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우매한 인간들아! 여신께선 반드시 진실을……!”
“거 시끄럽소. 지금 사형수들이 많아서 마지막 발언은 생략된 거 모르시오? 아직도 자신이 특별대우 받는 줄 아나 보네.”
사형집행인이 랭스터 후작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좌중에서 폭소가 쏟아졌다.
랭스터가 고꾸라진 채로 그를 노려봤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빨리 목이나 내거슈.”
결국 랭스터도 다른 이들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
뒤이어 단두대 앞에 선 안톤은 아무런 반항 없이 자신의 최후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제국의 실세라고 떠들던 자의 최후치곤 허무하군.”
율리안이 찝찝한 얼굴로 랭스터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를, 제 가문을 쥐락펴락했던 자의 말로를 보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는 혀를 한 번 쯧- 하고 찼다.
“이고르는 아직도 잡히지 않은 모양이야.”
“암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잖아. 아마 그간의 인맥을 이용해서 도망다니고 있겠지.”
“황실 기사단까지 동원해 놓고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황제가 명을 내린 지 오래인데.”
레베카와 율리안이 이고르의 행방을 유추해보고 있을 때 갑작스런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괴, 괴물이다!”
제플린이 얼굴을 드러내자마자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벌벌 떨며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추하군.”
율리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이 살인자!”
그때 썩은 계란이 허공을 가르고 제플린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게 신호였다.
사방에서 바나나 껍질이며 생선 대가리 같은 쓰레기가 날아왔다.
“너 때문에 내 사업이 망했어!”
“내 딸! 내 딸을 돌려내 이 살인마야! 악마야!”
“당신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죽었어. 너도 죽어!”
“죽어라! 이 못생긴 괴물아!”
제플린에게 그동안 시달렸던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어떤 사형수가 등장했을 때보다 격한 반응이었다.
율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적잖이 해 처먹은 모양이야. 그러게 사람이 정도를 알아야지.”
사형집행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음식물 쓰레기 세례를 받는 제플린을 바라봤다.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집행인에게 애원했다.
“제발…… 제발 죽여주시오.”
수도 없이 사람의 목을 내리친 그가 약간의 동정심을 품을 정도로 제플린의 몰골은 처참했다.
집행인은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그를 단두대로 이끌었다.
그 순간에도 처형대 위로 쓰레기가 날아왔다.
제플린은 비척거리며 단두대를 향했다.
그는 어서 빨리 이 악몽이 끝나기를, 꿈에서 깨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손과 발의 감각을 앗아갈 정도로 시린 겨울 공기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줬다.
단두대에 목을 내건 제플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바로 앞에 레베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율리안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분명 율리안이 서 있는 자리는 제 자리였다. 세기의 커플이라 칭송받았던 건 저 애송이가 아니라 자신과 레베카였다.
한데 그녀는 지금 율리안 요하네스 곁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제플린은 이 모든 광경이 낯설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제 레베카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 결국 그녀의 행복을 자신의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제플린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기 전, 그가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레베카!”
그 말과 함께 그의 목이 두 동강 났다.
“저 자식이…….”
율리안이 주먹을 쥐었다. 그는 제플린의 시체라도 난도질할 기세였다.
레베카가 그를 만류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당하고 있어. 저길 봐.”
바닥으로 떨어진 제플린의 머리를 향해 사람들이 침을 뱉고 있었다.
“지옥으로 꺼져라.”
레베카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담담하게 바라봤다.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달려왔건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그를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죽여 왔던 탓일까.
그저 허망하기만 했다.
“레베카, 이제 가자. 더 이상 볼 것도 없으니.”
“그래.”
고저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율리안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우리 가족 여행 가자. 아주 좋은 온천을 알아놨어. 릴리도 데리고 가자. 모든 걸 잊어버릴 만큼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레베카의 눈에 생기가 반짝 돌았다.
석고로 굳힌 듯 줄곧 굳어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레베카는 겨울 산에 내린 한줄기 햇빛만큼 찬란하게 웃었다.
율리안이 멈칫할 정도로 어여쁜 미소였다. 행복에 겨운 미소였다.
“그래! 그러자! 나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 율리안.”
복수는 허무했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텅 빈 세월뿐이었다.
그러나 의미가 없진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의미가 있었다.
* * *
요하네스 백작 성으로 돌아온 레베카와 율리안은 달콤한 일상생활을 즐길 여유도 없이 일에 끌려다녔다.
