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준비 다 했어?”
“거의 다 했어.”
율리안이 슬며시 화장대로 다가왔다. 하녀들이 알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레베카의 올림머리를 마지막으로 손봐주며 말했다.
“오늘도 빛이 나네. 이 얼굴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볼 거라 생각하니 질투가 나는걸?”
율리안은 레베카의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잠시 매만지다 이윽고 허리를 굽혔다.
“율리안……?”
그는 레베카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의 집요한 움직임에 레베카가 목을 움츠렸다.
“무, 무슨 짓이야!”
율리안이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목에 닿았다. 레베카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대로 자국을 남긴다면 당신이 곤란할 테지.”
“아…….”
치사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레베카의 취약한 곳을 속속들이 찾아냈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분명 그를 밀어내야 하는 데도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율리안은 목에서 턱으로, 그리고 결국 그녀의 입술까지 침범했다. 그의 집요한 입술이 부드럽게 레베카를 집어삼켰다.
마치 크림이 입 안에 가득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레베카는 몽롱하게 눈을 떴다.
율리안은 그녀의 반응에 옅게 웃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속닥거렸다.
“가지 마. 응? 나랑 놀자.”
그 말에 레베카는 그만 알았다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때마침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에 레베카는 번쩍 눈을 떴다.
이러다간 정말 늦을지도 몰랐다.
레베카는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치며 눈을 흘겼다.
“이 요망한…….”
율리안은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아, 아깝네. 거의 다 넘어왔는데 말이야.”
“율리안, 당신은 정말이지!”
“미안해. 하지만 나랑 놀아줬으면 하는 건 진심이었어.”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에 묻은 자신의 붉은 립스틱을 보며 레베카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립스틱이 다 지워졌다. 내가 다시 발라줄게.”
율리안은 레베카의 턱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천천히 색을 입혔다.
“오늘은 코랄색이 더 좋겠어.”
부드러운 붓이 입술을 간지럽히는 감촉이 좋았다.
레베카는 입을 살짝 벌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기다란 속눈썹에 그림자가 졌다.
겨울 햇살에 그녀의 하얀 얼굴이 환히 빛났다.
지나치게 매혹적인 광경에 율리안은 결국 손을 멈추었다. 그러곤 입을 가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미치겠군……. 도저히 못하겠어. 나머지는 당신이 해.”
레베카는 등을 돌린 율리안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서둘러 단장을 마무리했다.
머리에 핀을 꽂고 있을 때 율리안이 두꺼운 망토를 들고 왔다.
“오늘은 날씨가 추우니 이거 입고 가.”
“못 보던 옷이네?”
“새로 샀지. 당신이 추위에 떠는 건 절대 못 봐.”
그의 말대로 망토는 확실히 따뜻했다. 안감에 양털이 잔뜩 들어가 있어 마치 이불을 감싼 느낌이었다.
율리안은 연분홍색 망토를 그녀에게 둘러주고는 단단히 앞을 여몄다.
“데려다줄게.”
“안 돼. 어서 가서 자. 당신 어제 밤새 일했잖아. 새벽에 잠깐 자러 왔다가 아침에 다시 나갔지?”
“걱정 마. 그 정도 체력은 돼. 그나저나 늦은 거 아니야?”
율리안이 회중시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시간을 확인한 레베카가 화들짝 놀랐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좋아! 얼른 가자.”
율리안은 자연스레 그녀의 소지품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섰다.
결국 원하는 걸 다 얻어낸 율리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레베카는 그의 치밀한 움직임에 할 말을 잃었다.
* * *
레베카가 도착한 곳은 몽푀르의 유명한 씨푸드 레스토랑이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은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예외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 아니 백작님! 귀빈들께선 미리 와 계십니다.”
지배인이 손을 비비며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율리안이 레베카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친구들과 즐길 걸세. 다 귀한 사람들이니 신경 좀 써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하는 지배인을 보고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놓았다.
“그럼 재밌게 즐겨. 나중에 집에서 보자.”
“인사도 안 하고 가려고?”
“내가 가면 부담스럽기만 하지. 오랜만에 여자들끼리 노는 거라고 엄청 기대했잖아. 거기에 초칠 수는 없지.”
“고마워. 율리안.”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이 정도쯤이야. 행복한 시간 보내.”
율리안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레베카는 지배인을 따라가며 카운터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 율리안을 힐끔 뒤돌아 봤다.
* * *
“이 방입니다. 근처의 방엔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으니 편히 말씀들 나누십시오.”
지배인이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마가렛과 카트린느, 그리고 타니샤가 동시에 레베카를 돌아봤다.
