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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22화 (222/232)

222.

철창을 두들기는 소리에 레베카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눈을 슬며시 떴다.

‘베이…… 츠? 알리시아?’

흐릿한 시야로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레베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레베카 님! 정신 차리십시오! 레베카 님!”

하지만 그들은 갇혀 있었다.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들쳐 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마 제플린이겠지.

‘내가 어쩌다 여기 있더라…….’

레베카는 악착같이 쏟아지는 잠을 몰아냈다.

‘현관을 벗어나서…… 정원을 뛰어가다가 목에 뭔가 찔린 다음 기절했어.’

머리로는 그를 밀치고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그럼 끝장이야.’

하지만 계속해서 눈이 감겨 왔다.

희미한 정신 사이로 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제플린의 구둣발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비탄에 찬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제플린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한 번 더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쯤 레베카는 실신했다.

* * *

팔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레베카는 눈을 떴다.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런 식으로 전신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 순간 마비가 풀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 수 있을 때 즈음 제플린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그는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레베카는 수염을 밀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제플린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레베카의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작품을 감상하듯 턱을 손으로 쥐었다.

“흠…… 역시 인형은 인형 티가 나는구나. 나는 당신이 안고 있는 게 진짜 우리 딸이었으면 했는데. 아주 아쉬워.”

그의 말에 레베카는 제 팔에 놓여 있는 것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굳었다.

웬 여자아이가 제 품에 안겨 있었다.

이 미친놈이 아이를 납치했나 싶어 레베카는 눈을 부릅떴지만 자세히 보니 정교하게 만든 인형이었다.

복슬복슬한 금발 고수머리에 푸른 유리구슬로 만든 눈이 마치 사람 같았다.

“어때? 내가 예상한 우리 딸이야. 예쁘지?”

그제야 레베카는 제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천장 위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크리스털 사이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 아니 인형들이 자신을 향해 찬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충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레베카는 무심코 정면을 바라봤다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익숙한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에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 전경은 일전 서재에서 봤던 그 그림과 똑같았다.

어느 왕실의 가족화.

“시간이 없어서 당신 옷까지 갈아입히지 못한 게 유감이야. 금방 정신을 차리더군. 많이 건강해졌어, 레베카. 그게 난 참 마음에 안 들어.”

제플린이 성큼성큼 연단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준비된 제 몫의 왕좌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그림 속의 왕처럼 삐딱하게 앉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찬찬히 감상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미완성이긴 하지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이군. 하지만 난 여기서 만족하지 않을 거야.”

제플린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딘가 미쳐 있었다.

레베카는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촘촘한 실로 팔다리가 묶여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제플린이 레베카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우리의 딸을 낳아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 거야. 당신이 더 늙기 전에, 추해지기 전에 마무리 지을 계획이야.”

레베카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 * *

부서진 장난감 사이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던 어린 제플린은 벽에 걸린 그림 하나를 몇 시간째 미동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가족화였다.

어느 집에나 흔히 걸려 있는, 집들이 선물로 들고 가는 그림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데본셔가에는 언제나 이런 류의 선물이 들어오곤 했다.

그중에서 선택받은 작품만이 저택 안에 걸릴 수 있었다.

제플린의 눈앞에 있는 이 그림도 똑같았다.

제플린은 아버지가 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훌륭하군. 이런 가족화라면 하루 종일 감상할 수 있겠어.’

자킴은 그날 이후로 이 그림을 잊었지만 제플린에겐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그림이라는 사실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가족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국왕 부부와 귀여운 공주. 그리고 이 완벽한 가족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시선.

제플린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매일 밤 그림 앞에서 제플린은 중얼거렸다.

“나도 저런 가족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마침내 그의 꿈을 이루어줄 사람을 만났다.

그림 속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소녀. 그 아이처럼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레베카였다.

제플린은 그녀의 웃음을 박제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의 꿈은 거의 이루어질 뻔했다.

* * *

레베카는 다리를 조금 움직였다. 다행히 총은 아직 허벅지에 매여 있었다.

이 빌어먹을 실만 풀어낸다면 승산은 있었다.

레베카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그리고 흐뭇한 얼굴로 여자아이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제플린을 바라봤다.

“레베카. 이 아이의 머리칼을 좀 만져 봐. 진짜 같지?”

레베카는 배시시 웃었다. 여기서 그의 성질을 부추겨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겉보기엔 그러네. 근데 만질 수가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는걸?”

