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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19화 (219/232)

219.

자히드라는 엄숙하게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다가 손을 들었다.

군중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짐은! 최근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매우 통탄하는 바이오. 국민들도 나와 심정이 다르지는 않을 터. 그러니 나는 감히 반역을 꾀하고 데프리아 여신의 존함을 어지럽힌 무뢰배들을 철저하게 응징할 생각이오. 법무 대신!”

황제의 부름에 법무 대신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흠흠! 이고르 미치와 제플린 데본셔 백작은 행방이 묘연해 판결을 내릴 수 없었으나, 사안의 심각함과 명확한 증거를 고려해 피고인들의 재판 참석 여부와 관계없이 판결을 내렸음을 고지합니다.”

말을 마친 법무 대신은 빙글 몸을 돌려 자히드라에게 판결문을 내밀었다.

그의 불같은 성격처럼 자히드라는 연설을 할 때 말을 끄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간결하게 필요한 정보만을 이야기했다.

“카지노 확률 조작 및 인신매매 및 각종 사기와 공갈 협박, 그리고 황제 시해 건으로 데스라치노 교황에게 사형을 선포한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교황의 목을 단두대에 내걸다니, 마녀사냥 때 이후로 유례없는 일이었다.

곳곳에 숨어 있던 광신도들이 수군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형이라니요! 교황님께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누르려는 듯 자히드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에 공조한 볼리바르 추기경, 사형! 유리시아 대신관, 사형. 제임스 대신관, 사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시한 자칭 빛의 장미 장로회의 알프레도 랭스터 후작과 안톤 왓슨 백작의 모든 작위와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한다. 같은 빛의 장미인 이고르 미치에게도 사형을 선포한다.”

그 이후로 자히드라는 줄줄이 사건과 연관된 이들의 이름을 읊었다.

“사형…… 사형…… 사형…… 사형이다!”

군중들의 얼굴엔 이제 경악을 넘어 두려움이 서렸다.

자히드라가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을 치켜뜨고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수십 년간 사람들을 섬에 납치 및 감금하고 각종 사기죄와 협박을 일삼은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재산을 모두 국고로 몰수하고 그의 직위를 박탈한다. 그리고 그 또한 사형을 선포한다.”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자히드라가 지팡이를 연단에 거세게 내리치자 그제야 광장에 다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자히드라는 헛기침을 하고 마지막 판결문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에 대한 판결을 내리겠다. 그는 저주받은 사실을 숨기고 그동안 여신의 축복을 받은 행세를 하며 신전과 제국을 속여 막대한 이익을 받았다. 이에 마땅히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하나…….”

소란스럽게 떠들던 자들도 이제 입을 딱 다물고선 이 피의 재판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반역을 밝혀낸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므로 사기죄에 대한 벌금과 더 이상 신전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형벌을 갈무리한다. 또한 반란 이전 요하네스가의 작위였던 백작으로 그의 작위를 강등한다.”

드디어 누군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히드라는 다시 인자한 황제의 얼굴로 돌아왔다.

“무거운 죄를 지었다면 마땅한 형벌을 받을 것이고 공을 세웠다면 그만큼의 상을 받을 것이다. 오늘 재판 결과에 이의가 있는 자는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 내 친히 귀를 기울일 것이다. 다만 명확한 증거 없이 그저 감형을 호소한다면 황실을 어지럽힌 죄를 물을 것이다.”

이의가 있다면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자비로운 군주의 면모만 보여줬던 자히드라의 새로운 모습에 제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다.

“황제 폐하께서 원래 저런 이미지였나……?”

“어질기만 하시던 분이 어찌 이런 무서운 판결을 내리셨을까?”

“그만큼 죄질이 나쁘다는 거겠지. 폐하께서 어디 허투루 협박하시는 거 봤어?”

“그나저나 신전의 사람들이 다 처형됐으니 데프리아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자히드라의 의도대로 군중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던 기자들은 서둘러 자신이 추측한 바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소란을 즐기던 그의 시선이 문득 레베카를 향했다.

‘신전, 요하네스, 라트라니스, 그리고 데본셔. 그 네 개의 세력을 폐하의 발아래 바치겠습니다. 그리하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제국이 탄생할 겁니다.’

자히드라는 레베카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약속을 떠올렸다.

순간 레베카가 얼굴을 들었다. 황제와 레베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손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레베카는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말대로 되지 않았느냐라고 하는 듯이.

신전의 핵심 인물은 모두 숙청되었고 데본셔 백작의 재산 또한 국고에 들어왔다.

라트라니스는 이번 반역 사건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명실상부 황제의 오른팔임을 귀족들에게 증명했다.

게다가 요하네스. 평생 골칫덩이였던 그 가문이 드디어 몰락했다. 이제 그는 신전이 보호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황제의 부름을 받는 신하가 되었다.

‘손해 보실 일, 없을 겁니다.’

전율이 일었다. 레베카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녀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비호하는 진정한 성녀였다.