레베카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두고 제가 늦어 버렸네요.”
“아니에요. 사실 전 마가렛하곤 살롱에서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저도요. 황녀님은 처음이지만…….”
“어머, 타니샤. 황녀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테이블 위엔 화기애애한 수다가 피어났다.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에 레베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부르신 연유가 뭔가요?”
마가렛이 조용히 물었다.
에피타이저 샐러드를 입에 욱여넣던 타니샤도 멈칫하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들을 호출했을 때는 항상 큰일이 일어난 후였다.
또 요하네스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세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게…… 그냥이요.”
“예……?”
“한 번쯤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놀고 싶었어요.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하고요. 실례가…… 됐으려나요? 이런 사교모임을 한 지가 너무 오래라 요새 유행을 잘 몰라서요.”
“실례라니요! 그런 섭섭한 말씀 하지 마세요.”
카트린느가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며 레베카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좋은 분들을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맞아요. 황녀님이라니 최고의 인맥이에요. 아, 좀 속물 같았나요?”
“타니샤는 솔직한 게 매력이죠. 저도 사교 모임에 참석한 지 오래된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의가 가득한 눈빛들에 레베카는 고개를 숙였다.
창밖을 물끄러미 보던 타니샤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라니.”
소리 없이 와인을 들이켜던 마가렛이 타니샤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죠. 이곳은 음식도 훌륭해요.”
“전에 한 번 와 봤나 봐요?”
“아. 맥핀 씨와 함께…….”
“맥핀이요? 그 악마의 발톱의 유스타프 맥핀 씨요?”
카트린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가렛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녀께서는 맥핀 씨를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잖아요! 뭐라더라……. 식물의 마법사? 여튼 지금 서로 모셔가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폐하께서도 이번 정찬에 초대했는걸요?”
“아, 그건 들었어요. 엄청 긴장하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눈치였어요. 가끔 보면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분이시죠.”
마가렛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말수가 적은 마가렛이 유스타프 이야기가 나오자 무척 수다스러워졌다.
타니샤와 레베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가렛을 곁눈질했다.
카트린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 같아요? 유스타프 맥핀이? 제가 듣기론 무척이나 괴팍해서 얼굴값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헛소문이에요! 맥핀 씨는…….”
마가렛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타니샤와 레베카를 발견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타니샤가 분통을 터뜨렸다.
“맥핀 씨는…… 다음은 뭔가요? 마가렛! 이렇게 이야기를 끊는 건 범죄예요! 제가 그렇게 정해뒀어요.”
“그래요. 마가렛. 저도 궁금하네요. 유스타프에 대한 마가렛의 평가는 뭐죠?”
“레베카 님까지 왜 이러세요…….”
마가렛이 난감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카트린느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여러분도 맥핀 씨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학자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사람인데 의외군요. 뭐, 요하네스 백작가 소속이니 레베카가 관심을 두는 건 이해는 가지만요. 타니샤는 왜죠?”
그 말에 타니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께선 이런 쪽에는 영 소질이 없어 보이네요. 미래의 아무개씨가 고생 좀 하시겠어요.”
“예……?”
카트린느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잔뜩 띄우고 있는 사이 간결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곧이어 커다란 테이블 위에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다들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다 점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음식의 향연이 끝이 없었다.
레베카가 당황하며 물었다.
“저희가 시킨 것보다 훨씬 많이 나온 것 같은데요……?”
“아. 백작님께서 음식을 더 추가하셨습니다.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메뉴로 특별히 고르셨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웨이터가 문을 살며시 닫고 밖으로 나갔다.
타니샤가 음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말했다.
“이게…… 그 식고문이라는 거죠?”
어색해진 분위기에 마가렛이 빠르게 포크를 들었다.
“마, 맛있겠네요. 어서 먹죠.”
음식이 훌륭했기에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레베카는 오랜만에 감시자 없이 밥을 먹을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먹을 수 있었다.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다 먹어버렸네요.”
카트린느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타니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부른 배를 문질렀다.
“진짜 더는 못 먹겠어요…….”
“후식 나왔습니다.”
“어머, 맛있게 생겼네.”
타니샤의 빠른 태도 전환에 레베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는 배불러서 다 못 먹겠다면서요.”
“후식 배는 원래 따로 남겨두는 거라고 했어요.”
말을 마친 타니샤는 눈을 빛내며 초콜릿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카트린느가 차를 마시며 레베카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종이 가방을 턱짓했다.
“그런데 그 짐들은 다 뭔가요? 어디 쇼핑이라도 다녀오셨어요?”
“아,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