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한참을 달려 도착한 온천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했다.
눈이 잔뜩 쌓인 마당에 노천탕이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오래된 별장은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릴리, 이제 목욕할 시간이야.”
레베카는 율리안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 돌아온 릴리를 불렀다.
릴리가 냉큼 레베카에게 다가왔다.
“알았어!”
원래라면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레베카가 도끼눈을 치켜떠서야 발을 옮기던 릴리였다. 하지만 온천이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여행 내내 릴리는 목욕에 적극적이었다.
“적당히 하고 와. 어제처럼 음식이 다 식었을 때쯤에 오면 아주 곤란해.”
율리안이 부엌에서 웍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는 테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여행 내내 자신이 요리를 담당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결과적으로 맛있는 식사가 매끼 제공됐다. 때문에 레베카와 릴리는 그새 볼에 살이 오동통하게 차올랐다.
“우왓! 뜨거워!”
릴리가 물 안에 다리를 훅 넣었다가 바로 뺐다. 레베카가 눈을 찌푸리며 휘청거리는 릴리의 팔을 붙잡았다.
“릴리. 내가 천천히 들어가는 거라고 했잖아. 왜 매번 까먹는 거니?”
“헤헤……. 미안.”
릴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엔 레베카의 조언대로 천천히 온천에 몸을 담갔다. 그러고선 호탕하게 소리쳤다.
“시원하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가끔 보면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한다니까. 요 귀여운 것.”
레베카는 릴리의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릴리는 헤실거리며 레베카에게 찰싹 붙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질 것 같은 별 무리가 하늘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레베카는 손으로 별을 따라 그리며 별자리와 그에 얽힌 신화를 들려줬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릴리가 레베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는 거야? 베키가 들려준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별자리가 됐잖아. 그럼 우리 엄마도 저 위에 있을까?”
레베카는 잠시 멈칫하며 릴리의 젖은 머리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단순한 호기심으로 건넨 질문인 듯 릴리는 슬퍼 보이진 않았다.
“우리 릴리는 죽음이 뭔지 아니?”
“영원히 내 곁을 떠나는 거……?”
“아니, 틀렸어.”
레베카는 릴리를 무릎에 앉히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죽으면 몸을 만질 수는 없어도 영혼이란 게 남아 있단다. 만약 릴리가 그 사람을 생각하면 영혼이 릴리의 곁에 와서 함께 있어줄 거야.”
“그런데 만질 수도 없는데 그 사람이 곁에 온 건 어떻게 알아?”
“눈물이 그 증거야.”
“눈물이?”
“응. 자신을 그리워하는 걸 느낀 영혼은 그 사람을 껴안아 주러 온단다. 그런데 영혼은 차갑고 산 사람은 뜨거워서 서로가 맞닿으면 물이 생겨. 그 물이 바로 눈물이야.”
“아! 창문에 물이 생기는 것처럼?”
“맞아. 눈물이 많이 날수록 네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널 많이 사랑한다는 의미란다.”
“우와. 막 여기가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네.”
릴리가 제 가슴께를 문질거리며 말했다.
레베카는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죽더라도 릴리의 곁에 항상 있는 거야.”
릴리가 멈칫하며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릴리의 얼굴에 불안함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곧 불안함은 레베카의 따뜻한 미소에 녹아버렸다.
“밥 먹으러 와!”
율리안이 크게 소리쳤다.
레베카가 잠시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다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이제 그만 갈까? 오빠가 또 화내기 전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와 함께 별장에선 웃음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 *
“레베카 님!”
여행을 끝마치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칸나가 득달같이 달려와 레베카에게 안겼다.
“칸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닙니다.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고……. 이제 괜찮습니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칸나 양.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죠?”
크로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칸나는 눈물을 닦고 얼른 레베카의 짐을 받아 들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제가 주책을 떨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오벨리아가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레베카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 가족이……?”
“예. 레베카 님이 무척 보고 싶으시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칸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레베카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엄마가…….’
줄곧 세게 쥐고 있던 그녀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레오가 나무 위에 올라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 * *
레베카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다나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우리 딸! 잘 돌아왔구나. 다행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말이지. 내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는데도 네 아빠가 꼭 가봐야겠다고 부득불 우기지 뭐니.”
다나에가 테오를 흘겨보며 말했다. 테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내가 또 호들갑을 떨었구나. 둘 다 여독이 쌓였을 텐데 우리가 괜히 온 건 아닐지 몰라.”
