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레베카는 서둘러 향을 끄고 레오를 깨웠다. 물을 몇 번 그의 얼굴에 끼얹자 다행히 그는 정신을 차렸다.
‘너는…….’
“그래. 레오, 나야! 네가 부르는 걸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아직도 퍼져 있는 매캐한 향냄새를 킁킁거리더니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황금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그의 콧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흐리멍덩하게 퍼져 있던 레오의 눈이 또렷해졌다.
‘이런 술수를 썼을 줄이야……. 저들의 깍듯한 태도에 내가 잠시 방심한 모양이야.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군.’
담담하게 말하는 레오를 레베카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품에서 잠시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얼굴을 비볐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레오.”
‘왜 네가 사과하지? 날 찌른 건 제플린 데본셔야.’
“그래도 그와 엮이게 된 건 다 내 탓…….”
‘됐어. 널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난 널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건 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수용한다는 의미야.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말을 마친 레오가 검은 솜방망이 같은 앞발을 레베카의 이마 위에 턱하고 올렸다.
‘너와 통하고 나서부터 네가 그동안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어. 나약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짊어졌구나.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잘했다. 레베카.’
투툭-
율리안이 쓰러졌을 때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이제야 흐르기 시작했다.
신이 위로를 해준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의 자그마한 앞발을 통해 온몸 구석구석으로 따스한 온기가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주륵주륵 얼굴 위로 흘러내려 가면이 흐물흐물해졌다.
레오가 레베카를 보고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이런,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만. 그……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우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아…… 이거.”
레베카가 망설임 없이 가면을 얼굴에서 뜯어냈다. 그 기괴한 모습에 레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레베카는 얼굴에 남은 찌꺼기까지 다 털어냈다.
“내 진짜 피부는 아니야.”
‘정말 인간들은 이상한 물건을 잘도 만들어내는군. 그런데 지금 가면을 벗어도 되는 건가?’
“응. 율리안이 올 거잖아. 이제 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지.”
‘너희 둘 사이의 신뢰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레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사이 레베카는 방 안을 세심히 살폈다.
밖에 쇠창살까지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귀중한 걸 숨겨두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조금 전에 문고리가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이면 올리버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레베카는 서둘러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제발…….’
기도 제단을 부술 듯이 찾는 그녀를 보고 레오가 말했다.
‘은밀한 걸 찾는 거라면 저기 여신상 밑에 금고가 있어.’
레베카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요하네스 공작 중에서 율리안만큼 나와 통하는 이가 없었지.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몇 없어. 그래서 그런지 방심하고 모든 걸 보여주더군.’
그의 말에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의 말대로 여신상을 들자 금고가 나왔다.
‘내가 열어주지.’
레오가 금고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검은색 오라가 금고를 감싸더니 곧 걸쇠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는 금고 안을 뒤졌다. 금고 안에는 두툼한 장부와 함께 빛의 장미가 그간 했던 일들을 모아둔 일지가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일지를 펼쳤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적힌 부분을 찢어내서 속옷 안에 쑤셔 넣었다.
그때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졌다.
“쥐새끼처럼 숨어들었군.”
안으로 들이닥친 안톤과 랭스터 후작이 차갑게 레베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톤이 바닥에 널브러진 장부 더미와 금고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번갈아 봤다.
“대체 저걸 어떻게……!”
안톤과 랭스터 후작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둘의 눈짓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안톤은 금고로 뛰쳐가고, 후작은 레베카를 향해 돌진했다.
살기가 감도는 랭스터 후작의 얼굴을 마주한 레베카가 다급하게 외쳤다.
“레오! 지금 당장 율리안에게……!”
“어딜 감히 마녀 따위가 신의 사자께 말을 올리느냐!”
“으윽…….”
레베카가 허벅지에 달린 총에 손을 뻗기도 전에 랭스터 후작이 그녀를 덮쳤다.
그는 무릎으로 레베카의 다리를 찍어누르면서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세게 그러쥐었다.
랭스터 후작이 레베카의 머리를 뽑아버릴 기세로 그녀의 얼굴을 드세게 흔들어 젖혔다
“감히 내 아들을 볼모로 아내를 겁박해서 이곳에 숨어들어?”
‘페튜니아가 결국 불었나 보구나.’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랭스터 후작은 그녀의 남편이었고, 레베카의 말을 냉큼 들을 만큼 페튜니아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했다. 어째서 자신이 살길을 열어주었는데도 하나같이 죽을 길을 고르는지.
