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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23화 (223/232)

223.

“제플린…….”

레베카는 감격에 겨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위해 이런 걸 준비해주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

레베카는 서서히 그를 왕좌가 있는 곳으로 떠밀었다.

제플린은 기꺼이 그녀의 몸짓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레베카는 고혹적인 눈매를 치켜뜨며 치맛자락을 추어올렸다.

드레스 밑에 검은 망사 스타킹이 여실히 드러났다.

제플린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그의 이성을 잃게 했으니 입고 오기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아아…… 레베카.”

레베카가 그의 위에 서서히 올라탔다. 제플린은 다가올 그녀의 젖은 입술을 상상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 물린 건 레베카의 뜨거운 혀가 아니었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쇠붙이였다. 비릿한 쇠 맛이 그의 혓바닥을 거침없이 침범했다.

그가 당황하며 눈을 떴을 땐 매혹적인 레베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 푸른 눈의 마녀가 있을 뿐이었다.

* * *

자히드라가 율리안을 놓아준 건 해가 저물고 난 뒤였다.

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을 것이다.

율리안은 짜증이 잔뜩 피어나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야식이라도 먹자고 해야겠어.”

자히드라의 불쾌한 낯짝을 오래 보고 있다 보니 레베카의 오물거리는 입술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크로아가 기지개를 길게 켜며 그에게 다가왔다.

“흐아암. 드디어 끝나셨군요. 어서 빨리 돌아가자고요.”

“네가 왜 여기 있어? 레베카는?”

“아, 부인께선 혼자 가시겠다고 했습니다. 공작님을 챙겨드리라고 신신당부하시면서요. 참 사려 깊은 분이시지 않습니까?”

율리안은 크로아의 빙글거리는 낯짝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난해? 이 시국에 그녀를 혼자 보냈다고?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

“그럴 줄 알고 마부의 인상착의와 신상정보를 철저하게 파악해뒀습니다. 그리고 요새 누가 삯마차를 습격해요?”

“몽타주라도 있어? 네 기억을 내가 어떻게 믿어.”

“이거 참 서운하게 말하시네. 이래봬도 저, 아카데미 조기 졸업생입니다. 똑똑하게 기억을…… 아, 저기 있네요. 그 마부.”

“뭐?”

크로아의 손짓에 율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마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크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왕복으로 오가기엔 시간이 좀 빠듯한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율리안은 이미 마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굳은 그의 얼굴이 워낙 험악해서 마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레베카는? 레베카는 안전하게 성으로 데려다준 거겠지?”

율리안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걸 이성으로 억눌렀다.

마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게 요하네스 백작 성이 아니옵고 데본셔 백작가로 모셔드렸습니다. 그분께서 한 시간 이상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율리안 요하네스 백작님께 행선지를 일러달라 부탁하셨거든요.”

“뭐라고? 데본셔?”

율리안이 핏기가 가신 얼굴을 쳐들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초조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조차도 시간 낭비였다.

율리안이 거칠게 소리쳤다.

“크로아! 당장 말을 가져와. 그리고 황실 기사단인지 뭔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놈들은 모조리 불러와!”

* * *

“헉…… 헉…….”

레베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플린을 추격했다.

제플린은 용의주도하게 인형 사이를 누비며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레베카, 정말 내게 이러기야? 자꾸 반항하면 재미없어.”

그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망설임이 제플린에게 틈을 내어줬다.

그는 레베카를 빠르게 밀치고 재빨리 인형 더미로 숨어들었다.

인형의 머리색은 금발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사이에 숨은 제플린을 찾아내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탕-!

레베카는 제플린의 잔상처럼 보이는 것에 총을 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인형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건 내가 아니야. 레베카. 하여간 사리 분간을 못하는 건 변함이 없구나.”

그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레베카의 고개가 바삐 돌아갔다.

탕-!

이번에도 인형이었다.

“아! 아까웠어.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로 빗겨 나갔거든.”

얄미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자극했다.

레베카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생각해, 레베카. 생각해.

어떻게 하면 저 비열한 자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레베카는 총을 재장전하다 잠시 손을 멈추었다.

‘약실의 세 번째 칸부터는 실탄을 넣어 둘 거야. 당신이 두 번이나 그 총을 쐈다는 건 죽어 마땅한 악질이라는 뜻이니까.’

지금 이 총알은 율리안이 어젯밤 직접 다시 채워둔 것이었다. 랭스터 후작저에서 두 발의 마취탄을 쏜 탓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실탄이었다.

제플린을 바로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여태껏 그를 죽이고 싶어 했으면서 왜 손을 벌벌 떨고 있는 걸까.

