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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14화 (214/232)

214.

자신들의 수장이 사로잡힌 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별채의 입구엔 무장한 기사 수십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별채의 고용인들과 이곳에 묶고 있는 신자들도 눈을 시퍼렇게 치켜뜬 채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이 악마의 자식들아! 여기서 성히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곳은! 데프리아 여신의 축복이 내린 곳이다. 여신께서 너희들을 엄벌하실 것이다!”

그들은 여신상을 무기처럼 손에 들고 악마를 퇴치하겠다는 듯 율리안의 앞에 들이밀었다.

율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주받은 공작에서 이제는 악마 새끼야? 이거 그다음은 무엇일지 궁금하군. 이왕이면 마왕이 좋겠는데.”

“시, 시끄럽다! 여신의 엄벌을!”

“시끄러운 건 당신이지.”

율리안이 긴 팔을 뻗어 여신상을 그의 손에서 쳐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신상의 목이 뚝하고 날아가버렸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율리안이 고개를 쳐들고선 나긋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악마 새끼에서 악마로 승진시켜주는 건가?”

“이…… 이! 뭣들 하시는 겁니까! 저 사악한 놈들을 잡아들이십시오!”

분노한 신자들이 아우성쳤다.

기사들이 검을 다시 그러쥐자 율리안은 안톤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안톤이 발버둥을 쳤다.

“이자를 살리고 싶다면 우릴 보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는 검을 안톤의 목 밑에 바짝 대었다. 그의 여린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읍! 읍! 으읍!”

입에 헝겊을 문 안톤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율리안을 자극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주춤거리던 기사들이 옆으로 길을 텄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는 양 옆으로 갈라진 인파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갔다. 칸나와 릴리가 레베카를 가운데 두고 그녀를 엄호하며 율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별채를 나선 레베카는 눈앞의 광경에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요하네스 공작은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일자로 늘어선 기사들이 입구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길을 터줬던 사람들도 서둘러 뛰쳐나와 퇴로를 막았다.

“이 정도로 나와줘야 재밌지.”

율리안은 안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그의 몸뚱이에 발을 올리고 장검을 그의 목에 세웠다. 뾰족한 칼날의 끝이 안톤의 목을 파고들었다.

“끄으으읍!”

안톤의 비명이 재갈 사이로 흘러나왔다.

거센 겨울바람이 불어와 율리안의 망토가 공중에서 휘날렸다.

그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지금부터 누구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이자는 죽는다! 내 심장에 총알이 파고들어도 이놈 하나만큼은 죽이고 갈 테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

“상관없습니다!”

뜻밖의 소리에 안톤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고 기사를 바라봤다.

“안톤 님께선 저희에게 여신을 위한 희생은 고귀하다고 항상 이야기하셨습니다. 천국의 문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값진 희생이라고요. 그러니 여신을 모독한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안톤 님께선 기꺼이 목숨을 바치실 겁니다!”

기사 측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안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 네가 한 말에 네가 죽게 생겼네.”

안톤은 거세게 몸을 꿈틀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곤란하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기사들을 살펴보는 레베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실수였다. 별채에 상주하는 기사들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레오를 구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랭스터가의 기사들은 고려하지 못했다.

별채의 앞뜰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생각해내. 생각해내, 레베카.’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여기서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어.’

그녀는 막대한 책임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레베카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율리안이 레베카의 손을 넌지시 잡았다.

“잊었어? 당신, 혼자가 아니야.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

“뭐……?”

“드디어 왔군.”

멍해진 레베카는 씨익 올라가는 율리안의 입꼬리를 바라봤다.

“황실 기사단이다! 대역죄인들은 당장 무기를 버려라!”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백마를 탄 황실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왔다.

랭스터가의 기사들은 총구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황실 기사단장이 위엄 있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발포하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랭스터가의 기사단장이 즉각 항의를 하며 뛰쳐나왔다.

“무슨 근거로 이러신단 말씀입니까!”

“이곳에서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

“말도 안 되는……! 증좌가 있습니까?”

“증좌라면 여기 있습니다.”

레베카가 담요를 끌러서 장부를 꺼냈다.

반쯤은 소실된 장부를 살펴보던 황실 기사단장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증좌가 이게 답니까?”

“역모라니! 당치도 않소!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 우릴 끌고 갈 수 없을 거요!”

황실 기사가 안톤의 재갈을 풀어주자 그가 크게 외쳤다.

