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사탕수수 수확이 끝이나 감옥 섬의 인질들은 휴식기를 맞았다. 그들은 동굴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앉아 점심을 함께하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기사들이 모조리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기에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림자 기사들은 알아서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고 했으나 동굴 속 사람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우린 작은 것이라도 항상 다 같이 나눠 먹고 살았네.”
다행히 기사들이 밤바다 몰래 밖에서 사냥을 해온 덕에 식량난은 조금씩 해결되고 있었다.
그때 라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라엘! 내가 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니!”
라엘은 호통치는 어머니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피해갔다.
그는 동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태어나서 화산섬의 밀림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동굴의 아이’라고 불렀다.
라엘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이노텐 님을…… 이노텐 님을 수장시키겠대요! 근데 수장이 뭐죠?”
“뭐라고……?”
하리샤가 숟가락을 툭하고 떨어뜨렸다.
샬럿이 라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자세히 말해봐. 수장이라니? 바다에 빠트린다고?”
“아! 수장이 그 의미예요?”
라엘은 새로운 단어를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헉! 잠시만요.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이노텐 님은 불인데 바다에 빠지면…….”
“불사의 몸이시긴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
샬럿이 말꼬리를 흐렸다. 곧장 식욕이 달아나 버렸다.
사람들은 그릇을 내려놓고 수군거렸다.
“이러지 말고 구해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던 분입니다.”
“맞아요. 이렇게 손 놓고 사태를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애초에 이노텐 님이 끌려가는 걸 막았어야 했어요.”
이윽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저마다 이노텐을 구해낼 방도를 꺼내놨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때 버틀리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모두가 말을 멈추고 버틀리를 바라봤다.
“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요?”
“육지에서 전서구가 왔습니다. 내일 우리를 구할 사람들이 올 겁니다. 여러 가문에서 차출된 기사들이 수송선을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황실 해군도 동원될 거라 하더군요.”
“화, 화, 황실 해군이요?”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황제니 제국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던 사람들에게 그의 말은 현실성이 없었다.
버틀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끔뻑거리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여줬다.
“이것 보십시오. 믿기시지 않겠지만 제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리고…….”
버틀리가 머뭇거리다가 하리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로울리 부인. 수송선에는 로버트도 함께 타고 있다고 합니다.”
“제 아들이…… 살아 있다고요?”
“부인!”
하리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버틀리가 빠르게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돌바닥에 머리를 찧고 말았을 것이다.
하리샤가 눈물을 주륵주륵 흘렀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예. 그동안 죽은 척 위장을 하고 모두를 살릴 방도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애는요? 우리 애 소식은 없나요?”
사냥개의 부모들이 매달리듯이 버클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버틀리가 퍽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모든 자제분의 소식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여러분의 가족들께서 힘을 써주신 덕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아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하리샤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샬럿이 비장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일 산책 시간에 맞춰 기사들이 밀림을 습격할 겁니다. 동굴을 지키는 경비병은 저희 선에서 처리할 테니, 여러분께선 지시에 맞춰 침착하게 움직여주십시오. 밀림을 벗어나면 인파 속에 섞여 준비된 배를 탈 겁니다.”
“그냥 이 근처에 배를 대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이 근방은 배가 다니는 길목이 아니라 금방 탄로 날 겁니다.”
“알겠어요.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어요. 여기서 늙어 죽느니 위험하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고 죽는 게 더 나아요.”
“그럼 모두들 동의하시는 겁니까……?”
버틀리가 찬찬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이곳에 지내는 것에 이골이 났다.
그리고 이노텐이 끌려간 이후로 자신도 언제 그런 꼴이 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이노텐 님을 먼저 구하면 안 될까요?”
하리샤가 눈물을 거두고서 말했다.
“그분과 꼭 같이 나가고 싶어요. 저희의 삶의 이정표 같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퍼진 카디르교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제발 이노텐 님을 구해주세요!”
버틀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부하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구출하라고 부탁하셨으니까요. 그분을…… 사람이라고 지칭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해질녘에 수장을 한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방해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번에도 그분의 목을 내리친다는 걸 저희가 막았으니까요.”
“예. 처형을 내일까지만이라도 미룰 수 있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저희가 뒤에서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돕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런 식으로…….”
샬럿이 나서서 이노텐을 구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의지를 불태우는 가운데 돌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책 시간이다!”
입구 쪽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나갈 일이 없는 겨울에 인질들은 하루 종일 동굴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밤낮을 알 수 없는 일과를 못 견디고 미쳐버리는 사람이 속출하자 겨울엔 의무적으로 하루 한 시간씩 산책을 하는 시간이 생겼다.