레베카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등을 세게 내리쳤다. 새하얀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죽여버릴 거야. 제플린 데본셔.”

“그것 참 무섭군. 얼른 쏴 봐.”

아마도 제플린은 저런 식으로 자신을 자극해서 총알을 모조리 소비하게 만들 속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레베카는 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레베카의 총구가 새로운 과녁을 향했다. 그 과녁은 레베카와 제플린의 가짜 딸이었다.

그는 자신을 보던 눈빛 그대로 소녀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한 작품을 바라보는, 만족감에 가득 찬,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안 돼!”

레베카의 다음 행동을 알아차린 제플린이 미끼를 물었다.

다른 인형이 부서질 때는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그가 펄쩍 뛰며 레베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정말 저 인형이 제 딸이라도 되는 양 절박한 표정이었다.

레베카가 달려드는 그를 향해 싸늘하게 뇌까렸다.

“이만 지옥으로 꺼져. 제플린 데본셔.”

탕-!

* * *

레베카를 구하러 간다는 말에 자히드라는 반색을 하며 황실 기사단을 내어줬다.

그녀를 무사히 데려오지 못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거라는 협박까지 했다.

자히드라가 레베카를 신경 쓰는 게 께름칙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율리안은 말이 탈진할 때까지 빠르게 달려 데본셔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격한 반항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데본셔가를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레이스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그레이스는 아서를 안은 채 그들을 빛의 전당 지하까지 안내했다.

지하 감옥의 열쇠는 그레이스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문을 부숴야만 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제플린의 추악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맙소사…….”

그들은 서둘러 감옥 문을 열어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베이츠와 눈이 퉁퉁 부은 알리시아를 구해냈다.

“아서!”

알리시아는 더듬거리며 그레이스가 건넨 제 아들을 안고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만요. 여기 또 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단단히 잠긴 문이었다. 고문실인 듯 각종 섬뜩한 고문 기구가 놓여 있고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어……? 문이 또 있는데요?”

그리고 세 번째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섰다.

쭉 늘어선 방 안에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오른쪽에는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기르거나 아예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왼쪽에는 부르튼 손으로 인형을 바느질하는 장인들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뒤 거의 처음 보는 외지인에 그들이 곧바로 쇠창살에 몰려들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율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쇠창살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레베카는 없었다.

“찾고 계신 분이라면 저 문 안으로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데본셔 그 작자는 악마입니다!”

“알고 있어.”

율리안이 문고리를 잡자 기사 몇 명이 소리쳤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여기 남아 저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해. 그 자식을 죽일 적임자는 따로 있으니.”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레베카!”

문을 열자 붉은 융단 위에 주저앉아 있는 레베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레베카를 향해 뛰어갔다.

율리안의 목소리에 레베카가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죽었어……. 율리안. 내가 제플린을 죽였어. 내가 사람을…….”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로 속살거렸다.

“그가 죽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아……. 이런 식으로 보내려는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내 지난 생은…….”

율리안은 쓰러져 있는 율리안을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레베카의 손에 들린 총을 슬쩍 눈짓했다.

그는 레베카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니. 그는 죽지 않았어.”

“뭐?”

“잘 봐.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잖아.”

레베카는 율리안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었다. 제플린은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난 분명 총을 쐈는데……. 세 번째 총알이었어. 실탄이었다고!”

“아, 그것 때문에 당신이 이리……. 미안, 내 잘못이야. 미리 말해준다는 게 그만.”

“뭘?”

“사실 이 총에는 마취탄만 들어 있어.”

“그럼 지금까지 날 속였다는 거야?”

“그건 아니야. 이걸 선물했을 때는 정말 당신을 위협하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랭스터 후작저에서 총 쏘는 걸 망설이는 당신을 보니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았어. 나와 달리 누굴 죽인다면 당신은 평생을 후회 속에 살아갈 테니까…….”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레베카는 눈물을 쏟아내며 율리안의 가슴을 마구 쳤다.

하지만 레베카는 금방 눈물을 거두었다.

제플린을 다시 한 번 더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도하게 했다.

* * *

“이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구출했습니다!”

마지막 사람을 구출해 나오며 황실 기사가 소리쳤다.

“좋아! 레베카, 들었지?”

“응.”

빛의 전당 지하를 빠져나온 뒤로 율리안은 줄곧 레베카를 껴안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율리안은 뒤에서 레베카를 끌어안은 채 횃불을 치켜들었다. 레베카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건 마가렛의 복수야. 그리고 내 최후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지.”

둘은 빛의 전당까지 이어진 기름 위에 불을 붙였다.

자그마한 횃불은 기름을 야금야금 먹어 해치우며 점점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리고 빛의 전당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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