몰래 그런 신상 조사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하긴, 너도 한때엔 여왕이란 소리를 들었으니까.”
“한때 아니야. 되찾을 거야.”
“그래. 어디 한번 잘 해봐. 날 도와줬으니 약속대로 웨슬리는 사흘 뒤에 네 친정으로 보내줄게.”
“저, 정말이야? 그때까지 네가 탈출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난 약속은 지켜. 그리고 너도 당분간 친정에 가 있는 게 좋을 거야.”
“그, 그건 왜?”
레베카가 하얗게 번지는 입김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곳에 곧 피바람이 불 거야. 넌 네 남편이 한 짓과 딱히 상관없어 보이니 함께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면 몸을 피해. 물론 여기에 남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설득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페튜니아는 웨슬리 걱정에 지금 당장이라도 친정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피바람이 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페튜니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 택했다.
남편이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건 그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 레베카의 말대로 잠시간 떠나 있는 게 웨슬리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일지도 몰랐다.
“약속…… 꼭 지켜.”
“당연하지.”
멀어지는 페튜니아를 배웅하며 레베카는 다시 서류를 훑었다.
총기 어린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 * *
“칸나, 이것 봐.”
당근 케이크를 뒤적이던 릴리가 케이크 안에서 동그란 초콜릿을 찾아냈다.
초콜릿을 부숴보니 안에서 기다란 종이가 나왔다.
릴리와 칸나는 머리를 맞대고서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레오를 찾았어. 오늘 오후 다섯 시까지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칼을 들어. 탈출이야.>
릴리가 칸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드디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야?”
“레베카 님께서 준비하라 하셨으니 그럴 겁니다.”
둘은 희망이 가득 찬 눈빛을 주고받았다.
칸나는 다 꺼져 가는 불씨 안에 쪽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난로 안을 더듬거려 숨겨둔 칼이 제대로 잘 있는지 확인했다.
릴리의 방은 하녀 여럿이 교대로 청소를 했다. 리사가 이 방을 청소하러 오는 건 사흘에 한 번이었다.
칸나 또한 음식을 가지러 가거나 기도 시간 이외엔 꼼짝없이 릴리와 같은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때문에 레베카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릴리와 칸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레베카가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다섯 시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뎅-뎅-뎅-뎅-뎅-
괘종시계가 다섯 번의 종을 쳤다. 그리고 그때까지 노크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칸나가 비장한 얼굴로 난로 안에서 두 자루의 칼을 꺼냈다.
숯검정을 닦아내자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자태를 드러냈다.
칸나는 칼 한 자루를 릴리에게 건넸다.
릴리는 익숙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능숙하게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칸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리를 굽혀 릴리와 눈을 맞췄다.
“지금부턴 훈련 따위가 아니라 실전입니다. 아가씨께서 실력으로 밀리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사람을 죽이지 마십시오.”
“응……?”
“칼을 휘두르다 보면 피치못할 사건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사람을 죽이지 마십시오. 살인에 한번 발을 들인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그 고단한 길을 걷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칸나가 처음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 릴리의 나이 즈음이었다. 분명히 죽여 마땅한 이였지만 칸나는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금 상태론 릴리는 기사를 꿈꾸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 과정에서 살상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최대한 늦추는 게 좋았다.
“여차하면 제가 대신 죽이겠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치명상을 입히되 목숨을 앗아가진 마세요. 저와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릴리는 칸나의 단호하나 따뜻한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레베카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릴리는 입을 앙다물고 대차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나는 약속한 건 절대 지켜!”
칸나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앙증맞은 릴리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좋습니다. 제가 그려드린 지도는 기억하고 계시죠? 입구까지 길이 조금 복잡합니다.”
“응. 기억하고 있어.”
둘은 손을 맞잡았다. 릴리가 한 손에 다부지게 검을 들고서 말했다.
“이제 레베카를 만나러 가자!”
* * *
“그랬군요. 그래도 기사단에서 쫓아내는 건 너무했네요.”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레베카는 벌써 몇십 분째 올리버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오층을 지키고 있는 기사였다. 그녀는 식사 당번을 자청해 그에게 접근했다.
“부덕이라니요. 여신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행운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사단에서 쫓겨난 게 오히려 행운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리사 자매님 덕분에 울적했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실은 오늘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 이곳 사람들과도 잘 못 지냈던지라…….”
“어머. 생일이셨어요? 이거 선물이 없어서 어쩌죠? 미리 알았더라면 뭐라도 가져왔을 텐데요.”
사실 알고 있었다. 그의 생년월일부터 시작해 그가 단체 생활에 적응을 못한 탓에 신의 기사단에서 쫓겨난 사실까지도.
올리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식사 이외에 가져다주신 케이크로도 충분합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께선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셔도 되는 겁니까?”
“아, 사실 제가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예? 자매님은 친구들이 많지 않습니까?”
“보기에는 그럴지 몰라도 전 항상 겉돌았답니다. 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는 게 참 힘든 일이네요.”
“리사 자매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계셨다니 의외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저희를 온전히 이해해주시는 여신님께 항상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지요.”
레베카의 말에 올리버는 크게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지금이다.’
레베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이어 심장이 꽉 죄어들더니 올리버의 눈에 황금색 빛무리가 떠올랐다.
신성력을 쓸 때마다 항상 남의 힘을 억지로 끌어오는 것 같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는 꺼림칙한 기분을 몰아내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면 무언가 증거를 보고 싶을 때가 있지요. 예를 들면 신의 사자의 존안을 뵙고 싶다든가…….”
“신의 사자라면…….”
“하지만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요. 저같이 비천한 자가 어찌 그분을 뵐 수 있겠어요.”
올리버는 레베카의 낙담한 얼굴을 보다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실 수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예……?”
“실은 저 문 안에 신의 사자가 계십니다. 일전 그 탄생절의 소란을 틈타 빛의 장미께서 그분을 보호하시고 있거든요. 사악한 요하네스 공작이 신의 사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어머나. 그거 큰일이군요. 그런데 정말 제가 그분을 봬도 괜찮을까요?”
“당연합니다. 리사 자매님처럼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라면 사자께서도 반기실 겁니다.”
올리버는 계단 밑을 살피며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아마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잠시라면 괜찮을 거예요. 어서 들어가서 신의 사자께 축복을 받고 오세요. 저도 한 번 뵈었는데 그 덕분에 리사 자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올리버.”
그가 황금 문을 열었다.
레베카는 문고리를 돌리기 전 그를 보며 말했다.
“만약 이곳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체 말고 도망가세요. 당신이 그동안 무슨 일을 했든지 간에 저에겐 큰 도움을 주었으니 드리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레베카는 마저 대답을 하지 않고 황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올리버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레베카는 빠르게 문을 잠갔다. 그리고 허리춤의 리본을 풀어서 문고리에 칭칭 감은 뒤 벽걸이에 걸었다.
뒤를 돌아본 레베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윽…….”
방 안에는 향이 자욱하게 퍼져 있어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손부채질을 해가며 방 안을 둘러봤다.
“레오!”
레베카는 기도 제단 앞에 쓰러져 있는 레오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아무래도 이 향은 고양이 마취향이 틀림없었다.
어쩐지 울음소리가 그동안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레오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그를 기절시켜둔 것이었다.
‘신의 사자라고 떠받들더니…….’
신앙심도 그들의 탐욕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