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확실히 파비올라였다. 파비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삯마차를 불러댔다.
마차를 잡는 게 어려운지 그녀는 연신 손수건을 흔들었다.
‘수도에 숨어 있었구나.’
옥타비오가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곤 넌지시 들었는데 수도에 있는 건 몰랐다. 옥타비오는 무언가를 숨기는 것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차를 부르는 거지? 그것도 혼자서? 설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볶은 콩 같은 파비올라를 옥타비오가 혼자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제플린과 연관된 사람들은 몸을 사리고 있어야 마땅할 시기였다.
그렇다면 가능한 가설은 하나뿐이었다.
‘제플린…….’
그는 지금 도주 중인 상태였다.
제플린이 자신의 영지를 떠나 멀리 갔을 거라 대부분 추측했지만, 레베카는 그가 데본셔 저택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파비올라라면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마차를…….”
레베카는 망설였다. 지금 제플린을 찾으러 간다면 율리안이 기대하던 평화로운 저녁은 물건너가는 셈이다.
그와의 일상은 레베카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파비올라가 그를 도주시키려 향하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영영 제플린을 잡을 수 없게 된다면?
레베카는 지난 생을 잊을 수 없었다.
율리안을 사랑하는 만큼 과거의 기억은 아팠다. 그녀가 꾸는 악몽에는 언제나 제플린이 등장했다.
무심결에 흘리는 눈물에는 빼앗긴 딸, 프시케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과거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종지부는 제플린의 핏값으로 찍어야 마땅했다.
레베카는 주먹을 꾹 쥐었다.
파비올라가 드디어 마차를 잡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앞의 저 마차를 따라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마부는 일생일대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 결연하게 외쳤다.
마차가 곧 방향을 틀었다.
‘미안해. 율리안…….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는 레베카의 얼굴이 수심에 잠겨 들었다.
* * *
“어서 짐 챙겨. 여길 떠야 해!”
며칠 전, 소식이 뜸하던 옥타비오가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니 짐가방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파비올라가 가운을 여미며 뛰어나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떠나다니?”
“데본셔가는 망했어. 곧 제플린은 사형될 거야. 작위도 몰수당하고.”
“뭐, 뭐라고? 내 아들이 사형을 당해? 그게 무슨 말이야. 옥타비오! 자세히 말해 봐.”
“제플린이 여태껏 했던 짓이 모두 까발려졌단 말이야. 빛의 장미도 잡혀 들어갔어. 이러다간 우리까지 엮이는 거 한순간이야. 외국으로 나갈 배편을 마련해 놨어. 그러니 어서 짐을…….”
“싫어!”
파비올라가 완강하게 발을 굴렀다.
“내 아들이 죽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거야, 지금?”
“어이가 없군. 네가 언제부터 모성애가 넘치는 엄마였다고……. 최소 무기징역이야. 남은 생을 감옥에서 썩고 싶어?”
“그, 그래도…….”
옥타비오가 옷가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곤 살벌하게 걸음을 옮겼다.
“감옥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돌바닥엔 더러운 곰팡이와 이끼가 잔뜩 피어 있지. 그리고 차라리 모래를 씹어먹었으면 할 정도로 맛없는 빵을 쥐새끼들과 나눠먹어야 해. 그걸 네가 견딜 수 있겠어? 고고하신 우리 파비 아가씨께서?”
그건 확실히 싫은 듯 파비올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기만 했다.
옥타비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신차려, 파비올라. 감옥에 들어간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넌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거야. 이 연약하고 부드러운 네 손을 좀 봐 봐. 당신의 손이 찬바람에 갈라지고 피투성이가 됐을 땐 이미 늦었어.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와.”
“알겠어…….”
파비올라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랍장의 물건을 옮겨 담던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자그마한 호신용 권총이 서랍 안에 고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귀중품을 신중하게 주머니에 나눠 담는 옥타비오를 곁눈질하며 권총을 주머니 안에 찔러넣었다.
* * *
파비올라의 마차가 향한 곳은 예상대로 데본셔 백작저였다.
레베카는 파비올라가 완전히 저택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마부에게 건넸다.
“혹시 제가 한 시간 안에 나오지 않는다면 율리안 요하네스 백작에게 제 행선지를 알려주세요.”
무모하게 지금 당장 제플린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도망치려는 장소만이라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레베카는 데본셔 저택의 대문을 통과했다. 언제나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경비들은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사를 하다 말았는지 여기저기에 건축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겨울에도 데본셔의 정원은 언제나 기품을 잃지 않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엔 유리 조각 따위를 걸어 햇빛에 반짝이게 했고 겨울꽃을 잔뜩 심어 눈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정원은 바싹 마른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라 아주 엉망이었다.
언제나 화려함으로 반짝거리던 데본셔 저택엔 황량한 겨울바람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플린……? 내 아들 어딨니?”
파비올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저택에 울려 퍼졌다. 레베카는 몸을 숨기며 파비올라의 행적을 따라갔다.
곧이어 분노한 제플린의 목소리가 서재 쪽에서 들려왔다. 레베카는 살짝 열린 서재의 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제플린이 의자 위에 비스듬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끔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럼에도 결벽증 기질은 버리지 못했는지 빈 술병들이 크기별로 한쪽에 정리되어 있었다.
