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테디가 흙투성이가 된 옷을 탈탈 털며 말했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주니 다들 처지를 잊었나 본데. 너희들은 인질…….”
테디에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눈에 핏발을 세우고 그를 돌아봤다.
그 살벌한 눈빛에 테디가 주춤거렸다.
“뭐, 뭐! 그렇게 노려보면 너희가 어쩔 건데?”
“기도를 합시다.”
“뭐?”
“다 같이 기도합시다. 카디르 신께서 이노텐 님을 구해주실 수 있도록!”
“그럽시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무릎을 꿇었다. 딱딱한 돌멩이가 얇은 옷자락을 파고들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기도를 올렸다.
곧이어 송가가 울려 퍼졌다.
“지혜의 헌신이시여. 불쌍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심장이 이 땅에 있으니, 심장의 고동 소리를 깊게 들어주소서. 행운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축복으로 이 풍파를 이겨내게 하소서. 환난 가운데서 지혜는 더욱 빛나나니, 불을 내려주소서.”
파도가 은은한 반주처럼 절벽에 부딪혔다.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마지막 기염을 토해내며 세상을 벌겋게 물들였다.
절벽 위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간절하게 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했다.
“마,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서라. 너 담배 없냐?”
“여기 있습니다.”
테디는 자욱한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눈감아줘야 저 사람들도 내일을 살아갈 거 아니야.”
기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울음 섞인 외침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한 걸까 일순 땅이 흔들렸다.
쿠르릉-
“뭐, 뭐지……?”
“지진 아닙니까? 이전에도 종종 있었으니…….”
“아니. 뭔가 이상해.”
“가, 감독관님. 저, 저기!”
다급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테디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하고 떨어졌다.
화산 분출구에서 구름 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 * *
‘그분께선 나를 버렸는가.’
깊은 심해 속으로 잠기면서 이노텐은 생각했다.
그는 카디르의 분신이었다.
인간에게 지혜를 나눠주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간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의 전언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난도질했다.
그래도 그는 이 땅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심장이었으므로.
어느 순간 데프리아 여신이 제국을 차지했다. 곧이어 자신과 이어져 있던 카디르 신의 기운이 사라졌다.
결국 그는 이 이상한 곳에 갇혔다.
그는 기다렸다. 이곳 사람들에게 신의 지혜를 나눠주며 자신을 잊어버린 신을 기다렸다.
인간들이 카디르의 이름을 부르짖을수록 그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어젯밤 그는 드디어 신과 연결된 미세한 운명의 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노텐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신께서 나를 찾으신다.’
그가 호흡하자 얼굴에 쓴 자루에 불이 붙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푸른 불꽃이 물속에서 넘실거렸다.
그의 손발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이노텐은 섬의 뿌리가 맞닿아 있는 밑바닥으로 헤엄쳐 내려갔다.
“보채지 마라. 이제 네 잠을 깨워주마.”
이노텐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께에서 황금빛이 점점 번지더니 온몸이 황금색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섬의 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섬은 그가 내뿜는 불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섬은 이노텐은 자신이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을 끌어당겼다. 신이 곳곳에 뿌려뒀던 힘까지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식욕이었다.
곧이어 오랜 잠에 빠져 있던 섬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율리안과 레베카가 기절했을 무렵, 공작 성에 있던 레오도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참을 아래로 가라앉던 그는 오래된 기억에 맞닿았다.
애써 외면했던 고통스런 기억이었다.
“신의 사자. 난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알아? 난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을 만큼 너와 여신을 싫어한다고! 이 바보! 해삼! 멍텅구리!”
가출한 그가 걱정되어 따라 나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율리안은 자신의 존재조차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솜털이 부숭부숭한 어린 율리안이 그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그래. 죽자. 다 같이 죽어버리자. 신성력을 바닥까지 다 써버리면 나도 죽을 수 있을지도…….’
레오는 그길로 곧장 자신이 현신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신전이었다. 데프리아 여신을 이 땅에 탄생시킨 겨울 장미가 피어난 곳이었다.
인간 중에서 이곳을 정확히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레오는 허름한 신전의 제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제단 위에 놓인 여신상에 앞발을 올렸다.
여신상이 들고 있는 장미 조각상에서 빛이 났다.
레오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광채가 동굴 안의 자그마한 신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쿠르릉-
레오의 손에서 검은 오라와 금빛 오라가 번갈아 나왔다. 여신상은 파괴와 재생을 반복했다.
남은 신성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어린 여자아이가 그를 간호하고 있었다.