레베카의 등 뒤로 일순 후광이 비쳐드는 듯해 자히드라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했다.

자히드라는 문득 어제 아침 율리안과 나누던 설전을 떠올렸다.

‘꼭 공작의 작위를 내려놓아야 하겠는가? 내 왼팔이 되어 제국을 함께 이끌어주게.’

‘안 됩니다. 이 자리는 기만의 자리입니다. 전 제 손으로 요하네스가를 다시 일궈낼 것입니다. 백작이 되더라도 전 폐하께 충성할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깊이가 다르지 않은가 깊이가! 자네 영지도 줄어들 텐데 고작 그것 가지고 무슨 큰일을 하려고!’

‘황제께서 아무리 역정을 내셔도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자히드라가 탐낸 것은 율리안이 아니라 레베카였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그녀를 자신의 신하로 만들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녀는 로탄더스 제국의 유례없는 번영을 끌어낼 사람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자히드라가 지팡이를 두어 번 바닥에 찍었다. 연설을 마무리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럼 이만 재판 결과는 이쯤…….”

자히드라가 마무리를 하려는 그때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고 다시 처음으로!”

황금색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을 알아본 어떤 이가 크게 외쳤다.

“심판자다!”

심판자들은 우르르 광장의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양쪽으로 비켜섰다. 마치 황금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로브를 입은 사람 중 가장 키가 큰 이가 외쳤다.

“로탄더스 제국은 들으시오! 여신의 뜻을 곡해하는 이들 때문에 여신께서 크게 분노하셨소! 제국에 필요한 것은 데프리아교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고함이 들려왔다.

“심판자를 몰아내라! 여신의 역당을 몰아내라!”

“처음으로 돌아가자! 신전은 썩었다!”

어느새 광장은 심판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현 신전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조용!”

자히드라가 음성 증폭기에 대고 소리쳤다. 분노한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쳤다.

그는 다시 침묵이 찾아온 좌중을 내려다봤다.

심판자의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우린 자히드라 황제와 대화를 원하오!”

“무례하다! 정식 절차를 밟고서…….”

애브러햄의 호통에 자히드라가 손을 들었다.

“됐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대신 여기에 있는 국민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뒷공작이나 은밀한 협상은 불허한다.”

사내는 연단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자히드라가 그를 보며 말했다.

“신전은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썩어 빠진 인물들은 이제 신전에 남아 있지 않아. 그것만으론 부족한가?”

“부족하다. 우리는 데프리아교의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근본……?”

“자유와 평등이다. 지금의 데프리아교는 부자에게 관대하고 가난한 자를 핍박하지. 교황을 바꾼다고 해도 현 데프리아교의 교리를 계속 유지한다면 결국 똑같은 역사를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다.”

“그럼 원하는 게 대체 뭔가?”

“우린 종교의 자유를 제청한다!”

“뭐라……?”

“들어오시오!”

그의 말에 연단 앞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흰색 카라에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하얀 이마엔 부엉이 눈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 카디르교? 그 사이비?”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놀랍군.”

데프리아교의 광신도들이 그들을 향해 야유했다.

“사이비는 물러가라! 자칭 심판자는 물러가라! 여신의 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자히드라를 향해 있던 심판자들이 몸을 돌려 좌중을 바라봤다.

우두머리의 거대한 풍채가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냈다.

“이자들은 카디르교의 교인들이요. 험한 핍박에도 뿌리를 잊지 않고 지켜왔지. 그리고…….”

뒤에 잠자코 있던 이노텐이 서서히 앞으로 다가왔다.

“지혜의 불은 현존하오.”

다시 한번 광장이 술렁거렸다. 이미 잊힌 지 오래인 카디르교였지만 지혜의 불이 카디르교의 상징이었다는 건 오래된 전설처럼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백번을 떠드는 것보다 한번 보여주는 게 낫지. 이노텐 님.”

이노텐이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아니……!”

그의 손짓에 따라 공중에 수백 개의 불덩이가 떠올랐다. 불덩이는 천천히 사람들을 향해 하강했다.

“으악! 불에 탄다……?”

질겁을 하며 도망치려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불에 닿은 곳이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다들 멍하니 제 손바닥 위에 둥둥 떠다니는 불꽃을 바라봤다.

이노텐이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한없이 인자한 목소리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모두의 귀를 강타했다.

“불은 카디르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지혜입니다.”

이노텐은 오른손에 붉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추운 겨울날 발을 녹여주던 난롯가의 불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색이었다.

“불은 제대로 사용하면 인간에게 크게 이롭지만…….”

그가 왼쪽을 들자 푸른 불꽃이 그의 몸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옥 불이 있다면 저런 모양새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잘못 사용하면 큰 재앙을 초래하지요.”

이노텐이 허공에 손을 튕겼다. 그러자 공중에 떠 있던 불이 그의 두 손을 향해 모여들었다.

모든 불을 거둬들인 그는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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