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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24화 (224/232)

224.

“저택엔 불을 지를 필요도 없겠군.”

세찬 겨울바람에 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축자재에 옮겨 붙은 불이 별채에서 데본셔의 본채까지 들불처럼 번졌다.

“아아악!”

활활 타오르는 불을 감상하고 있을 무렵 그레이스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레베카에게 뛰어왔다.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소실되어 가는 저택을 바라봤다.

그레이스가 도끼눈을 쳐들고 레베카에게 달려왔다.

“제게 저택을 주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약속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레베카는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난 데본셔 저택을 주겠다고 했지, 온전한 형태로 주겠다고 한 적은 없네만? 하지만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저 불타버린 저택의 부지는 당신 거야. 그레이스 던컨.”

“뭐, 뭐라고요?”

그레이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만 가자. 레베카. 날이 추워.”

그레이스를 흘깃 돌아보던 율리안이 제 재킷을 벗어 레베카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레베카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때 들것에 실려 가던 제플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반항에 들것을 들고 있던 기사들이 휘청거렸다.

“안 돼……. 안 돼! 내 빛의 전당이! 내 왕국이!”

말릴 새도 없이 제플린은 화마 속으로 뛰쳐들어갔다.

율리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 끌어내!”

곧이어 물을 뒤집어쓴 기사들이 뛰쳐들어가 제플린을 구해왔다.

다행히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다친 건 제플린 혼자였다.

그들은 황급히 모포를 휘둘러 제플린의 몸에 붙은 불을 껐다. 제플린은 날개가 타버린 불나방처럼 몸을 부르르 떨다가 다시 기절했다.

율리안이 질린다는 듯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끝까지 엄청난 놈이군……. 설마 불 속으로 뛰쳐들어갈 줄이야.”

“난 이제 놀랍지도 않아.”

레베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하얀색 입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의 코에 내려앉았다.

처음엔 바람을 타고 온 재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눈이군.”

첫눈이었다.

레베카는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던 눈발은 점차 커지더니 곧 함박눈이 되었다.

잿가루와 섞여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율리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첫눈을 같이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야.”

“그러게.”

레베카는 말없이 율리안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는 그런 레베카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율리안은 레베카를 마차 위로 올려주며 물었다.

“뭔데?”

“네 복수는 제플린뿐만이 아니라 알리시아 그 여자에게도 해야 하잖아. 물론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 복수를 하는 게 찝찝하긴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내줘도 괜찮아?”

레베카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 복수는 그녀를 데본셔 저택에 남겨두고 왔을 때 이미 끝이 났어.”

“그런가?”

“알리시아가 욕심에 눈이 멀도록 내버려 뒀으니까.”

레베카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손에 수갑을 찬 채 호송 마차에 오르는 알리시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의 보라색 눈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너무 오래라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 * *

자그마한 창문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아침이 밝아온 걸 알았지만 제플린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잠에서 깼을 때 마주할 현실에 그만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종소리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만 했다.

이 비참한 상황에도 계속해서 배가 고팠고 요의가 느껴졌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플린은 무심코 눈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도 제 얼굴이 있었다.

제플린은 부르튼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하는 수 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맞은편 방에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왼쪽 방에도, 오른쪽 방에도 똑같은 거울이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플린은 그곳에 비친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온 전신을 뒤덮은 화상으로 끔찍한 괴물이 된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처음 제 모습을 봤을 때 그는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자신을 마주했을 땐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괴물이 자신의 모습이란 걸 인정하게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는 살아났고, 반 토막이 난 혀로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독한 놈입니다.”

“고마워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레베카였다.

제플린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지옥에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지금의 제 모습을 레베카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그는 입구에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리고 마주 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레베카의 사뿐한 발걸음이 그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안녕. 제플린.”

“…….”

제플린은 말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았지만 그는 완벽하지 않는 자신의 어투를 그녀 앞에서 내보일 수 없었다.

“꼴이 아주 볼만하네.”

드레스 자락이 돌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까지 날 안 볼 셈이야? 내일 네 목이 광장에 걸릴 텐데 말이야.”

그 말에 제플린은 움찔 몸을 떨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그를 설득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 꿈이었던, 그러나 동시에 꿈을 박살 냈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제플린은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돌아볼 테니 대신 눈을 감아줘.”

제가 생각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발음이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쉽게 수긍했다.

