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교리는 그런 신의 지혜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과거엔 그 교리마저 어리석음에 이용되었습니다. 때문에 저희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젠 다릅니다. 카디르교는 반성했고 변했습니다.”
“카디르교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사내가 한마디를 더 붙이자 이노텐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노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엔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그, 그렇다면 데프리아 여신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여태껏 믿었던 게 모두 거짓입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저건 요술이다. 악마의 술수다! 여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 무슨 불경한 말인가!”
“그렇다. 여신께선 존재하신다.”
심판자는 로브를 벗어던졌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황금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바로 그 증거다.”
“율리안…… 요하네스?”
레오가 그의 넓은 어깨에 폴짝 올라앉았다
둘의 몸이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태양보다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시, 신의 빛이다! 서, 성스러운 빛이야!”
데프리아의 광신도들이 무릎을 꿇었다.
빛은 점점 강해져서 광장에 들어오지 못하던 이들도 그의 찬연한 황금빛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멀까 봐 다들 덜덜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율리안의 예상대로 됐지만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했던가……?’
제 몸에서 나는 빛의 양이 생각보다 강했던 탓이다. 이러다 누군가 실명할 것 같아 그는 서둘러 신성력의 양을 줄였다.
“그래. 나는 여신께 저주받았다. 여기 계신 신의 사자를 평생 섬겨야 하는 벌을 받았지.”
율리안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레오의 팔에 자그마한 생채기를 냈다.
그러자 율리안의 팔에 선혈이 뚝뚝 흐르는 큰 상처가 그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신께서 내게 축복을 베풀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율리안이 팔을 좀 더 높이 올렸다. 곧이어 그의 상처가 스르르 아물기 시작했다.
“일전에 제플린 데본셔가 감히 신의 사자께 손을 댔을 때도 나는 살아났다.”
모두가 그 신이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레베카만이 굳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안의 상처를 쫓던 물기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혜의 불은 사실이다. 신의 사자도 사실이지. 그러니 나는 공존을 제안한다.”
“데프리아의 근간은 유일신이오! 저런 서커스나 해대는 자들의 신이 어떻게 여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살바도르가 천천히 연단석으로 향했다. 자히드라는 줄곧 침묵을 지키며 그 자리마저 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저는 데프리아 신학교의 학장인 살바도르 키스입니다. 이를 설명해줄 사람들이 전부 감옥에 있기에 부득이하게 제가 이 자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살바도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설문을 들었다. 무서웠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데프리아교가 유일신 체제가 된 것은 어떤 신학자의 실수 때문입니다.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뜻하는 ‘챤’이, 유일을 뜻하는 ‘챠나’로 해석되었습니다. 신학자는 훗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신전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오류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던 겁니다.”
살바도르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본디 로탄더스 제국은 여러 신께서 보호하고 계시던 국가였습니다. 데프리아교도 그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국교로 지정될 당시의 신전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고 그 결과 카디르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여신께서 인간에게 내려준 자유와 평등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그의 손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해질수록 그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지금부터 나눠드리는 종이는 저희가 성서를 지난 몇십 년간 새로 해석하여 만든 개정된 교리입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다른 이를 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든 것입니다.”
심판자들이 모두 후드를 젖히고 사람들에게 교리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심판자들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하게 피어 있었다.
* * *
레베카는 율리안을 기다리며 흥분한 군중들을 찬찬히 살폈다.
새로운 데프리아교를 기대하는 사람과 카디르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갑작스런 변화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한구석에 모여 불만이 가득 찬 눈을 희번득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황궁을 부숴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조만간 제국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변화는 폭동과 폭력을 동반한다.
자히드라는 그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변화의 피바람에 그저 자신의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피곤한 듯 목을 쓸어내리며 율리안이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율리안을 먼저 발견한 레베카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수고했어. 율리안. 우리가 계획한 그 이상을 해냈어!”
율리안이 슬쩍 레베카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했어?”
“그럼. 릴리가 오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어.”
랭스터 후작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릴리는 크게 앓았다. 아마도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분출된 것 같았다.
칸나가 그녀의 곁에 남아 간호하기로 했다. 같이 갇혀 있는 동안 릴리와 칸나의 사이가 더 돈독해진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양털 케이프를 지분거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을 생각했어.”
“응……?”