기억을 엿보던 레오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
‘레베카.’
기억 속 레오는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졸지에 동굴 속에 갇히게 된 신세였지만 어린 레베카는 침착했다.
그녀는 레오를 간호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참 똑똑한 아이였다.
불안정한 신성력 때문인지 레오는 율리안과 몸을 여러 번 바꿨다. 레베카는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율리안도 정성스레 보살폈다.
어느새 레오는 안정을 되찾았다.
빌어먹을 요하네스 공작은 신성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레오는 율리안과 몸을 바꾸는 걸 그만두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 레베카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동굴 속의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었다.
“눈을 떴구나…… 다행이다…….”
제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레베카는 배시시 웃으며 레오를 쓰다듬었다.
레오가 눈을 크게 떴다.
‘아아…….’
그랬다. 그는 인간의 이런 점을 사랑했었다. 한낱 미물 주제에 놀라울 만큼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기특하고 애처로워 지켜주고 싶었다.
레오는 눈을 까뒤집기 시작한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이마를 대었다.
맞닿은 이마 사이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레오는 자신이 가진 신성력의 절반을 그녀의 심장으로 건넸다.
‘나와 율리안의 목숨을 살렸으니 네게 두 번의 기적을 선물하겠다.’
그의 신성력을 흡수한 레베카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오는 잠에 든 레베카를 바라보다 크게 울부짖었다. 그의 울음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곧이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막혀 있던 동굴의 입구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을 따라 레오는 다시 기억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태초의 기억까지 헤엄쳐갔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심장을 만났다.
이윽고 레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레오 님!”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크로아가 눈에 들어왔다.
레오의 태양 같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 * *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에 레베카는 눈을 떴다.
마치 시간을 도려낸 듯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베카!”
율리안이 깨어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여긴……?”
“라본느 살롱이야. 신의 기사단의 눈을 피해 우릴 이곳으로 옮겼더군.”
“우리? 당신도 쓰러졌었어? 아야…….”
지끈거리는 두통에 레베카는 머리를 싸맸다.
“자. 어지러울 테니 이걸 마시면 좀 나을 거야.”
레베카는 그가 건넨 음료를 마시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동시에 쓰러지다니…….”
“누군가 우리의 신성력을 흡수했어.”
율리안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 황금빛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넘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 신성력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당신의 신성력이 없어진 것 같더군. 수정구가 당신에게 전혀 반응하지 않았어. 예전에는 빛이 났다고 했었지?”
“뭐? 레오와 이야기는 해봤어?”
“레오도 잘 모른대.”
“그렇구나…….”
신성력이 없어졌다면 더이상 레오와 대화를 나눌 수도, 신이한 능력도 쓸 수 없다는 의미였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씁쓸하게 웃던 레베카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신의 기사단은 어떻게 됐어? 신전 측은?”
“아, 그거…….”
율리안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카림이 나로 변장을 하고 신의 기사단을 따돌리고 있어. 아주 신이 나셨더군. 그사이에 황실 기사단이 신전에 들이닥쳤고, 그곳에서 일지의 원본을 찾아냈어. 자히드라를 시해할 백한 가지의 방법이 적힌 일지를 말이야.”
“그럼 결론이 났네.”
“그래. 신전은 이제 끝났어.”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이 없었더라면 난 시작할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레베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나는 당신의 등을 떠밀어준 것뿐이야. 시작한 것도 당신이고, 여기까지 끌어낸 것도 당신이야. 축하해, 율리안.”
“아직 축하는 이르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레베카. 그리고 무엇보다…….”
율리안이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당신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기절해 있었던 거 알아?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
“지금은 별로 식욕이…….”
레베카가 거절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말씀하신 음식 가져왔습니다.”
“아주 주도면밀하게 준비해뒀구나.”
아무래도 미리 음식을 대기해둔 모양이었다.
레베카의 한숨을 모른 척하고서 율리안이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 트레이를 받아들고 왔다.
트레이엔 고기 육수로 만든 크림스튜와 부드러운 빵이 담겨 있었다.
“음식 넘기기 힘들 테니 가벼운 걸로 준비했어. 자, 아-해.”
레베카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마지못해 그가 내민 스튜를 받아먹었다.
“잘 먹네.”
그는 레베카의 입에서 음식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음 숟가락을 떠밀었다.
이번에는 잘게 자른 빵을 띄운 스튜였다.
부드럽고 뜨끈한 스튜가 목으로 꿀떡꿀떡 넘어갔다.
율리안의 입술 위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