“알았어.”

그녀의 상냥한 어투에 제플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약조와 달리 그는 커다란 푸른색 눈을 마주해야 했다.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지?”

“으어어어…….”

제플린은 소매를 들어 얼굴을 허겁지겁 가렸다.

레베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남의 얼굴엔 그렇게 지적을 잘하더니 제 얼굴은 부끄럽나 봐?”

“그, 그만 가! 가버려!”

레베카는 그의 발치에 무언가를 툭하고 던졌다.

제플린이 호기심에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뭉텅이로 잘린 금발이었다.

“원래 네 것이었으니 이제 돌려줄게.”

찬찬히 기억을 더듬던 그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레베카가 그 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 복수는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제플린. 율리안이 날 부추긴 게 아니야.”

“그, 그럴 리가……. 당신 머리에서 그런 계획이 나왔을 리가 없어!”

“예전의 나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거든.”

“뭐……?”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나는 생을 한 번 더 살았어. 죽었다가 다시 돌아왔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

제플린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레베카의 핏빛 입술이 달싹이는 걸 멍하니 응시했다.

“네가 날 죽였기 때문이야.”

“내가 널……?”

레베카는 당장이라도 제플린의 목을 조를 기세로 쇠창살을 꽉 쥐었다.

“당신은 내 딸을 빼앗고 날 불 속에 던졌지. 마치 폐기물처럼 말이야. 난 불 속에서 당신에게 복수하길 신에게 빌었어. 그리고 자비로운 신께서 날 다시 살려주셨지.”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난 잘 알고 있어. 백 번을 회귀한다고 해도 당신은 날 죽일 거야. 날 죽이고 내 딸을 빼앗고 내 유일한 행복을 짓밟을 거야.”

“아니야! 난 당신을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녀의 말을 부정하며 쇠창살에 매달리던 제플린은 레베카의 뒤편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히익!”

그는 제 몰골에 기함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레베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한다고? 그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뭐지?”

“꽃……? 장미?”

그의 목소리엔 전혀 확신이 없었다.

“그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제플린은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레베카의 음식을 제한하기만 했지 차려준 적은 없었던 그로선 무척이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식사를 떠올리다 겨우 대답했다.

“소, 송아지 스테이크……?”

“그럼 내가 못 먹는 건 뭐야?”

“그건 잘 알지. 복숭아.”

“당연히 잘 알겠지. 복숭아를 먹으면 내 얼굴에 흉측한 발진이 올라오니까.”

래베카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다 틀렸어, 제플린. 내가 좋아하는 건 들판에 피는 토끼풀의 꽃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사과잼을 올린 핫케이크. 그리고 난 이제 복숭아를 먹을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당신은 복숭아 알레르기가…….”

“넌 그 긴 세월 동안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레베카는 아름답다’와 ‘레베카는 복숭아를 먹으면 흉측해진다’, 이것뿐이구나. 그러고도 당신이 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

“율리안은 말이야. 내가 좋아했는지도 몰랐던 것을 알려줬어. 한데 너는, 내가 좋아하던 것까지 싫어하게 만들었어.”

제플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레베카는 그의 다 타버린 뒤통수를 노려봤다.

순간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위, 위선 떨지 마!”

“뭐라고? 뭐라고 하는지 잘 못 들었는데?”

레베카가 귀에 손을 대고 갸웃거렸다.

그녀의 비웃음에 제플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모멸감에 부르르 떨었다.

“위선 떨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사실은 율리안 그 자식의 얼굴을 사랑했던 거잖아. 율리안 그 자식도 마찬가지야. 네 얼굴이 흉측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지금 당신이 내 꼴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글쎄. 난 율리안이 너 같은 몰골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키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네 눈에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다른 게 없어.”

“지금도 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푸핫. 그럴 리가 있겠니? 정말 착각하는 거 하나는 타고 났다니까. 잘 봐, 제플린.”

레베카가 손거울을 꺼내 들어 제플린 앞에 들이밀었다. 그는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흉측하지? 너도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난 돌아온 그날부터 네가 지금처럼 느껴졌어. 아주 더럽고 끔찍한 괴물처럼. 네 내면과 외면이 이제야 일치한 것뿐이야. 제플린.”

레베카는 손거울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쇠창살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만 가봐야겠다. 사랑하는 남편이 날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야.”

“나, 나도…… 나도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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