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뒤돌아서던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
“뭐?”
“내가 만약 오벨리아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야. 그럼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었겠지. 내가 이 망할 집안에서 태어난 건 내 선택이……!”
“닥쳐.”
레베카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어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네 사정 따위 궁금하지 않아. 내가 당신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야. 당신이 나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다는 거. 네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내게 제플린 데본셔는 그저 악마 새끼일 뿐이야.”
“레베…….”
“부디 지옥으로 가는 길도 순탄치 않기를 매일 밤 기도할게. 네 앞날에 불지옥만이 기다리기를.”
레베카는 기도하는 시늉을 하곤 매몰차게 발을 돌렸다.
“레베카! 레베카!”
그리고 그녀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며칠 전처럼 수도의 광장엔 인파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황제의 발표가 있을 때와 같은 엄숙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개중에는 목에 좌판을 걸고 그 안에 간식 따위를 넣어서 파는 장사꾼도 있었다.
마치 축제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요하네스가의 마차가 광장에 들어섰다.
율리안과 레베카, 그리고 칸나와 크로아가 차례로 마차에서 내렸다.
율리안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군. 악당들의 결말에 맞지 않는 날씨야.”
“그래? 난 절망하는 표정을 잘 볼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은데?”
레베카의 살벌한 대답에 율리안이 움찔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내 아내는 정말 무서운 여자야. 그래서 더 좋지만.”
율리안이 레베카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며 코며 볼에 입을 연신 맞춰댔다.
쪽-하는 소리가 민망하게 주변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크로아는 아예 모르는 사람인 척 멀찌감치 떨어져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을 흘깃거리는 시선이 늘어나자 레베카가 기겁을 하며 율리안을 밀쳐냈다.
“율리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뭐 어때서. 당신이 내 아내인 걸 이제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작작 하십시오! 레베카 님께서 싫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칸나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호통쳤다.
율리안이 그녀에게 뭐라 대꾸하는 사이, 레베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레베카 님! 여기예요. 여기!”
카트린느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레베카가 환히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카트린느! 이렇게 마음대로 나와 있어도 되나요? 황제 폐하 곁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었어요?”
“에이. 괜찮아요. 그리고 이것 보세요. 전 지금 황녀가 아니라 황실 연금술사 신분으로 나와 있는걸요?”
카트린느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흰색 로브가 겨울바람에 붕 떠올랐다.
레베카는 로브에 그려진 연금술사협회 마크와 로티카나 황실 인장을 보고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멋지네요. 우리 요하네스 연금술탑도 분발해야겠는걸요?”
“그래도 연금술탑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죠.”
그때였다.
“황녀님! 준비 다 됐습니다!”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카트린느에게 뛰어와 말했다.
카트린느의 표정인 일순 진지해졌다.
“그래? 그러면 수상한 자가 있는지 잘 확인해보도록 해.”
기사에게 명령을 하던 카트린느가 난감한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이거 어쩌죠? 좀 더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바쁠 것 같아서요.”
“전 괜찮으니 일하러 가세요. 국민들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죠. 대신 다음에 시간 날 때 성에 꼭 들려주세요.”
“좋아요! 맛있는 홍차를 선물 받았는데 꼭 들고 가겠어요.”
“기대할게요.”
레베카는 카트린느가 황실 연금술사 무리를 향해 뛰어가는 걸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서 황실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데스라치노의 처형을 막으려는 세력을 우려한 탓일 것이다.
국교를 폐지한 뒤로 전국 각지에서 신데프리아교를 향한 공격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작은 분풀이 정도에 그쳤지만 점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조만간 내전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때문에 자히드라는 처음부터 싹을 잘라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엔 카트린느의 무기가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레베카, 마가렛이 널 찾고 있어.”
카트린느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율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코끝이 시릴 만큼 추운 날이었지만 큼지막한 그의 손엔 후끈후끈 열이 차 있었다.
레베카는 그 따스함이 좋아 가만히 웃었다.
“당신 손은 참 따뜻한 것 같아.”
“방금 난로에 손을 쬐다 왔거든. 당신은 손이 항상 차가우니 내가 데워줘야지. 아, 저기 있군. 이봐, 내 아내는 여기 있어!”
어느 순간부터 율리안은 자신을 남에게 지칭할 때 꼬박꼬박 아내라 부르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그에게 속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레베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 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큰일이 있었다면서요.”
마가렛이 걱정스레 눈썹을 늘어뜨리고 물어왔다.
“다 잘 해결됐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머, 오늘은 잭도 왔네? 안녕, 잭.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부인께선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잭은 예전보다 더 총명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율리안이 기분 좋게 웃으며 잭의 머리를 흩트렸다.