“예전부터 넌 마음에 들지 않았지. 오늘 널 여신께 제물로 바치고 축복을 받아야겠다.”
“푸하! 당신의 그 더러운 손으로 바치는 재물을 과연 여신께서 받아주실까?”
확연히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레베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레베카는 제 양 볼을 거칠게 짓누르는 후작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후작에게 눌린 다리가 부서질 듯이 아파 왔다.
그래도 레베카는 웃었다.
그녀는 랭스터 후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조소가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랭스터 후작이 잠시 움찔했다.
레베카가 숨을 헐떡이며 읊조렸다.
“과연 누가 제물로 바쳐질지 내기를 해도 좋아. 난 당신이 죽는다에 두둑하게 돈을 걸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구나. 좋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내가 널 죽여…….”
레베카를 때려 죽일 기세로 그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순간 거대한 황금빛이 방 안을 감쌌다.
“이…… 이게 무슨!”
장부를 한데 모아 성냥불을 붙이던 안톤이 느닷없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오가 황금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진 것이다.
랭스터 후작은 주먹을 그대로 들어올린 채 신묘한 빛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빛무리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내 아내에게서 손 떼!”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랭스터 후작의 얼굴이 돌아갔다. 일 미터 남짓을 날아가 벽에 세게 머리를 부딪힌 그는 일격에 정신을 잃었다.
“율리안!”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근거리는 그에게 레베카가 와락 안겨들었다. 매섭게 금빛을 뿜어내던 그의 눈이 금방 풀어졌다.
율리안이 눈썹을 늘어뜨린 채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디 봐. 젠장. 얼굴에 멍이 들었잖아!”
율리안은 꼭 제가 아픈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레베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아프지 않았어. 당신이 겪었던 그 고통에 비하면.”
“늦게 와서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괜찮아. 아주 적절할 때 왔어.”
레베카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생생하게 움직이는 그를 보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일까.
기뻐서 죽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 같았다.
“요, 요하네스 공작?”
안톤이 입을 틀어막고 율리안을 바라봤다.
“방금 분명의 사자께서 저기에…… 아니 사자께서는 어디 갔지?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의 새된 목소리에 율리안과 레베카는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레베카는 불타는 금고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얼른 달려가 불을 끄고 쓸 만한 서류들을 추려 모았다.
그녀의 모습을 흘깃 보던 율리안이 손을 우두둑 꺾으며 안톤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바로 마지막 빛의 장미로군. 그동안 내 가문을 가지고 놀아서 즐거웠나?”
“거, 거기 아무도 없어?”
사신처럼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그를 본 안톤이 질겁을 하며 사람들을 불렀다.
하지만 아래층에도 난리가 났는지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율리안이 사나운 눈을 부릅떴다.
“감히 내 여동생을 납치하다니. 칸나를 고문한 것도 너라고 했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이, 이곳엔 몇백의 사병이 있어.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쉽게 감당할 수 없을걸!”
말을 마친 안톤은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람을 모아오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어딜!”
율리안이 그의 뒤를 쫓다가 멈춰섰다. 도망간 줄 알았던 그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며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양손을 치켜든 그를 예리한 칼날이 위협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 찾았어?”
칼을 치켜든 릴리가 해맑게 웃으며 율리안을 돌아봤다.
“릴리!”
“어라? 오빠! 깨어났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나가셔야 합니다.”
칸나가 계단 위를 뛰쳐 올라오는 경비병 하나를 간단하게 제압하고서 등장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에 율리안이 옅게 웃었다.
“너도 무사했군.”
“당연하죠. 전 누구와 달리 약골이 아니니까요.”
“뭐라고?”
“이자를 포박하면 되는 겁니까?”
칸나는 발끈하는 율리안의 말을 가볍게 일축하곤 밧줄을 찾아냈다. 그리고 안톤을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챙길 만한 건 다 챙겼어. 이제 가자.”
레베카가 미쳐 다 타지 못한 장부 몇 개를 큰 담요 안에 넣은 다음 어깨에서 허리까지 사선으로 단단히 매었다.
그녀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던 칸나가 계단 아래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별채로 몰려오는 이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고용인들도 저마다 무기를 들고 덤비고 있어요.”
“괜찮아. 내가 다 해치울 수 있어!”
릴리가 가슴께를 팡팡 두드리며 자신 있게 소리쳤다.
율리안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것참 든든하군. 들었지, 레베카?”
“응. 우리라면 할 수 있어.”
레베카는 어느새 손에 총을 빼 들고는 비장하게 얼굴을 굳혔다.
“자, 이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