‘태워두길 잘했어.’

그는 자신의 혜안에 감탄하며 율리안을 노려봤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빛의 장미가 아니었다.

레베카는 의기양양해 하는 안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레베카가 천천히 드레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율리안이 기겁을 하며 망토로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

“레베카! 뭐, 뭐하는 거야?”

“잠시만…….”

레베카는 속옷 안에 숨겨뒀던 일지를 한 장씩 꺼내 들었다. 칸나가 얼른 다가와 레베카가 건네는 꾸깃꾸깃한 종이를 정리했다.

“고마워. 칸나.”

레베카는 옷매무새를 살핀 뒤 정리한 종이 더미를 가지고 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기사단장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샅샅이 훑었다.

“자히드라 황제를 시해하려 했던 계획이 이곳에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일어났던 식량 약탈 사건과 다수의 납치 및 감금의 정황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내가 다 태웠는데 어떻게 거기에……!”

깜짝 놀란 안톤이 말을 내뱉었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다가 허를 찔린 탓에 그의 판단력이 잠시 흐려졌다. 안톤은 제 입을 바닥에 처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베카가 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방금 저자의 말로 진의가 증명된 것 같군요. 불에 타기 전의 일지엔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본이라는 뜻이겠지요. 아마 별채나 신전을 조사하시면 원본이 나올 겁니다.”

“부인의 말씀대로 반역의 증거로 충분하겠군요. 그리고 만약 원본이 신전에서 나온다면 그 또한 엄청난 일이 될 겁니다.”

“황제께 바치는 제 충심이라 전해주십시오.”

레베카가 우아하게 다리를 굽혔다. 기사단장이 감복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크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이 역당의 무리를 잡아들여라!”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황실 기사단장이 율리안에게 은밀히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 공작께서 여기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의 기사단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거 잘됐군.”

“예?”

“그동안 난리를 쳐둬서 신의 기사단이 바짝 약이 올라 있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날 확실히 잡으려 많은 인원을 움직였겠지.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자네들이 신전을 습격하게.”

황실 기사단장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율리안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내가 장담하건대, 원본은 분명히 신전이나 카지노에 있을 걸세. 그 두 군데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란 말이야. 폐하께 선물을 가져다드리면 참 좋아하시겠지. 자네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실 수도 있고.”

“조, 좋은 생각이십니다.”

율리안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곤 칸나와 릴리 사이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가냘픈 등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유, 율리안?”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자.”

그는 레베카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었다.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얼굴이 불타오르는 레베카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율리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가씨. 저희는 잠시 저쪽으로 가 있죠.”

“왜? 한참 재밌어지려고 하는…….”

칸나가 릴리를 질질 끌고서 황실 기사단들 사이로 사라졌다.

뚱하게 있던 릴리는 곧이어 실력 있는 기사들과의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율리안이 좀 더 그녀를 품 안에 꽉 껴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레베카. 눈을 감고 있을 때도 항상 널 그렸어.”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레베카는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도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매일 네 얼굴을 봤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어.”

율리안이 레베카를 돌려세웠다. 그는 레베카를 마주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꼼꼼하게 그녀를 눈 안에 담았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뭔지 알아?”

“뭔데?”

“드디어 목소리만이 아닌 얼굴을 볼 수 있겠다는 거.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께 감사 인사를 했어.”

“내 목소리……? 설마 당신, 깨어 있었던 거야? 줄곧?”

레베카는 쓰러진 그의 앞에서 주절거렸던 말들을 상기하고 경악에 휩싸였다.

저주에 관해 주절거린 게 있나 싶어 그녀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율리안이 그런 레베카의 콧잔등을 툭 치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솔직히 말하자면 감동받았는걸. 당신이 날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거든.”

사랑이란 말에 레베카는 멈칫했다. 율리안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댔다.

그는 황금빛 눈을 번뜩이며 속삭였다.

“나 사랑하지? 레베카.”

그를 볼 때마다 언제나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던 단어였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는 낼 수 없었다.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아슬아슬한 제 결심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율리안을 구해내겠다는 다짐이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가 젖어들 것이었다.

레베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머뭇거림이 율리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나, 나는…… 윽!”

“레베카! 왜 그래?”

돌연 레베카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아픈 거야?”

율리안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순간 율리안도 외마디의 신음을 흘렸다.

“으윽…….”

둘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서로를 마주 봤다. 환한 황금빛이 율리안과 레베카의 심장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둘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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