하루아침에 요하네스 공작가에서 백작가로 뒤바뀐 탓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본느 살롱의 인기가 부활했기에 율리안 또한 고객들의 입맛에 맞춘 살롱을 디자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덕분에 요하네스 백작의 행정적 업무는 고스란히 레베카의 몫이 되었다.
“이건 내일 오전 안으로 처리해주세요. 그리고 이 건에는 사인 못합니다. 우리 쪽이 손해 보는 거래예요. 그리고 매수한 데본셔가의 사업은 각 가신들에게 싼값에 팔아넘겨 주세요. 약조를 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가 건네받은 서류만 해도 두 팔로 안을 수 없을 지경인데 크로아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백작님이었다면 석 달을 걸릴 일을 이 주 만에 해결하시다니…….’
레베카의 일 처리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가는 법도 없었다.
크로아는 기계처럼 서류를 빠르게 검토하는 레베카를 감격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레베카가 고개를 들었다.
“뭐죠?”
“새삼스레 이제 정말 안주인이 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그전에는 안주인 같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크로아는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횡설수설하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쓸 일이 많아 바짝 긴장하고 있던 레베카의 눈매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북받치는 감정에 그녀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레베카의 침묵에 크로아는 더욱 당황하며 목을 긁었다.
“그, 그런 뜻 아니란 거 아시죠?”
레베카는 그의 다정한 초록색 눈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전 생에서 그를 간호했을 때가 생각났다.
저를 매번 밀어내던 크로아가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던 순간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이후로 크로아는 율리안의 비밀을 줄줄이 레베카에게 말했었다.
레베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물론이죠. 크로아가 그렇게 말해주니 뿌듯하네요. 인정받은 느낌이에요.”
“인정이라니요! 제가 뭐라고 부인을…….”
“이 성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지요.”
“예……?”
“지금 급한 일만 처리하면 이제 신전과 관련된 일이 없으니 율리안이 일하기 한층 수월할 겁니다. 제가 기반을 닦아두고 갈게요. 그러니 율리안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도록 크로아가 잘 도와주세요. 부탁할게요.”
새삼스러운 부탁에 크로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이야기하신 걸 가져왔습니다.”
“아. 이리 주세요.”
하인 한 명이 꽃다발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싱싱한 수선화가 청초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레베카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유스타프는 대단하네요. 이 겨울에 수선화라니요.”
“그러게요. 예쁘군요. 서재에 꽂아 두시려고요?”
“아니요. 크로아에게 줄 건데요?”
“예? 저한테요?”
“네. 그리고 조세핀한테 가져다줘요. 조세핀이 수선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릴리에게 전해들었어요.”
레베카는 떠넘기듯이 꽃다발을 크로아에게 건넸다.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던 크로아의 얼굴이 일순 불타올랐다.
“백작 부인! 이런 식으로 절 놀리시면 곤란…….”
“놀리는 거 아니에요. 어서 가보세요. 지금쯤이면 릴리와 산책을 할 시간이네요. 제가 드린 서류는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가세요. 다른 사람을 시킬 테니까요.”
“그래도 일은 하고 갈 겁니다. 제가 안 하면 누가 다 합니까.”
“할 사람 많아요. 비서를 몇 명 더 뽑았잖아요. 그러니까 가끔은 책임감을 내려놓고 인생을 즐기세요. 율리안에게 모든 걸 걸기엔 크로아의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요.”
레베카는 크로아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얼른 나가세요.”
당분간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 서재의 문이 세차게 닫혔다.
갑자기 축객령을 받은 크로아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수선화 향기가 코를 슬그머니 간지럽히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드디어 끝냈군…….”
마지막 디자인을 마무리한 뒤 율리안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밖을 보니 벌써 점심 무렵이었다.
그는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레베카의 서재로 향했다.
한창 일할 시간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안에 없었다.
“마님께선 친우분들과 약속이 있으시다고 일정을 다 미루셨어요.”
율리안이 서재를 기웃거리고 있자 지나가던 하인이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디를 가든지 그가 레베카를 찾는 탓에 고용인들은 율리안이 운을 떼기만 해도 레베카의 행방을 줄줄이 읊곤 했다.
“아…… 그게 오늘이었나.”
“예. 아마 준비 중이실 테니 침실로 가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는 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등장하자마자 자리를 뜨기 바빴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그에게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변화가 낯설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율리안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곤 안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제 모습을 살폈다.
“피부가…… 거칠어지긴 했군.”
그래도 이 정도면 레베카를 만나기엔 문제가 없었다. 어제 우유로 세수를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는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한창 단장을 하던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
율리안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문가에 기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