율리안은 레베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달큰한 숨결에 레베카의 목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걸 끝내고 당신과 집에 돌아갈 생각. 당신과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당신의 예쁜 입술 사이에 포도알을 넣어줄 생각을 하면서 버텼어. 그러니 절로 힘이 나더군.”
“너무, 너무 좋아. 율리안.”
“당신도 그런 걸 원해?”
율리안이 확인하듯 넌지시 물었다. 레베카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볼 위로 장밋빛 홍조가 퍼져나갔다.
“응. 나도 원해, 율리안. 당신과 함께하길 원해.”
“레베카!”
율리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꽉 껴안았다.
“레베카! 레베카! 레베카!”
“왜 그렇게 자꾸 불러?”
“그냥. 당신 이름이 좋아서. 사실 당신의 모든 게 다 좋아.”
신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그는 묘하게 들떠 보였다. 마치 뒤에서 꼬리가 붕붕대는 것 같아 레베카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제플린 자식만 뭉개 놓으면 돼. 그렇지, 레베카?”
레베카는 잠시 낯빛을 흐렸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다시 머금고 말했다.
“그래. 그러면 다 끝날 거야. 행복해…… 질 거야.”
레베카는 둘의 발치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레오를 흘깃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공작…… 아니 요하네스 백작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애브러햄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율리안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분명 내가 할 일이 많다고 했을 텐데.”
“아니, 그렇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중간에 뛰쳐나가시면 어떡합니까. 폐하께서 당신을 봐주고 계시단 걸 명심하십시오. 이제 당신은 신전의 보호를 받는 고귀한 요하네스 공작이 아닙니다.”
“난 레베카와…….”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으려는 율리안을 레베카가 살살 달랬다.
“갔다 와, 율리안. 난 먼저 성에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릴리의 상태가 걱정되기도 하고.”
율리안이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났겠어. 고집불통 황제 폐하께서 날 얼마나 붙잡고 늘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백작! 그게 무슨 불손한 어투요!”
“아,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 내가 공작에서 백작이 됐다고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겠어?”
레베카는 애브러햄과 티격태격하며 멀어져 가는 율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보고 있을 때 그가 휙 뒤돌아보더니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예쁜 웃음이 멀리서도 보였다.
‘마음껏 담아두자.’
“부인! 돌아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같이…….”
황제에게 불려간 귀족들의 비서관들과 잡담을 나누던 크로아가 두리번거리는 레베카를 향해 걸어왔다.
그에게서 희미한 연초 향이 났다.
“아니. 괜찮아요. 저는 따로 삯마차를 타고 갈게요. 회의가 끝난 뒤에 율리안이 많이 지쳤을 테니 그를 잘 보살펴 주세요.”
“하지만…….”
“저 마차가 좋겠네요.”
“너무 작지 않습니까?”
“저 정도면 충분해요.”
레베카는 서둘러 마부를 불렀다.
이 엄청난 인파엔 커다란 마차보단 자그마한 마차가 더 효율적이었다.
“어디로 모실깝쇼?”
서글한 인상의 마부가 예의 바르게 모자를 벗어 보였다.
“요하네스 백작 성으로 부탁하네.”
크로아가 그에게 두둑한 돈을 챙겨주며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아주 귀하신 분이니 제대로 모셔야 하네. 내 자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으니 허튼 수작을 하려거든 목숨과 식솔을 걸어야 할 거야.”
크로아답지 않은 험악한 말투에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점 율리안을 닮아가기라도 하는 걸까.
이러다가 승차 거부를 당할 것 같아 레베카는 서둘러 그를 말렸다.
“괜찮아요, 크로아. 여기 신사분께서 안전하게 데려다주실 거예요.”
그제야 잔뜩 질려 있던 마부가 부랴부랴 모자를 벗어들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주신 금액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크로아의 못 미덥다는 눈빛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레베카는 창문을 열어 크로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인, 길이 많이 막히는군요. 제가 지름길을 알아볼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니. 괜찮아요. 전 천천히 가도 상관없어요. 평소대로 해주세요.”
마부는 크로아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신 안절부절못하며 레베카의 안부를 물었다.
결국엔 레베카가 자는 척을 해서야 그의 걱정스런 질문 공세가 끝이 났다.
‘그나저나 정말 꿈쩍도 하지 않네.’
수도는 길이 무척 넓은 편인데도 광장에 모여든 인파 때문에 마차와 사람들이 한데 얽혀 길이 아주 엉망이었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지루하다고 느낄 때 즈음 무심하게 창가를 내다보던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비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