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레베카는 종이 가방 안에서 곱게 포장된 선물을 꺼내 들었다.
“여러분들께 감사의 표시로 보잘것없는 선물을 준비해봤어요.”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레베카가 내민 선물 상자를 받아들었다.
“타니샤에게 준 건 향후 십 년간의 시장 예측이에요. 완전히 맞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네? 이거 완전 천기누설 아닌가요? 이런 큰 선물을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타니샤는 얼른 포크를 내려놓고 두툼한 서류철을 정신없이 읽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카트린느를 바라봤다.
“카트린느는 앞으로 잘할 테지만 언젠가 한 번은 힘든 일이 생기겠죠. 그때마다 도움이 되어줄 만한 걸 준비했어요.”
선물을 풀어본 카트린느가 비명을 질렀다.
“설마 이거, 베르틴의 오르골이에요……?”
“보자마자 아시네요. 맞아요. 카트린느의 롤모델이 베르틴 연금술사라고 들었어요. 그건 그분의 첫 작품이죠. 지금은 연금술의 대부라고 불리는 사람도 첫 작품은 형편없는 오르골을 만들었다는 걸 기억해두라고요. 카트린느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성장하는 과정이에요.”
“레베카 님…….”
카트린느가 울먹거리는 소리에 서류를 읽던 타니샤가 오르골을 흘깃 내려다봤다.
“그게 그 유명한 베르틴 연금술사의 첫 작품이에요? 한번 틀어봐요! 궁금하네요.”
“안 돼요!”
카트린느가 물기 젖은 눈으로 앙칼지게 답했다. 그녀는 탐욕스럽게 오르골을 품에 끌어안고 더듬더듬 말했다.
“닳아요…….”
그러곤 소중하게 오르골을 내려다봤다.
타니샤는 격한 황녀의 반응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레베카는 앞선 두 사람보다 훨씬 큰 선물 상자를 난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마가렛을 바라봤다.
레베카가 턱을 괴고 그녀에게 말했다.
“열어봐요. 마가렛.”
“그럼…….”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어보자마자 마가렛의 눈에서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레베카 님……. 이건…….”
“기디안가의 티아라예요. 유감스럽게도 마가렛의 어머니가 썼던 건 찾지 못했어요.”
“아니에요. 이건 제 어머니가 쓰셨던 티아라가 맞아요.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라 가문의 티아라가 없었어요.”
“다행이네요. 나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꼭 써줬으면 했거든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이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 레베카 님은 모르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마가렛은 연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계속했다.
레베카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제게 해주신 것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좀 더 잘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럴 여력이 안 되네요.”
타니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차차 잘해주시면 되죠.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시지만요.”
“그런가요? 어쨌든 저는 여러분이 항상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어디 있든 그것만을 빌게요.”
레베카의 초연한 말에 타니샤의 미간에 얕은 금이 갔다.
그녀는 꼭 떠날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설마 백작님과 싸운 건가? 그래서 또 이혼하려고?’
하지만 이윽고 들어온 웨이터의 말에 그녀의 의심은 달아났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계산은 요하네스 백작님께서 미리 하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백작님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이 또 있어요? 이거 완전 데프리아 탄생절인데요? 레베카, 알고 있었어요?”
레베카는 금시초문인 듯 카트린느의 질문에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내저었다.
웨이터가 자그마한 꽃다발을 들고 와 세 사람에게 안겨주었다.
흰색 장미와 하늘색 물망초가 한데 어울려 바다를 연상케 했다.
“오늘의 만남이 즐겁게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부인께 드리는 겁니다.”
웨이터가 내민 꽃다발은 세 사람이 받은 것보다 크기가 작았다.
레베카는 분홍색 꽃송이를 내려다봤다.
마가렛이 알은척을 했다.
“천일홍이네요.”
“천일홍이면 변치 않는 사랑 어쩌고로 유명한 꽃이죠?”
타니샤의 말에 카트린느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혹이라는 뜻도 있지요.”
“레베카 님, 오늘 대단한 밤을 보내실 것 같은데요?”
타니샤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레베카는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요란한 새소리에 레베카는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니 허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잠에 빠져 있는 율리안을 흘깃 내려다보다가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으음…… 어디 가려고?”
순간 율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침대 안으로 끌어당겼다.
레베카는 속절없이 끌려가 잠에서 덜 깨 몽롱한 율리안의 얼굴을 맞닥뜨렸다.
“이불 밖은 추워. 당신 아무것도 안 입고 있잖아. 그러다 감기 걸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들렸다. 레베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꺼풀 아래에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율리안이 그녀를 품속에 가둘 기세로 꼭 끌어안았다. 레베카는 단단한 그의 살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아, 따뜻하다.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같이 있자.”
“하지만 율리안, 얼른 준비해야 해. 오늘 여행가는 날이잖아. 릴리가 한 소리 할 거야.”