“레베카, 설마 지금 수작 부리는 거야?”

대번에 제플린의 안색이 험악해지자 레베카는 예쁜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이 만져 보라면서. 이렇게 두 팔이 묶인 채로 뭘 감상하라는 거야.”

“그건 그렇지……. 그럼 일단 한쪽 팔만 풀어주지.”

제플린은 레베카의 오른팔에 묶여 있는 실을 풀었다.

‘일단 하나…….’

레베카는 고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형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드러웠다.

“당신 말대로 진짜 같아.”

“당연하지. 진짜니까.”

“뭐……?”

그는 태연자약하게 인형의 도톰한 코를 툭하고 치며 말했다.

“최고의 작품에 재료를 대충 쓸 수는 없지. 이거 진짜 사람 머리카락이야. 여기 있는 작품 모두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거지.”

레베카는 소름 끼치는 걸 애써 숨기며 뻣뻣한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재료를 구하는 데 힘들었겠네. 이 많은 머리카락을 구하려면…….”

“사람은 머리를 잘 굴려야지. 그리 어렵지 않았어. 몇 명을 가둬두고 잘 관리하면서 머리카락을 잘라내면 돼. 그럼 언제든지 쓸 수 있는 머리카락이 생기지. 내 인형사들은 실력이 뛰어나지만 그만큼 실수도 많이 해서 말이야. 이만큼의 인형을 만드는 동안 얼마나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고 생각해?”

레베카는 더 이상 웃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그 인형사들도 여기에 가둬둔 거야?”

제플린은 무슨 그런 멍청한 질문이 다 있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레베카, 이건 장난질이 아니야. 저기 허접한 상점가에 놓을 조각상 따위를 만드는 게 아니라고. 세상에 하나뿐인 예술품을 만드는 거야. 그러니 감시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 내 작품에 어떤 허튼수작을 할 줄 알고.”

이쯤 되니 놀랍지도 않았다. 레베카는 저런 미친놈을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소름 끼칠 뿐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인형사 마을의 장인들이 한꺼번에 실종됐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한동안 떠들썩한 일이었는데 그게 바로 제플린의 짓이었다니. 그것도 이까짓 인형 놀이를 위해서.

그녀의 안에서 뜨거운 분노가 자라날수록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레베카는 풀린 손으로 제플린의 허벅지를 은근하게 만졌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당신은 정말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해.”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그녀의 노골적인 몸짓에 제플린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달려들고 싶다는 마음과 의심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레베카는 주춤하는 제플린을 공격하듯 교태롭게 눈을 접어 보였다.

“저기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인형들을 구경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제플린의 고민은 짧지 않았다.

그가 거절하기엔 레베카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동안 레베카를 향한 제플린의 갈증은 한계치를 넘어 탈수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안 돼?”

레베카가 쐐기를 박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며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샹들리에의 아름다운 빛무리가 그녀의 눈 안에 아낌없이 쏟아져 내렸다.

탐스럽게 익은 자두처럼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보며 제플린은 성마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좋아. 대신 허튼 짓을 한다면 영원히 묶어버릴 거야.”

“여부가 있겠어.”

제플린은 빠르게 그녀를 포박한 실을 모조리 풀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인형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이건 약품 처리한 돼지 껍데기로 피부를 만든 거야. 아무리 나라도 사람의 피부를 벗기는 건 꺼림칙해서 말이야.”

‘고려한 적은 있다는 말이네.’

레베카는 경멸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때? 이 드레스는? 그림 속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만들려고 했는데 오래된 그림이라 촌스러워 말이지. 현대적 해석을 곁들어 봤어.”

“응. 예쁘네.”

인형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제플린은 순수한 소년처럼 해맑았다.

방방 뛰어다니는 그를 향해 레베카는 간드러진 웃음을 내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더욱더 열성적으로 인형 자랑에 매달렸다.

하지만 레베카는 허벅지에 맨 총을 꺼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손을 잡고 있을 참이지.’

레베카는 사슬처럼 휘감긴 제플린의 기다란 손가락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레베카. 당신이 여기 있어서 너무 기뻐.”

“어째서?”

“여긴 당신 덕분에 만든 내 왕국이야. 당신이 없었다면 이곳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야.”

레베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내 탓이다?

제플린이 바투 다가왔다. 그는 레베카의 뺨을 쓸었다.

“고마워, 레베카. 세상에 존재해줘서. 내가 꿈을 꿀 수 있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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