“아닙니다. 조만간 모시려고 했는데 먼저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릴리도 저렇게 좋아하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율리안이 릴리를 돌아봤다. 그녀는 어느새 피곤함도 잊은 채 헤레나와 리비아와 함께 재잘거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간드러지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곧이어 하녀가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왔다.
찻잔에 채워지는 홍차를 보며 다나에가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그럼 정말 다 끝난 거지? 이제 우리 딸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다나에의 말에 모두가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다들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 따뜻한 시선이 레베카는 버거웠다.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도무지 다나에의 두 눈을 바라본 채 거짓을 고할 수 없어 레베카는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그, 그럼요. 이제 다들 행복하실 일만 남았어요.”
이래서 가족을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레베카는 흔들리는 결심에 황급히 찻잔을 들었다.
벌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발견한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어……?”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레베카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베카는 애써 웃어 보였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럼 먼저 가서 쉬고 있을래? 나는 부모님들과 좀 더 이야기하다 올라갈게.”
“아니야. 괜찮아…….”
그가 걱정스레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다나에가 사이좋은 율리안과 레베카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럼 이제 손주는 언제 안겨 줄 건가?”
“세상에. 다나에! 애들 부담되게!”
테오가 짐짓 다나에에게 핀잔을 놓았지만 그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와! 그럼 나 조카 생기는 거야?”
릴리가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헤레나가 음흉하게 물었다.
“그런데 조카는 어떻게 생기는 거야?”
“헤레나!”
리비아가 헤레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레베카와 율리안이 난감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 후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내 저주를 풀어준다고 했으니…….’
율리안은 레베카의 아름다운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를 닮은 딸이라……. 가슴이 술렁거렸다.
“물론 저희는…… 으윽……!”
“율리안!”
율리안이 돌연 무릎을 잡고 쓰러졌다. 그의 다리가 경련하듯이 바르르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크로아가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품에서 레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레베카가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레오 님께서 나무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는데……. 세상에, 백작님! 거기, 너! 어서 가서 의사를 불러와.”
“괘, 괜찮…….”
율리안은 다나에와 테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인 게 부끄러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테오가 버럭 화를 냈다.
“뭐가 괜찮다는 건가! 가만히 있게!”
테오는 서둘러 그의 다리를 붙들고 응급처치를 했다.
레베카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다가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급박한 상황에도 여유롭게 털을 정리하고 있었다.
‘레오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레베카는 고통을 호소하는 율리안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레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레베카의 눈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에 흔들리던 결심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겠지…….’
그녀는 레오의 가늘게 뜬 눈을 바라보다 다시금 손에 힘을 주었다.
* * *
“다친 다리는 이제 괜찮은 거야?”
레베카가 침대까지 율리안을 부축하며 말했다.
율리안이 그녀의 목에서 팔을 거둬내며 말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신성력이 넘쳐흐르는 탓에 한 시간 만에 다 나았어. 큰 부상이 아니었나 봐.”
“그럼 다행이지만…….”
“방 안이 조금 쌀쌀하군.”
율리안은 보란 듯이 발을 세게 굴리며 벽난로를 향했다.
레베카는 마른 장작을 집어넣는 율리안의 널따란 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결심이 섰다.
“율리안. 이리 와.”
레베카가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침대를 팡팡 쳤다.
율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난롯불이 비쳐드는 그녀의 유려한 곡선에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득달같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정말 강아지 같다니까.’
레베카는 슬며시 웃으며 율리안의 턱을 잡아당겼다. 곧이어 그녀의 달큰한 숨결이 그의 입술과 맞물렸다.
갑작스런 그녀의 습격에 율리안을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반달로 눈을 접었다.
결코 짧지 않은 입맞춤이 끝난 뒤 율리안이 달뜬 얼굴로 물었다.
“아까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만.”
말을 끝마친 레베카는 성마르게 율리안의 입술을 다시 집어삼켰다.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던 율리안은 몸을 돌려 레베카의 위에 올라탔다.
레베카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역광으로 비춰드는 난롯불이 그의 근육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레베카는 그의 모든 순간을 눈에 새길 듯이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고 매혹적인 시선이 이어졌다.
“날 안아줘. 율리안. 좀 더 세게. 좀 더 세게 안아줘.”
율리안은 기꺼이 그녀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했다. 두 사람이 내뱉는 뜨거운 숨이 방 안에 가득 찼다.
그날 밤, 요하네스 백작 부부 침실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성에가 창문에 뿌옇게 달라붙어 차가운 한겨울의 밤을 장식했다.