“이 꼬맹이, 마음에 드는걸?”
“잭! 네가 말한 사탕 사 왔다!”
그때 유스타프가 커다란 사탕 봉지를 품에 안고 달려왔다. 그는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로 입을 헤벌쭉 벌린 채였다.
그를 발견한 율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선약이 있다더니 이거였어?”
“히익! 공작님!”
“이제 공작 아니야.”
“아, 그렇지……. 배, 백작님, 선약이 있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고요. 마가렛 양이 먼저 제게 오늘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셔서…….”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가렛이요?”
마가렛이 멋쩍은 듯 목을 쓸었다.
“아……. 항상 잭의 공부를 도와주셔서 감사의 의미로 대접하는 거예요. 다, 다른 의미는 없답니다.”
유스타프도 격하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든가, 공연히 얼굴을 붉힌다든가 하는…….
잭은 안간힘을 쓰며 둘 사이를 떨어트리려 하고 있지만 유스타프를 향한 악감정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레베카는 진심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녀는 둘의 결혼에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율리안의 팔짱을 꼈다.
“그럼 즐겁게 관람하시길 바랄게요. 저희는 이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봐야겠어요.”
마가렛 일행이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즈음 율리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마가렛과 더 이야기 안 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았어. 그리고 지금은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상책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어린애는 몰라도 돼.”
“어린애? 지금 날 어리다고 했어? 좋아. 오늘 밤 진정한 어린애의 투정이 뭔지 보여주지.”
그러면서 율리안은 레베카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레베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피했다.
“밤에 보여준다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결국 레베카는 율리안의 손에 잡혔다. 그는 레베카를 번쩍 들어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둘은 이마를 맞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거참. 제발 그만하세요! 네?”
멀리서 보다 못한 크로아가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여기 애들도 많은데 꼭 밤 어쩌고저쩌고를 말하셔야 했습니까? 릴리 아가씨께서 오시지 않으셔서 망정이지, 원…….”
“다 들렸어요……?”
레베카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두 분 사이가 좋으신 건 알겠지만요. 저 살벌한 처형대를 보고도 그러고 싶으세요? 대단들 하시지.”
레베카는 크로아의 손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커다란 처형대 위에 포대 자루를 쓴 사형수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유례없이 많은 사형수들은 처형대 아래까지 줄을 잇고 있었다.
“레베카 님. 따뜻하게 데운 와인입니다 뜨거울 때 드십시오.”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떠서 제플린을 찾고 있을 때 칸나가 불쑥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율리안과 크로아에게도 와인을 나눠준 뒤 제 몫의 잔을 손에 감쌌다.
시나몬 향이 물씬 나는 핏빛 와인은 거리에서 파는 것 치고 맛이 좋았다.
“사냥개들도 이 자리에서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칸나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데본셔 백작가에서 일할 동안 사냥개들과 정이 든 모양이었다.
사냥개들은 피해자이긴 했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밝혀진 죄목에 대해선 벌을 받아야만 했다.
레베카는 칸나의 울분이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시작하나 봅니다.”
사형집행인이 처형대 위로 올라가자 우레와 같은 환호와 함성이 쏟아졌다.
그는 희극인이라도 된 듯 처형대를 무대처럼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에 크로아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 일인데 너무 가벼운 거 아닙니까?”
“즐길 거리가 없는 세상에 사형 집행이 유일한 낙이라는 사람도 있다잖아. 그리고 저기 서 있는 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짐승 새끼지. 아, 이건 짐승에 대한 모욕이려나.”
율리안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형대를 말없이 응시하던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앞으로 더 가까이 가자. 여기선 얼굴이 잘 안 보이잖아.”
사람들의 함성이 고조되자 레베카 일행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말없이 따르는 칸나와 달리 크로아는 질겁을 하며 뒤에 남았다.
율리안이 고압적으로 내려다보자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줬다.
“여기가 특등석인 것 같네.”
율리안이 단두대를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처형식을 시작한다!”
사형수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목이 뎅겅 잘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튀어나왔다.
데스라치노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 때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지만 뒤이어 나오는 다른 사형수 사이로 그의 최후는 금방 잊혔다.
“의외로 교황이 죽을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군.”
“분명 난동을 준비한 무리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시작 전에 다 잡혀갔겠지. 카트린느가 얼마나 꼼꼼한데.”
곧이어 랭스터 후작과 안톤이 처형대 위에 올라섰다. 포대가 벗겨진 뒤에도 둘은 세상을 향한 분노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랭스터 후작은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