“파비올라? 당신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왔지?”
“제플린. 어서 도망가야 해. 여기에 있다간 너 죽어! 데본셔의 작위를 몰수하겠대! 네 목을 단두대에 걸겠다는구나!”
제플린은 새삼 무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라고 하지. 어차피 레베카가 없는 삶은 죽어도 상관없어.”
짜악-!
파비올라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단 채 제플린의 뺨을 때렸다.
“어떻게 감히 어미 앞에서 그딴 말을……!”
순간 제플린이 눈을 치켜떴다. 그는 어딘가 정신줄을 놓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짜악-!
제플린은 파비올라가 했던 그대로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렸다.
레베카는 입을 틀어막았다.
파비올라가 벌벌 떨며 제 뺨을 감쌌다.
“너…… 너 이게 무슨 짓!”
“감히 내 얼굴을 때려? 당신이 자킴 데본셔야? 당신은 안 그랬잖아. 내 얼굴은 보석이라고, 아버지가 때릴 때 얼굴만은 보호해 주던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내 얼굴에 손을 대!”
파비올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폭발하는 제플린을 바라봤다.
“으아악!”
그는 술병을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파비올라는 귀를 막은 채 덜덜 떨기만 했다.
그때였다. 책장 문이 열리더니 옥타비오가 튀어나왔다.
“비밀통로에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당당하게 여기에 있었군. 파비올라는……?”
엉망이 된 서재를 마주한 옥타비오가 멈칫했다. 그는 퉁퉁 부어 있는 파비올라의 뺨과 제플린의 손에 들린 깨진 유리병을 번갈아 봤다.
그의 눈에 굵은 핏발이 섰다.
“이 악마 새끼가 감히 어미에게 손을 올려?”
옥타비오는 즉각 제플린에게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영양 섭취를 못한 제플린은 늑대 앞의 새끼 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노련하게 제플린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얼마나 경우가 없으면 배 아파 낳아준 부모를 때려! 그것도 지금껏 귀하게만 큰 네 어미를! 네가 뭔데. 나의 파비를 때려! 난 널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
한참을 손을 올리고 방어만 하던 제플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의 파비……?”
두려운 의문이 제플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옥타비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어미와 나는 연인 사이다. 파비올라의 야반도주 사건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 상대방이 바로 나. 옥타비오 리멘이야.”
“옥타비오! 그만해!”
파비올라가 비명을 지르며 옥타비오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미 터진 옥타비오의 입은 멈출 줄 몰랐다.
“우리의 사랑은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었지. 자킴 데본셔가 살아 있을 때도 말이다.”
옥타비오는 파비올라를 밀쳤다. 그러곤 얼떨떨한 얼굴로 그와 파비올라를 번갈아 보고 있는 제플린의 얼굴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넌 내 아들이지.”
“아니야! 제플린, 아니야! 그 말, 듣지 마라. 넌 데본셔의 핏줄이야. 누가 뭐래도 자킴 데본셔의 핏줄이야!”
“아아…… 이런 구제불능 자식이 나올 줄 알았으면 그날 밤 파비올라를 안는 게 아니었어. 널 낳은 걸 후회한다, 제플린.”
제플린의 어깨가 쉴 새 없이 떨려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거짓말…….”
옥타비오가 간악하게 속삭였다.
“아니. 그게 진실이야. 네 잔인한 성정이 누굴 닮은 것 같아? 자킴 데본셔? 아니, 그가 폭력적이긴 했지만 사이코는 아니었어. 하지만 난 미치광이지. 그리고 너도 미치광이야.”
“으아악!”
제플린이 허리춤에서 총을 빼 들고 옥타비오에게 달려들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끝내 총을 손에 넣은 건 옥타비오였다.
옥타비오가 제플린에게 총을 겨누며 말했다.
“이것도 내가 구해다 준 게 아닌가? 너를 없애는 게 이 세상에 내가 베푼 유일한 자비인 것 같군.”
타탕-!
섬뜩한 총소리가 텅 빈 저택을 흔들었다.
레베카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오도카니 서재의 문 뒤에 서 있었다.
손이 벌벌 떨려왔다.
제플린이 이런 식으로 죽는다고……?
하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파비올라의 울음소리에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옥타비오!”
레베카는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봤다.
총을 쏜 건 파비올라였다.
그녀는 피를 왈칵 쏟아내는 옥타비오를 품에 안고서 절규하고 있었다.
옥타비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파비올라를 올려다봤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미안해. 옥타비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 아들은……. 내 아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볼 수 없었어.”
“미안하단 말 하지 마……. 꼭 그때와…… 같잖아.”
이윽고 옥타비오의 손이 축 늘어졌다.
파비올라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더는 볼 것도 없겠어…….’
제플린은 파비올라의 말을 아마 듣지 않을 것이다. 도망가자고 해도 비밀통로에 숨어 있겠지.
여차하면 자신이 미끼로 나서 그를 잡으면 됐다.
무엇보다 레베카는 데본셔의 가정사를 알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이야기는 자신의 삶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이곳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율리안의 너른 가슴에 누워있고 싶었다.
레베카는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파비올라를 응시하던 제플린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코를 움찔거리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곧바로 주저앉은 파비올라를 지나쳤다.
제플린의 파리한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레베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