“내 깜찍한 여동생은 인내심이 강할 거야. 아마도.”
“이러다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때 굉장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언제 일어날 거야!”
릴리가 씩씩거리며 문가에 서 있었다.
율리안과 레베카는 혼비백산하며 이불을 얼른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레베카가 율리안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당신, 문 안 잠갔어?”
“당연히 잠갔지. 누가 또 무슨 방해를 할 줄 알고…….”
율리안은 서둘러 문을 바라봤다. 문고리가 처참하게 뜯겨 있었다.
율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여동생께서…… 아주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야.”
“내가 빨리 일어나라고 했잖아! 베키까지 왜 아직도 침대에 있는 거야?”
“자, 잠깐. 릴리!”
릴리는 두 사람을 침대 밖으로 끌어낼 기세로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나! 아가씨! 안 돼요!”
때마침 조세핀이 릴리의 뒷덜미를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동심을 크게 망가뜨릴 뻔했다.
레베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나갈게! 지금 나갈 테니까 릴리는 우리 도시락을 점검해 줄래?”
“도시락……?”
“응! 중간에 먹을 도시락을 싸달라고 주방장에게 부탁해뒀거든. 제대로 됐는지 확인 부탁해. 릴리.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빨리 내려와야 해? 알겠지?”
조세핀이 서둘러 백작 부부에게 사과를 하곤 릴리를 데리고 사라졌다.
레베카는 그제야 긴 숨을 내뱉으며 목 끝까지 올렸던 이불을 손에서 놓았다.
“문을 보강해야겠지……?”
“그래야겠어. 그나저나 릴리는 날이 갈수록 힘이 세지는군. 이러다가 성까지 들 기세야. 걱정이야. 걱정.”
그렇게 말하면서도 율리안은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 *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북쪽은 추우니 제가 챙겨드린 옷들을 꼼꼼하게 입으셔야 합니다.”
칸나가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레베카의 짐을 챙겼다.
“칸나, 나 어린애 아니야. 그 정도는 충분히 스스로 챙길 수 있어.”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여행길은 충분히 안전한가요? 그 호신용 총은 항시 가지고 계신 거죠?”
칸나는 평소보다 더 유난을 떨었다.
레베카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네가 상상하는 그럴 일은 여행 중엔 없을 거야. 아, 그렇지. 네게 줄 게 있어.”
“뭔가요?”
레베카는 줄곧 들고 있던 커다란 책 한 권을 칸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직접 쓴 거야.”
“레베카 님께서요?”
칸나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자 레베카가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안 돼, 안 돼. 내가 가고 나서 읽어.”
“왜요?”
“부끄러워서 말이야. 알았지? 꼭 마차가 출발하고 한 시간 뒤에 읽어야 해.”
“일단은…… 알겠습니다.”
칸나가 멍하니 제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멀리서 율리안이 소리쳤다.
“레베카! 얼른 타!”
릴리도 발을 동동 구르며 레베카를 재촉했다.
레베카는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칸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우리 칸나. 내게 와줘서 고마웠어. 네가 없었더라면 난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냥. 네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럼 이만 갈게. 릴리가 울기 직전인 것 같으니까.”
말을 마친 레베카는 칸나의 손을 놓았다.
마차에 오르며 레베카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어머, 레오도 같이 가는 거야?”
칸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칸나는 레베카가 당부한 대로 정확히 한 시간 뒤에 그녀가 선물로 준 책을 펼쳤다.
<칸나, 내 딸이 있었더라면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었어. 내가 아주 긴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네가 겪을 일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
첫 장을 읽는 순간부터 칸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페이지를 넘기던 칸나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1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닥쳤을 때
……10 널 이유 없이 괴롭히는 사람을 몰래 혼내주고 싶을 때……
……50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네 마음을 챙기는 법……
……106 흉이 지지 않는 좋은 연고들……
……115 아플 때 혼자서 잘 대처하는 법……>
책 속에는 정말 어머니가 딸에게 이야기하듯 소소한 일상적 조언부터 시작해 시련이 닥쳤을 때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다정한 이야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하얀 종이 위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칸나는 화들짝 놀라며 휴지로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어디에 있든 칸나를 응원하는 레베카가.>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때 칸나는 책을 안고 한동안 눈물만 주륵주륵 흘렀다.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던 칸나는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에 있든……?’
변고가 없다면 칸나는 언제나 레베카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건 레베카도 모르지는 않을 거다.
순간 섬찟한 예감이 칸나의 가슴을 두들겨 댔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온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칸나는 책을 소중히 놓아두고 서둘러 문밖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거닐던 크로아가 땀범벅으로 뛰어가는 칸나를 불러세웠다.
“칸나 양! 무슨 일입니까!”
칸나가 절박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고 외쳤다.
“레베카 님……. 레베카 님을 지금 당장 만나러 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