“그럼 가시죠.”
“예.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림자 기사단을 남겨둔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린 라엘도 자신이 맡은 막대한 임무를 상기하며 자그마한 손을 다부지게 쥐었다.
* * *
여기저기 흩어져서 산책을 하던 사람들은 경비원을 흘깃흘깃 바라봤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경계는 느슨해졌다. 수십 년간 어떤 인질도 탈출한 적이 없었고 외부에 들킨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산책하러 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구석에서 잡담을 나누며 낄낄거리고 있던 테디가 손목시계를 흘깃 확인했다.
“자! 이제 다시 집으로 들어갈 시간이야! 다들 일렬로 맞춰서 서. 인원을 파악해야 하니까.”
샬럿이 라엘의 엄마 루시아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곧이어 루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라엘! 내 아들, 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모두의 이목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됐다.
테디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라엘이 없어졌어요! 분명히 아까까지 제 곁에 있었는데…….”
“제기랄. 그 악동 녀석 결국 일을 치는구먼. 우리가 찾아둘 테니 당신들은 먼저 들어가 있으쇼.”
“싫어요!”
루시아가 소릴 빽 질렀다. 그동안 얌전했던 그녀였기에 테디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제 아들이에요! 찾아도 제가 찾겠어요!”
“맞습니다. 저희 아들은 저희가 책임져야지요.”
테디는 강경한 부모의 태도를 보고 목을 쓸었다.
그때 샬럿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희도 같이 찾겠어요. 여기 뒷산엔 독사가 살잖아요. 이 근방은 어린아이 혼자 다니기엔 너무 위험해요.”
“흐음, 하지만 아가씨…….”
“여기서 어린아이가 죽는다면 테디도 꺼림칙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그래도 라엘을 아꼈잖아요.”
“누, 누가 아꼈다는 겁니까. 간식 몇 번 준 거 가지고…….”
“그냥 찾기만 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가지 말아야 할 곳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니 걱정 마세요.”
너도나도 샬럿의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결국 테디가 두 손을 들었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대신 경비원들과 짝지어서 돌아다녀야 해.”
루시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사람들은 섬을 돌아다니며 라엘을 찾기 시작했다.
“라엘! 라엘! 어딨니!”
하지만 아무리 찾아 헤매도 작은 꼬마는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 한 명이 초조하게 테디에게 물었다.
“곧 이노텐을 수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젠장. 해가 지고 나면 확인하기 힘든데……. 라엘 녀석이 발목을 잡는군.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어. 이러다가 우리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고! 어디 구석진 곳에 가서 던져야지 어쩌겠어.”
테디의 지시에 경비병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샬럿이 그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몰래 뒤를 따랐다.
“저기 용머리 절벽에서 밀어버리라 하시는군.”
“근데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저주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
“저주에 걸리기 전에 목숨줄이 끊기게 생겼어. 빨리 움직여.”
곧이어 경비병들 손에 얼굴에 자루를 쓴 이노텐이 끌려나왔다.
그들은 절벽 끝에 그를 세워두고 발에 무거운 추를 달았다.
“이게 다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지시니 저희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노텐은 말이 없었다. 그는 어떤 운명이 와도 순응하겠다는 듯 담담하게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경비병이 그를 밀려고 하는 그때 샬럿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아, 아가씨?”
“이노텐 님을 죽이시려거든 저도 같이 죽여야 할 거예요! 데본셔 백작의 사촌인 저를 감히 죽일 수 있겠어요?”
“맞아요! 이노텐 님을 풀어주세요!”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라엘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경비병의 발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저씨, 이노텐 님은 착한 사람이에요. 해치지 마세요. 네?”
“크윽…….”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망울에 경비병이 주춤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의 눈앞에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두세요!”
“이노텐 님을 죽이면 천벌을 받습니다!”
“이노텐 님!”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인질들까지 우르르 절벽을 향해 몰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테디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허겁지겁 달려와 사태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노텐 님!”
“이것들이 날 가지고 놀아? 거기 너! 그냥 밀어버려!”
“예?”
“밀어버리라고!”
“안 됩니다!”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테디는 거미줄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들을 쳐내면서 소릴 질렀다.
“그냥 밀어버리라고! 데본셔 백작한테 죽고 싶어?”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경비병이 라엘을 밀치고선 샬럿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다른 경비병이 이노텐을 밀쳤다.
풍덩-
이노텐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불을 집어삼킨 바다가 거센 파도를 내뱉었다.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절벽 위에 주저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